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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문화

대구의 근현대기 서화(書畵)와 문(文)의 문화❿-진지(眞志)의 일편단심 해정(海亭)홍순록/ 이인숙 2014년 10월(347호)
아트코리아 | 조회 435

진지(眞志)의 일편단심 해정(海亭)홍순록(1916~1983)

글|이인숙 한국학 박사, 대구대 강사 

 

  문화사(Cultural History)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네덜란드 역사가 요한 하위징아(1872~1945)는 “예술작품을 통해 그 시대 역사를 더욱 명확하고 날카롭고 다채롭게, 한층 역사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예술작품은 한 지역과 그 곳 사람들을 한층 역사적으로 바라 볼 수 있게 해준다. 근현대기 대구의 서화 또한 그렇다.


  홍순록은 1916년 식민지시기에 태어나 제국주의 침략전쟁의 후방기지로 수탈이 극심했던 일
제 말기를 20대로 보내고 30세에 광복을 맞았다. 이후 1983년 68세로 작고하기까지 그가 살았던 시대는 좌우대립의 혼란 속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육이오전쟁의 참화를 겪고, 정치적 후진성 속에서도 성공적인 산업화를 이루었던 시기이다. 한국문화사에서 20세기는 신·구의 문물과 동·서의 문화가 자리바꿈 하면서 전통적인 것에서 새로운 것으로, 중국적인 것에서 미국적인 것으로 한국인의 가치관과 예술이 거의 전면적으로 교체되었던 시기이다.
  동경 센슈대학(專修大學)에서 수학한 홍순록은 미문화원 초대 서양화 개인전을 열었고 여러 해 교직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서예와 수묵화로 방향을 바꾸었고 서화연구실을 운영하였다. 왜 그가 제도권 교육이나 미술시장에 자리 잡지 못한 서화로 방향을 바꾸어 시대의 흐름을 따르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의 업적을 기려 1986년 대구경북서예가협회 주최로 대구시민회관에서 ‘해정 홍순록선생 유작전’이 열렸고, 2006년 ‘향토출신 작고작가 회상-김수명, 손일봉, 홍순록전’이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열렸다. 홍순록은 죽농 서동균을 충실히 배운 대구 서화계의 주요 작가로 장중하면서도 시원한 필치와 순정(醇正)한 먹 맛의 사군자, 화훼, 기명절지, 산수, 풍경 등 수묵화와 서예를 남겼다.


  서예의 효용 중 하나는 명문, 명구를 작가의 예술적 감성을 향유하면서 늘 되새길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다. <윤집궐중(允執厥中)>도 그렇다. 지나치지 말고 모자람도 없도록 노력하여 “진실로 그 中을 잡으라”는 『서경』의 보편타당한 말씀은 홍순록의 필묵을 통해 생생하게 다가온다. 머릿도장은 ‘청풍명월(淸風明月)’로 유가(儒家)의 교훈에 살짝 시원한 바람을 불어 넣는 듯하다. <묵죽>은 대나무 그림의 가장 멋있는 모습인 풍죽(風竹)을 그렸다. 풍죽은 한 판의 춤이며 불가항력에 대한 저항의 몸짓이다. 대숲의 바람소리는 들쑥날쑥한, 크고 작은, 짙고 옅은 댓잎의 속도감 속에 들어있다.
  1982년, 대구가 지금보다 ‘32년 더 젊었을 때’ 열린 홍순록 개인전 <추천의 말씀>에서 당시 대구문화방송 사장 한준우 씨는 “해정선생(海亭先生)의 서화(書畵)에 대한 진지(眞志)는 자신이 피력했듯이 일편단심(一片丹心) 바로 그것입니다.”라고 했다. 대구문화예술회관에 홍순록의 서예와 수묵화 80여 점이 소장되어 있고, 홈페이지의 사이버전시실에서 볼 수 있다. 고령 출신인 그가 왜‘ 바다 해(海)’자로 호를 삼았는지 의문이다.
  하위징아는 또 “우리가 과거에 대해서 눈길을 돌리는 것은 주로 새로운 것의 근원을 찾기 위해서이다.”라고 했다. 대구적인 것을 찾는다면 홍순록의 서화 또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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