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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이인숙의 옛그림 예찬]허련(1808~1893) '산수도' / 매일신문 2019-08-08
관리자 | 조회 237
[이인숙의 옛그림 예찬]허련(1808~1893) '산수도'


[종이에 담채, 21×60.8㎝,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푸른색과 황색을 은은하게 담채로 활용해 장대한 산맥 중의 한 봉우리를 차분하게 한 가운데 그렸다. 그 아래 널찍하게 자리 잡은 집이 대숲과 키 큰 나무들에 둘러싸여 있는데 집주인은 다리를 건너 돌아오는 참이다. 소치 허련이 59세 때인 1866년(고종 3년) 6월 어느 비 오는 날 그렸다. 진도에서 대흥사 초의스님의 소개로 상경하여 30여 년을 김정희 문하에서 익힌 그림 솜씨와 추사체 서예 실력이 잘 발휘된 부채그림이다. 하늘 가득 써 넣은 화제는 이렇다.

 

내 집은 깊은 산 속에 있어 봄이 가고 여름이 올 때면 푸른 이끼가 섬돌을 덮고, 떨어진 꽃잎이 길에 수북하다. 문 두드리는 소리 하나 없고, 소나무 그림자 들쭉날쭉한데 새소리 오르내린다. 낮잠이 충분하니 산속의 샘물 길어오고 솔가지 주워 쓴 차를 끓여 마신다. 마음 가는 대로 '주역'이나 '시경'의 '국풍', '춘추좌씨전', '이소', '사기', 도연명이나 두보의 시, 한유나 소식의 글 몇 편을 읽는다. 조용히 산길을 거닐며 소나무, 대나무를 어루만지기도 하고, 높은 나무숲과 무성한 풀밭에서 새끼사슴이나 송아지와 함께 누워 쉬기도 한다. 흐르는 샘물가에 앉아 물장난을 치다가 양치질도하고 발도 씻는다. 대나무 그늘진 창문 아래로 돌아오면 산사람이 다 된 아내와 어린 자식들이 죽순과 고사리나물 반찬에 보리밥 지어 내오니 기쁘게 배불리 먹는다. 창가에서 붓을 놀려 되는대로 크고 작은 글씨 수십 자를 써보기도 하고, 간직한 법첩(法帖)이나 묵적(墨蹟), 두루마리를 펼쳐 마음껏 보기도 한다. 흥이 나면 짧은 시를 읊거나, '학림옥로'(鶴林玉露) 한두 단락을 쓰기도 한다. 다시 차 한 잔을 끓여 마시고 밖으로 나가 시냇가를 걷다 농원의 노인이나 냇가의 늙은이를 만나면 뽕나무며 삼 농사를 묻고 찰벼와 메벼를 이야기 한다. 맑은 날과 비온 날을 헤아려 절기를 따져보고 계산하며 한바탕 유쾌한 말을 주고받는다. 돌아와 지팡이에 기대 사립문 아래 서면 석양은 서산에 걸려 있고, 자줏빛, 푸른빛이 만 가지 형상으로 순간순간 변하며 사람의 눈을 황홀하게 한다. 소잔등에서 피리 불며 목동들이 짝지어 돌아들 올 즈음이면 달이 앞 시내에 뚜렷이 떠있다.

 

중국 남송 때 문인 학림(鶴林) 나대경이 산중생활의 일과를 쓴 산문 '산거술사'(山居述事) 전문을 써 넣었다. 스트레스 받을 일이 아예 없는 생활이다. 이렇게 살기란 쉽지 않겠지만 이런 휴가는 마음먹는다면 가능하다. 그런데 이런 그림, 곧 산수화는 원래 유토피아(이 세상에 없는 곳)를 그리는 그림이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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