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40    업데이트: 24-04-08 14:11

매일신문

[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고희동(1886-1965)의 ‘국화’
아트코리아 | 조회 133
미술사 연구자


종이에 채색, 21×46㎝, 개인 소장

춘곡 고희동이 부채에 그린 '국화'이다. 활짝 핀 대국(大菊)의 커다란 꽃이 탐스럽다. 황금을 쌓은 것같은 노란색과 상서로운 빨간색의 국화꽃은 오상고절(傲霜孤節)을 상징하는 사군자의 국화와 결을 달리하는 화사한 가을꽃으로 그려졌다. 화제에서 봄날 그렸다고 해 계절이 맞지 않는 것은 이 부채그림을 그려준 사람이 '대국 국(菊)'자와 관련이 있어서일지 모르겠다.

국화가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 갖는 연상 중에 중양절이라는 절기와 중국의 시인 도연명이 있다. 부채꼴 테두리에 맞추어 써넣은 시구에 이 두 가지 상징이 다 들어있다. 국화그림에 화제로 즐겨 인용되는 간 송나라 때 칠언율시 '국(菊)' 중 두 구이다.

경연세우중양절(輕烟細雨重陽節) 옅은 안개처럼 가랑비 내리는 중양절

곡함소리오류가(曲檻疎籬五柳家) 굽은 난간 성근 울타리 오류가(五柳家)라네

갑신(甲申) 춘일(春日) 도(涂) 춘곡(春谷) 갑신년(1944년) 봄날 춘곡(고희동) 그리다

음력 9월 9일, 중구(重九)인 중양절에 예전 문인들은 중양연(重陽宴)을 열며 이 날을 시주(詩酒)로 기념했다. 국화철이라 국화를 감상하는 풍속도 있어 중양절을 국화절, 상국일(賞菊日)이라 했고, 중국에서는 등고절(登高節)로도 부르는데 붉은 수유열매를 꽂고 높은 곳에 올라가면 잡귀를 쫓을 수 있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이다. 양(陽)의 수가 겹치는 삼월삼진, 단오, 칠월칠석, 중양 등 중일(重日) 명절 중에서도 중양절을 양기가 가장 왕성한 길일이라고 믿었다.

국화는 절기에 있어서는 중양절의 꽃이고 인물에 있어서는 도연명의 꽃이다. '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를 따며'라고 노래한 '채국동리하(採菊東籬下)'가 유명하기 때문이다. 이 그림의 울타리는 이 시구 때문이다. 오류가는 도연명의 집이다. 그가 지은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이 자신을 남 이야기하듯 객관화시켜 쓴 전기이기 때문이다. 170여 글자의 이 짧은 문학적 자서전에서 도연명은 자신의 독서와 음주를 이렇게 말했다.

"책 읽기를 좋아했지만 너무 깊이 파고들려 하진 않았다. 어쩌다 마음에 맞는 내용이 나오면 밥 먹기를 잊을 만큼 기뻐했다. 술을 좋아하는 성향이 있지만 집이 가난해 자주 마시진 못했다. 친구가 이런 사정을 알아 간혹 술자리를 차려 초대하곤 한다. 가서 술을 마시면 반드시 취하고야 말리라 해서 준비해놓은 술을 다 마시고는 취하면 돌아왔다. 어딜 가든 머물거나 떠나는데 미련을 둔 적이 없었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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