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42    업데이트: 24-04-23 14:09

매일신문

[이인숙의 옛 그림 예찬]숙종시대 화원, ‘팔준도첩’ 중 ‘유린청’
아트코리아 | 조회 200
미술사 연구자


1705년(숙종 31년), 비단에 수묵담채, 42.5×34.8㎝,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숙종시대 도화서 화원이 8마리 준마를 그린 '팔준도첩' 중 한 폭인 '유린청'이다. 신령스런 상상의 동물인 기린을 연상시키는 푸른 털빛의 말이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팔준마는 한글로 된 최초의 노래인 '용비어천가' 제70장에 나오는 태조 이성계의 애마다. 고려 말 무장 이성계는 공민왕을 도와 원나라 세력을 몰아냈고, 원이 명으로 교체되는 혼란기에 홍건적이 북쪽 국경을 침입하고 왜구들이 내륙까지 약탈할 때 남북을 오르내리며 외적을 물리친 구국의 영웅이었다. 팔준은 이성계와 함께 전장을 누빈 군마(軍馬)였다. 8마리의 이름은 횡운골(橫雲鶻), 유린청(遊麟靑), 추풍오(追風鳥), 발전자(發電赭), 용등자(龍騰紫), 응상백(凝霜白), 사자황(獅子黃), 현표(玄豹) 등이다.

세종시대에 태조의 팔준이 그림으로 그려진 적이 있었다. 세종은 안견에게 팔준도를 그리게 했고, 집현전 학자를 비롯한 문신들에게 이 그림과 관련된 문학 작품을 짓게 했다. 팔준도를 칭송한 박팽년, 성삼문, 신숙주, 서거정 등의 시(詩), 찬(贊), 송(頌), 부(賦), 행(行), 명(銘), 전(箋) 등이 문헌으로 전하지만 안견의 팔준도는 보존되지 못했다. 왕실의 사적을 정비하며 왕권 강화에 힘썼던 숙종에 의해 '팔준도'가 다시 그려져 태조의 기억을 되살리게 되었다. '유린청'에 써 넣은 글은 '대동야승'에 나오는 이 말 이야기이다.[close]청색(靑色) 산어함흥(産於咸興) 취오라(取兀刺) 전해주(戰海州) 첩운봉시어(捷雲峰時御) 응우중일전(膺右中一箭) 항좌중일전(項左中一箭) 우둔중일전(右臀中一箭) 마치육세시어(馬齒六世始御) 매당전진(每當戰陣) 어차마위다(御此馬爲多) 치삼십일이사(齒三十一而死) 국인애지(國人哀之) 비석조매지(備石槽埋之)

유린청의 산지는 함흥으로 이성계가 오라산성을 빼앗고, 해주에서 싸우고, 운봉에서 크게 이긴 황산대첩에서 탔던 말이다. 오른쪽 가슴, 왼쪽 목, 오른쪽 볼기 등에 세 번이나 화살을 맞았다. 유린청이 여섯 살 때부터 이성계가 전투에서 많이 탔는데 이 말이 31살에 죽자 나라사람들이 슬퍼했고 석조(石槽)를 마련해 묻어주었다고 했다.

그림으로 그려진 유린청의 모습은 이 명마를 탔던 태조의 존재와 그의 무공(武功), 조선 건국의 대업과 왕실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연상시킨다. 숙종은 그림과 글씨에 각별히 취미가 있는 왕이기도 했지만 예술품인 동시에 상징을 구축하는 강력한 수단인 시각물로서 회화의 효능감을 잘 활용한 세종의 통찰을 이어 받은 왕이었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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