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40    업데이트: 24-04-08 14:11

매일신문

[이인숙의 옛 그림 예찬]성재휴(1915-1996), ‘송림촌(松林村)’
아트코리아 | 조회 157
미술사 연구자


종이에 채색, 45×54㎝, 개인 소장

붉은 소나무들이 춤추는 듯 가지를 뻗은 풍곡(豊谷) 성재휴의 '송림촌'은 그만의 개성적인 화풍이다. 짙고 옅은 묵운(墨韻)을 실은 분방한 운필의 윤곽선으로 풍경을 호쾌하게 잡아냈고 주황색, 푸른색, 붉은색 등 선명한 담채를 먹색과 대비시켰다. 색채는 나무나 집의 고유색이라기보다 화가가 주관적으로 부여한 색이다. 간결한 색면이라 색채가 더욱 활기차다.

하늘도, 여백도, 원근의 공간감도 없이 나무의 굴곡으로 화면을 꽉 채우며 중심을 이룬 대담한 평면적 구성이다. 나무 사이로 커다란 바위가 보이고 기와집과 초가집이 드문드문하다. 깊이감을 주는 것은 뒤쪽의 나무들이 좀 가늘고, 위쪽의 집이 조금 작은 것뿐이다.

먹색으로 극대화시킨 색채의 상쾌함과 풍경을 하나의 구성으로 파악한 디자인적 화면에 움직임과 다채로움을 주는 요소는 태점(苔點)이다. 나무의 요철과 입체감을 나타내기 위한 태점이 나무를 벗어나 화면을 날아다니며 대지로부터 올라온 생명력의 리듬을 온 화면에 퍼뜨린다. 산수화에서 점을 찍는 점법은 선의 활용법인 준법만큼이나 한 화가 고유의 회화적 개성을 드러낸다. '송림촌'의 점이 크고 네모나며, 검은 테두리를 지닌 푸른색인 것은 그의 회화가 지닌 대범함과 명랑성, 전통성과 장식성을 동시에 말해주는 것 같다.

성재휴는 경남 창녕읍에서 10리 쯤 떨어진 용석마을에서 태어났다. 20여 호 정도의 농가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농촌이었다. 글방을 다니다 보통학교를 마치고 19세 때인 1933년 자신의 앞날을 개척하려 혼자 가까운 대도시인 대구로 나왔다. 화가가 되려는 마음을 먹고 찾아간 곳이 당시 서예와 사군자로 이름을 떨치던 영남 제일의 서화가 석재 서병오의 교남시서화연구회였다. 야운(野雲)으로 호를 받고 서예, 사군자 등을 배웠다. 서병오가 타계하자 광주로 가서 의재 허백련의 문하에 들어가 3년간 남종산수화를 배우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진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청남 오제봉, 소정 변관식, 운전 허민, 효당 최범술 등과 어울렸다.

성재휴는 당대의 대가에게 배웠지만 스승의 화풍에 매이지 않았고 국전의 벽을 느끼고 출품을 외면했다. 두 가지 다 당시의 화가 지망생에겐 쉽지 않은 길이었다. 오랜 모색을 거쳐 그는 1950년대 후반 이후 사군자의 활달한 서예적 필치와 먹색에 색채를 접목하고, 남종산수에서 배운 풍경의 전형화를 명쾌한 생략과 현대적 감성으로 재해석해 자신만의 화풍을 완성했다. 서병오와 허백련이라는 두 스승의 사군자와 남종산수화를 잘 소화한 것이 그가 전통 속에서 탈전통을 이룬 바탕이다.

'송림촌'은 그의 마음속에 새겨진 고향마을이자 누구에게나 '나의 살던 고향'일 수 있는 이미지이다. 성재휴의 나이 70세 때 작품이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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