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38    업데이트: 24-03-26 13:33

매일신문

[이인숙의 옛 그림 예찬]강세황(1713-1791), ‘벽오청서도(碧梧淸暑圖)’
아트코리아 | 조회 207
미술사 연구자


종이에 담채, 30.5×34.8㎝,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강세황은 강현의 3남6녀 중 막내인 아홉째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강현이 무려 64세에 얻은 막내아들이라 강세황은 학식이 풍부한 연로한 아버지의 자상한 교육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서화에 취미가 많았던 그는 "내가 그림과 글씨 이 두 가지에 대해서는 어릴 때부터 신경을 써서 상당히 깨달은 바가 있다"라고 자부했다.

강세황은 과거를 보지 않았다. 그의 집안이 속해있던 정파이자 학파인 소북(小北)이 당시 정계에서 퇴출된 상황인데다 맏형 강세윤이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귀양 간 것도 벼슬이란 바랄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였다. 관직에 나가지 않는다는 것은 조선시대 양반으로서는 사회적 존재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거의 마찬가지로 존재감이 상실되는 일이었다. 환갑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강세황은 시서화로 자적(自適)한 재야 지식인이었다.[close]화제에 "'벽오청서(碧梧淸暑) 방(仿) 심석전(沈石田) 첨재(忝齋)"라고 했다. 중국 화보(畵譜) '개자원화전'에 본(本)이 있는 명나라 문인화가 석전(石田) 심주의 그림을 재해석한 작품이다. 벽오동 그늘 아래 초가집 툇마루에 한 남자가 더위를 식히며 앉아 있고, 마당에는 빗자루를 든 동자가 있다. 두 그루 오동나무, 초가지붕 아래로 달아낸 차양, 방안의 책상, 집 뒤의 대숲과 우뚝한 파초, 문도 없이 출입구만 표시해 놓은 바자 울타리 등이 강세황의 문기 있는 필치와 맑은 담채로 시원하게 옮겨졌다. 그림을 좋아한데다 벼슬이 없으니 시간도 많고 눈치 볼 일도 없었던 그는 이렇게 그림그리기를 즐겼다.

'벽오청서도'는 첨재라는 호를 사용한 30대 후반 작품으로 여겨진다. '욕될 첨(忝)'자는 '시경'의 "숙흥야매(夙興夜寐) 무첨이소생(無忝爾所生)", 곧 "밤낮으로 부지런하여 너를 낳아주신 분에게 욕됨이 없게 하라"는 구절과 연관된다. 조상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겠다는 뜻을 담아 '무첨당(無忝堂)', '무첨재(無忝齋)'로 호를 지은 분도 있다.

과거를 포기했으므로 "후세에 이름을 떨쳐 부모의 이름을 빛내는" 효도의 마지막을 실천할 수 없었기에 첨재라는 호를 지었을 것 같다. '효경'에 "양명어후세(揚名於後世) 이현부모(以顯父母) 효지종야(孝之終也)"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려 장군 강민첨의 후손인 진주 강씨 은열공파 강세황 집안은 대단했다. 아버지 강현은 대제학, 예조판서, 한성부판윤을 지냈고, 할아버지 강백년은 이조참판, 예조판서를 지냈다. 부조(父祖)가 모두 기로소에 입소한 명문가였기에 자신의 대에 와서 관직이 끊어졌다는 자괴감이 더욱 컸을 것이다. 이때만 해도 강세황은 환갑 이후의 인생 반전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타원형 머리도장은 '일화일석(一花一石)'이다. 꽃 한 송이, 돌 하나에 정을 붙이며 궁당익견(窮當益堅)하게 강호의 삶을 살던 시절의 그림이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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