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42    업데이트: 24-04-23 14:09

매일신문

[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박노수 '고사상월'
아트코리아 | 조회 135

박노수 작 '고사상월'

붉은 옷을 입은 예스러운 차림새의 한 인물이 높은 언덕에 앉아 노란 달과 마주했다. 화제에 "고사상월(高士賞月) 갑진(甲辰) 추중(秋仲) 심영실(心影室) 주인(主人)"이라 하여 부채꼴 끄트머리에 걸린 달은 한가위 보름달이고, 이 인물은 그 달을 감상하는 고사임을 알 수 있다. 흰 허공은 사실은 푸른 밤하늘이다.

심영실은 남정(藍丁) 박노수의 작업실 이름이다. 내 몸이 내 그림자를 만들 듯, 내 마음이 비추어진 그림자가 곧 나의 그림이라고 한 것이다. 박노수 회화의 주제는 외물(外物)이 아닌 화가의 내면에 있었고 그런 그림이 곧 사의화(寫意畵)이다.

산수화의 점경인물 중에는 화가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인물이 많다. 명소를 손짓하며 가리키는 갓 쓴 양반도 등장하고, 지팡이 짚고 노란 두루마기 자락 휘날리며 바쁜 걸음을 옮기는 노인장도 출몰하며, 산촌의 외딴 집을 향해 언덕을 오르는 지게 진 농사꾼이 나오기도 한다. 각각 겸재 정선, 소정 변관식, 청전 이상범이 즐겨 그린 점경인물이다.

이상범의 문하에서 처음 붓을 잡았다가 미술대학이 생기자 제도권 교육으로 동양화를 배운 1세대인 박노수는 스승의 농부와 전연 다른 캐릭터인 고사 또는 소년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고사는 자연 속에서 자족(自足)하며 세속의 출세와 무관하고자하는 자이고, 소년은 어른이 돼 세상의 일원이 되고 싶지 않은 자이다. 산수자연 속의 고사와 소년이 박노수의 내면이며 그의 세계관이다. 그의 회화가 구현하는 바는 탈속이며 피속이다.

고사가 홀로 바라보는 달은 중국의 시선(詩仙) 이백이 소환해 술친구로 삼았고, 술잔을 들고 말을 걸었던 예술가의 달이다. 이백은 청천(靑天)의 달에게 언제부터 그렇게 있었냐고 물었다. 달이 대답해줄 리는 없고 이렇게 자답한다.

금인불견고시월(今人不見古時月) 지금 사람은 옛 달을 보지 못했지만

금월증경조고인(今月曾經照古人) 지금 저 달은 옛 사람을 비추었으리

고인금인약류수(古人今人若流水) 옛사람이나 지금사람이나 모두 흐르는 물과 같아

공간명월개여차(共看明月皆如此) 똑같이 명월을 바라본 것이 다 이와 같으리라

유원당가대주시(唯願當歌對酒時) 오직 바라는 것은 노래하고 술 마실 때

월광장조금준리(月光長照金樽裡) 달빛이 오랫동안 금 술통 비추어 주기를

고사(高士)라야 달이 눈에 들어오고 달과 대화할 수 있다. 달은 예술가들이 발명한 영원을 상징하는 콘텐츠이다. '고사상월'은 무한한 자연과 유한하지만 고귀한 정신을 감각적인 색채와 청초한 선으로 형상화했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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