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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이인숙의 옛그림 예찬]이응노(1904~1989) '군상'
아트코리아 | 조회 203
[이인숙의 옛그림 예찬]이응노(1904~1989) '군상'
배포 2019-08-29 10:14:46 | 수정 2019-08-28 13:53:45 |



종이에 먹, 167×266㎝, 대전 이응노미술관 소장
미술관에 걸어도 큰 그림인데 이렇게 작게 보여드리자니 민망하지만 이 작품이 가장 마음을 끌었다. 화면 가득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역동적인 인간상을 그렸다. 사람인 것은 분명하지만 성별도 노소도 미추도 구별되지 않는 인간의 모습일 뿐이다. 이 동작은 춤이다. 몸짓으로 이루어지는 춤은 인류가 원시인일 때부터 향유한 예술일 것이다. 이들은 팔다리를 격렬하게 움직여 춤을 추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서기 2019년인 지금 지구에 약 77억 명이 살고 있다고 하는데 이 그림에 2천명은 그린 것 같다.

'군상'(群像, people)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서로 다른 동작이 모여 이룬 군무이다. 집단지성의 현장 행동 광경인 것이다. 몸집도 비슷하게 그려진 이들은 서로 동등한 익명의 개성이다. 국적 불명, 시공 불명의 감각 즉 보편성의 층위를 매체의 국지성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 느끼는 것은 이응노가 외국에서 이방인으로 살며 작업했다는 이유도 있는 것 같다.[close]수천의 군중이 출현하는 군상 시리즈는 1980년대에 나타나는데 그가 자신의 예술을 6기로 나눈 중 마지막인 '서예적 추상' 시대에 속한다. '군상'의 메시지를 우리나라 사람들은 198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오일팔광주민주화운동이나 학생과 시민의 데모를 연상하고, 유럽 사람들은 반핵운동으로 보았지만 이응노는 양쪽 모두 자신의 심정을 잘 파악해 준 것이라고 했다. 20대부터 평생을 지치지 않고, 손을 쉬지 않으며 왕성하게 창작력을 발휘해 온 그는 80대의 나이에 민족과 민중이 생동하는 이런 꼭지 점을 이루었다. 붓이 움직이는 찰나의 순간 검은 먹이 흰 종이에 스며든 획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리퀴드 드로잉(liquid drawing)이라고 할 수 있는 수묵화 형식이어서 더욱 강력한 울림을 주는 '군상'은 지필묵이라는 매체의 전달력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모필 붓에 먹을 찍어 종이에 그리는 것은 그가 회화를 배운 처음의 방식이며 마지막에도 진행한 방식이다. 충남 홍성 출신인 이응노는 화가가 되고 싶어 1923년 19살 때 상경하여 해강 김규진의 문하에서 대나무 그림을 배우며 죽사(竹史)로 호를 받았다. 이듬해 조선미술전람회에 '묵죽'으로 입선했고, 1935년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에서 살며 미술 공부와 작품 활동을 하다 광복 후 돌아왔다. 1954년 국전의 짬짜미를 고발하며 추천작가 추대를 거절했던 그는 1958년 12월 한국을 떠나 프랑스로 갔다. 자신의 예술을 넓은 곳에서 높게 펼치고 싶었을 것이다. 고암(顧菴)이라는 이응노의 호는 중국의 화성(畵聖) 고개지에서 딴 것인데, 고암은 파리에 살며 그의 호처럼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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