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40    업데이트: 24-04-08 14:11

매일신문

[이인숙의 옛 그림 예찬]박생광(1904-1985) '토함산의 해돋이
아트코리아 | 조회 214
미술사 연구자





종이에 채색, 135×140㎝, 이영미술관 소장

1979년 76세 때 작품인 이 '토함산의 해돋이'는 박생광 위대한 만년의 출발점이 된다. 1980년께 이전 60여 년 동안에도 그는 훌륭했지만 70대 중반 신기루처럼 이루어낸 도약이 있었기에 그의 화가로서의 전 생애가 완성되었다. 그 도약은 박생광이 단청과 탱화, 민화와 무속화라는 불교미술과 민간미술의 채색화 전통을 자기화함으로서 비롯되었고, 우리나라의 역사와 전통에서 찾아낸 모티브를 통해 구성되었으며, 그가 평생 지녀온 우리답고 나다운 미술을 창작하려는 조용한 열망이 있었기에 완성될 수 있었다.

박생광이 자신의 대표작들을 그리던 1980~1985년에도 채색화가의 자리는 좁았다. 감상화로서 채색화의 자리가 넓지 않았던 것은 조선시대부터였고 20세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진채화(眞彩畵)는 궁궐과 관청의 장엄, 종교적 예배, 민간의 치장 등 비주류 생활 미술에 속했다. 박생광은 궁화, 불화, 무속화, 민화 등의 색채를 흡수했고 건축의 한 부분으로 이어져온 단청을 활용했다. 원색의 진채를 보통사람들이 가장 많이 볼 수 있던 곳은 절이었다.[close]궁궐이나 사찰, 민간에서 그려진 작가를 알 수 없는 대부분의 채색화는 수준의 높낮이를 떠나 화가 개인의 창조력을 우선적 가치로 하는 감상화와 다르다. 공동체의 관습에 의지해 전승되는 사회적 미술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채색화는 한 사회의 집단적 감수성이 다수의 미술 종사자들에 의해 누적적으로 축적된 결과물이다. 박생광이 전국의 절집을 다니며 스케치한 것은 바로 이런 역사성을 가진 색채였다. 그는 실제로 건축 도료인 단청을 활용해 그림을 그렸다. 단청 안료를 쓰기 시작한 것은 1977년 무렵 부터지만 훨씬 전부터 단청을 좋아했고 일반 채색은 옅어서 재미가 없다며 진채를 좋아했다고 했다.

'토함산의 해돋이'는 상단에 오색의 서기(瑞氣)를 배경으로 붉은 해를 내려다보는 석굴암 본존불을 옆모습으로 그리고 뒤쪽에 보현보살을 그렸다. 하단에는 토함산 산줄기를 배경으로 금강역사, 새끼를 어르고 있는 어미 표범, 얽혀 있는 한 쌍의 봉황 등을 그렸다. 주홍색 윤곽선의 평판적인 이미지들을 휘날리는 붉은 연꽃잎, 구불구불한 윤곽선의 구름, 두 개의 동그라미가 맞물리는 모양으로 문양화 된 나비 등을 연결시키고 있다. 색 자체의 생동감이 서로 충돌하는 가운데 금강역사의 광배와 화면 여러 곳에 눈부신 흰색을 사용했다. 미술사학자 김원용(1922-1993)은 박생광의 '섬뜩하게까지 보이는 백색의 액센트'가 주는 시각 효과를 언급한 바 있다. 박생광은 채색화의 하이라이트를 화이트로 완성한 것이다.

해돋이는 사실 어불성설이고 지구의 자전으로 매일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지만 그 광경을 내 눈으로 볼 때의 장엄함과 찬란함은 과학적 상식과 무관하다. 도약을 꿈꿀 한 해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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