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40    업데이트: 24-04-08 14:11

매일신문

[이인숙의 옛그림 예찬]민영익(1860-1914), ‘원향(畹香)’
아트코리아 | 조회 355
미술사 연구자



1904년(45세), 종이에 수묵, 132×58㎝, 개인 소장

민영익의 운미란이 이하응의 석파란에 뒤이어 나타났고, 석파란은 김정희의 추사란에서 출발했다. 한 세상을 울린 묵란 대가가 연이어 출현한 대단한 일이 조선 말기에 일어났다. 모두 왕실 인척인 귀현(貴顯)이다. 비슷한 시대감각을 공유하면서도 상투를 벗어난 고고(高古)함, 호방한 유려함, 굳센 함축미 등 이들의 난법이 조금도 비슷하지 않은 것을 보면 사군자는 학습으로 도달할 수 있는 예술이 아님이 분명하다.

시서화에 모두 감각이 있어야하는 지식층 회화의 핵심이면서 문인화와 거의 동의어로 쓰이는 사군자는 참 미묘한 예술이다. 먹을 붓 끝에서 피어나게 할 수 있는 서예적 필력이 없으면 이룰 수 없지만 서예가라고 해서 사군자를 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화가는 또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것이 사군자의 본령이다. 글씨와 그림 사이의 그 독특한 회화성은 실현하기도 어렵고 알아보기도 쉽지 않다.

김정희가 세인(世人)들이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어떻게 좋아할 수 있을까하는 우려를 화제로 쓴 것은 비단 '불이선란'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닐 것이다. 20세기까지 명맥이 이어졌던 제작 층과 감상 층이 점차 사라져 사군자는 퇴색해가는 예술이 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원향'은 화분에 옮겨 심은 분란(盆蘭)과 정원의 난초를 함께 그렸다. "원향(畹香) 갑진(甲辰) 시월(十月) 원정(園丁) 사의(寫意)"로 제목과 서명이 있어 민영익이 45세 때인 1904년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인장은 '민영익인(閔泳翊印)'과 '송석원쇄소남정(松石園灑掃男丁)'인데 모두 오창석이 새긴 전각이다. 인장 옆에 연한 먹으로 포화가 써 넣은 화제시가 있다. 오창석과 포화는 민영익이 을미사변 후 정치에 대한 희망을 접고 상해에 천심죽재를 마련해 정착하며 교유한 청나라 말 상해화단의 대가이다.

우과총란만지생(雨過叢蘭滿地生) 비 그치니 무성한 난초 땅에서 가득 올라와

습래향초불승정(拾來香草不勝情) 향기로운 난초 캐어오니 정(情)을 이기지 못하네

편위이식장분앙(便爲移植將盆盎) 곧바로 옮겨 심으려 화분을 가져오며

만열춘풍득의행(漫說春風得意行) 봄바람처럼 넘치는 기쁨에 득의양양 하네

계동(季冬) 삭일(朔日) 포화(蒲華) 제(題)

포화는 천심죽재를 드나들며 평소 보았던 민영익의 모습을 이렇게 시로 지었다. 운미란은 민영익이 상해에서 '송석원의 물 뿌리고 비질하는 청소부', 정원사인 '원정(園丁)'을 자처하며 복건성 야생란인 건란(建蘭)을 직접 가꾸며 완성한 난법이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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