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42    업데이트: 24-04-23 14:09

매일신문

[이인숙의 옛그림 예찬]김홍도 '절학송폭'- 매일신문[2019-06-27]
관리자 | 조회 187
[이인숙의 옛그림 예찬]김홍도 '절학송폭'



종이에 수묵담채, 41.7×48㎝, 간송미술관 소장

소나무를 그린 그림일까?

사실은 저 멀리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를 그린 그림이다. 아니다. 진짜는 여백을 그린 그림이다. 백지로 남은 부분인 여백(餘白)은 무언가를 그린 후 그려지지 않은 공백이다. 그러나 비었다고 하지 않고 남았다고 한다. 일부러 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경까지 전부 물감을 칠하는 유화와 달리 수묵화는 여백의 종이 바탕을 그대로 남겨둔다. 유화와 크게 차이 나는 점이다.

화면이라는 회화적 공간을 다 그리거나 칠해서 활용하지 않고 남기는 것은 그것이 더욱 효과적이라는 것을 수묵화가들이 잘 알았기 때문이다. 수묵화에서 여백은 텅 비어 있으면서 변화무쌍한 공령(空靈)의 공간이 된다. 여백을 그리는 것은 아니지만 여백이 그려져야 그림이 깊어진다.

여백은 수묵이 그렇듯 의미 깊은 발명이었다. 먹색의 농담만 사용해 흑백으로 그리는 수묵화는 당나라 말에, 덜 그려 비워둠으로서 꽉 채워 자세히 그리는 것을 능가하는 공간 활용인 여백은 남송 시대부터 적극 활용된다. 컬러를 배제하고 흑백을 택한 수묵화의 극적인 추상성과 채움 대신 비움을 선호한 여백의 미학은 동아시아 회화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절학송폭'(絶壑松瀑)은 여백을 부리는 김홍도의 솜씨가 잘 드러난 그림이다. 사람들이 대화를 통해 하지 않은 말로 서로의 속마음을 전하듯 그림도 그렇다. 그리지 않은 곳, 여백에서 실력이 나타난다. 소나무는 위아래와 좌우를 과감하게 생략했고, 폭포는 최소한으로 붓을 대어 여운이 더욱 진하다. 떨어지는 폭포 물줄기 아래 '홍도'(弘道)로 이름 두 자만 써넣었고, 주문방인(朱文方印) '김홍도' 한 방을 찍었다. 호 대신 이름을 쓴 것은 겸손한 뜻을 나타낸다. 아마도 이 그림을 받은 분이 귀인(貴人)이었을 것이다. 김홍도의 많은 걸작, 대작, 명작에 비한다면 이 작품은 작은 화첩 그림에 불과하지만 너무도 우아한 소품이다.

옛 사람들의 피서법은 정약용이 제시한 '소서팔사'(消暑八事)의 8가지를 비롯해 여러 비법이 있었다. 서늘한 계곡을 찾아가 발을 담그는 탁족(濯足), 시원한 강바람 맞으며 뱃놀이 하는 선유(船遊), 장쾌하게 쏟아지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귀와 마음을 씻는 관폭(觀瀑) 등이 그림으로 그려진 여름나기이다. 김홍도가 그려낸 비움의 미학을 마음으로 느끼며, 소나무에 기대 앉아 솔가지 그늘 아래서 폭포 소리 듣는다면 올 여름 지구상에서 가장 우아한 피서가 될듯하다.

 

미술사 연구자
덧글 0 개
덧글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