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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문화

대구의 근현대기 서화(書畵)와 문(文)의 문화 ⑫-심정필정(心正筆正)의 서예, 소현(素軒) 김만호/ 이인숙 2014년 12월(349호)
아트코리아 | 조회 465

심정필정(心正筆正)의 서예,
소헌(素軒) 김만호(1908~1992)

 

글|이인숙 한국학 박사, 대구대 강사

 

 

  김만호는 일제에 국권이 침탈된 암울한 시기에 태어나 한의사이자 서예가로 근현대기를 살았다. 총명했던 그는 20대 초부터 한약업에 종사하였으나 광복 후 일제 때 면허가 인정되지 않아 ‘각고의 노력 끝에’ 48세의 나이로 한의사 시험에 합격하여 1960년부터는 대봉동 방천시장 부근에서 상주한의원을 운영하였다. 생업이 안정된 후 국전에 입선하면서 서예가로서의 활동을 겸하여 62세 때 첫 개인전을 열었다. 어렸을 때‘ 10세 전의 명필’로 소문이 났던 필재와 36세(1943)때 일본의 공모전에 입선했던 서예에 대한 열망을 50대 중반 이후에야 실현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생활이 안정된 후 뒤늦게 서예가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그는 자택 2층 자신의 서실을 교육장으로 개방하여 평생 수업료를 받지 않고 서예를 가르쳤다. 1963년 봉강서당으로 출발하여 그 정체성은 서숙(1964)→서우회(1967)→서도회(1968)→연묵회(1975)를 거쳐 봉강연서회(1980)로 완성되었고 1968년부터 시작된 회원전은 올해 제47회가 열렸다. 선생은 60대 초 고혈압이 발병하여 마비가 오는 등 몸이 불편한 시기도 있었으나 불굴의 노력으로 작품 활동을 계속하였고 많은 서예인을 배출하여 대구의 서예문화 발전에 기여 하였다.

  김만호는 마음이 바르고서야 붓이 바르다는 ‘심정필정(心正筆正)’, 글씨는 그 사람과 같다는 ‘서여기인(書如其人)’의 경구가 나타내는 서예의 인격 수양적 요소를 중요하게 여겼다. 자화상이나 자전 문학이 아니라도 작품은 작가 자신의 형상화인 부분이 크지만 서예만큼 쓴 사람이 온통 드러나는 예술도 드물 것이다. 점을 찍고 획을 긋는 붓의 운용, 그 점획으로 완성되는 한 글자의 짜임, 글자들이 모여 하나의 의미 단위로서 예술적 공간인 화면 속에 배치되는 구성 등 서예의 형식미 속에는 그 작가 고유의 기질과 성격, 감정이 그대로 나타난다. 점획(點劃), 결구(結構), 장법(章法) 뿐 아니라 선호하는 서체(書體), 자신의 가치관과 지향에 따른 선문(選文), 사용하는 인장의 인문(印文)과 새김 등도 필연적으로 작가 자신의 드러냄이 된다.


  김만호의 점획은 고지식할 정도로 강경하고 반듯하며, 결구는 수직이나 수평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평정함을 보여주며, 글자간의 간격과 여백은 일정하여 고르다. 정자체인 해서를 선호하여 해서 명필로 널리 알려졌고 수신과 길상의 사자성어를 즐겨 썼다. 그의 글씨는 당나라 해서를 종합하고 전예(篆隸)를 조화시켜 ‘내 나름의 해서’를 만들어낸 1966년(59세)이후 몇 차례 서풍이 변화했다.
  <우행호시(牛行虎視)>(135×33㎝)와 <관음전> 편액은 만년인 1990년 83세 때 작품이다. 성실한 직업인으로서 삶 속에서 신운(神韻)을 추구한 서예인이었던 그의 평생이 육중한 점획, 듬직한 결구, 건실한 장법 속에 들어 있다.
  팔공산 성전암에는 <관음전> 편액과 주련 외에도 현응선원과 적묵실 주련, 자작시를 쓴 <제성전암>(1990년)을 비롯하여 신발 정리 잘하라는 푯말, 참선의 화두로도 읽히는 <각근하조고(脚下照顧)> 등 김만호의 필적이 여럿 걸려있다. 성전암에 오래 주석하였던 철웅스님(1933~2011)이 글씨 제자였던 인연 때문일 것이다.
  “서도(書道)는 나에게 하나의 종교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한 소헌 김만호 선생을 기린 소헌미술관이 작년부터 차비를 하여 지난 11월 10일 수성구 만촌동에 개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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