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40    업데이트: 24-04-08 14:11

매일신문

[이인숙의 옛 그림 예찬] 천경자(1924-2015), ‘모기장 안의 쫑쫑이’
아트코리아 | 조회 171
미술사 연구자


1959년, 종이에 채색, 개인 소장

천경자는 도쿄에 유학 중이던 1942년 18세 때 조선미술전람회에 '조부(祖父)'로 입선했고, 이듬해 '노부(老婦)'로 또 입선하며 일찍이 재능을 알렸다. '조부'는 천자문을 가르쳐주고 자신이 읽은 소설책을 이야기로 들려주며 어린 천경자의 감수성과 상상력을 북돋아 준 '하르바니'를 모델로 한 초상화식 인물화이고, '노부'는 외할머니가 담뱃대를 물고 '옥루몽'을 읽고 있는 좀 더 자연스러운 모습을 그렸다. 채색 인물화로 출발한 천경자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등 자신의 심장에 맞닿은 대상을 그리며 소재 선택이 관념적이거나 피상적이지 않았다.

천경자는 사생(寫生)한 스케치에 기반해 그림을 그렸고 자기 자신을 비롯해 주변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그것은 발상과 착수의 단계일 뿐이다. 인물이건, 풍경이건, 꽃이건 천경자 회화는 대상에 자신의 상념이 더해져 현실 너머의 어떤 전형성을 창조하는 특징이 있다. 1970년대 이후 완성된 천경자 고유의 화풍이다. 그 이전 작품에서는 자신의 주변이 직설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모기장 안의 쫑쫑이'는 스케치를 가감 없이 옮겼을 뿐 아니라 작가의 개인 서사가 그대로 드러난다. 쫑쫑이는 천경자의 수필에 나오는 막내아들의 애칭이다. 말똥말똥한 눈으로 누워있는 통통한 아기와 알록달록하게 색칠한 모기장이 정겹다. 엄마이자 화가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자부심을 느끼는 천경자의 자아가 드러난 그림이어서 더 눈길을 끈다. 천경자는 2남 2녀의 엄마였다.

살이 여섯 개인 커다란 우산 같기도 하고, 텐트 같기도 한 육각형 모기장 안에 누워 있는 아들인 모델은 엄마인 화가를 빤히 쳐다본다. 모기장 뒤로 키우던 검은 고양이도 보이고 부채도 그렸다. 배경은 꽃밭이다. 천경자는 1954년 같이 일해 보자는 김환기의 편지를 받고 광주에서 서울로 올라가 홍익대학교 교수가 되었으나 생활은 여전히 어려워 청파동, 사직동, 누상동으로 셋집을 전전했다. 그러다 누하동에 처음 내 집을 마련한다. 꽃밭은 이 집 마당인 것 같다. 봉숭아꽃이 보이고 맨드라미도, 노란 다알리아도 있다. 잠자리가 날아다니는 가운데 코스모스도 피어 아마 늦여름쯤인 듯하다.

이 작품을 그녀는 자신의 주요 전시에 여러 번 출품했다. 보는 재미가 있는 그림이기도 하지만 작가의 개인사를 궁금해 하는 관람객의 흥미를 충족시키는 작품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모기장 안의 쫑쫑이'는 한 작가의 고유한 작품세계가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되는 것이 아니며, 그곳으로 향하는 발자국들 또한 의미와 재미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천경자는 부모형제와 연인과 자녀와 함께 미운 정 고운 정의 현실을 살며 자신의 예술을 밀고 나갈 힘과 활력을 얻었다. 모기장이 여름나기의 필수품이던 1950년대 풍경이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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