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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숙의 옛그림 예찬]김용준(1904~1967) '문방청취'
아트코리아 | 조회 297
미술사 연구자[이인숙의 옛그림 예찬]김용준(1904~1967) '문방청취'

매일신문 배포 2019-08-21 11:36:58 | 수정 2019-08-21 10:16:30 |



종이에 담채, 29×43.5㎝, 삼성출판박물관 소장
독서의 계절은 원래 여름이라고 하는데 독서주의자들은 '여름도 독서의 계절'이라고 한다. 방금 내려놓은 듯 펼쳐진 책은 표지를 노랗게 치자로 물들였고 책장을 실로 묶은 옛날 책이다. 그 뒤에 빙렬이 있는 동그란 몸통에 긴 목의 아래와 위에 돌림무늬가 있는 청자 병이 있다. 학의 목 같다고 해서 학수병(鶴首甁)이라고 부른다. 도자기와 추사글씨를 유난히 좋아한 호고벽(好古癖)이 있던 근원(近園) 김용준이 "쌀 한 되 살 돈이 없는 판에" 두꺼비 연적을 "값을 물을 것도 없이 덮어 놓고 사기로 하여 가지고" 돌아온 날 밤 내외간에 한바탕 싸움이 벌어진 이야기가 '근원수필'에 실려 있다. 책 옆에 붉은 장식 수술을 단 여의(如意)와 불수감(佛手柑) 가지가 있다. 부처님 손처럼 생겼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은 남방 과일인데 영어로도 'buddha's hand'이다. 귀한 물건을 그림으로 구경하는 것이 기명절지화의 한 재미이다.

'문방청취'(文房淸趣)라고 화제를 쓰고, '임오(壬午) 유하(榴夏) 사우(寫于) 노시산방(老柿山房) 근원(近園)'으로 그린 날짜와 장소를 밝혀 놓았다. 1942년 석류꽃 피는 여름인 음력 5월에 그렸으니 일제강점기 말인 그때는 독서가 더욱 피서이자 피세(避世)였을 것 같다. 마당에 오래된 감나무가 있어서 노시산방이라고 했던 성북동 이 집에서 김용준은 1934년부터 10년을 살다 더 시골로 가면서 후배 서양화가인 수화(樹話) 김환기에게 팔았다. 이 집 이야기인 '노시산방기'도 '근원수필'에 나온다.

김용준은 화가이자 수필가이자 미술사학자인 다재한 인물인데 원래는 서양화가였다 동양화로 전향했다. 대구 남산동이 본적으로 아버지는 대구에서 한약방을 했다. 경성에서 중앙고등보통학교 4학년인 21살 때(1924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유화 '동십자각'이 입선하며 일찍이 재능을 드러냈다. 20대에는 대구의 서양화 그룹인 영과회, 향토회 등의 결성에 관여하고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다.

동경 유학까지 마친 잘 나가던 서양화가 김용준이 구화주의(歐化主義)의 대세를 거스르며 36살 때 길을 바꾼 것은 "내가 지나온 청춘시절의 굉장한 역사다"라고 스스로 자부할 만큼 대단한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런 결정까지는 아버지에게 '천자문'을 배운 가학(家學)에서부터 상허(尙虛) 이태준, 벽초(碧初) 홍명희 등 주위의 사우(師友), '향토색' 논쟁 등 미술계 담론, 1930년대 조선학 운동 등 여러 요인이 작용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화가이자 미술사학자로서 우리 미술의 '광채 나는 전통'에 대한 자각과 자신감이 그를 동양화로 돌아서게 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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