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9    업데이트: 21-10-01 08:43

언론 평론 글

2007 이혜인 평론 <김태곤>
이혜인 | 조회 919

 

한국 자수 문양의 재해석

 

 

이혜경의 작품 속에는 마치 비단실로 한 땀 한 땀 자수를 놓은 듯 경이로운 세계가 담겨있다. 내가 그의 작업실을 처음 방문하였을 때 제일 먼저 내뱉은 말이 “종이에도 자수가 됩니까?”라는 질문일 만큼 사실적 묘사에서 느끼는 감흥은 절대적이었다. 요즘 미술계에 유행처럼 펼쳐지고 있는 극사실적인 요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었기에 그만의 미학적 사고가 내심 궁금했다. 자수(刺繡)라는 소재를 굳이 그림 속에 담으려 한 의도가 궁금했기에 내뱉은 질문에 소박하게 답하는 작가의 답변은 의외로 순수했다.

 

“늘 즐기며 가까이 했던 자수를 회화적으로 표현함으로서, 자수에서 맛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접하고 표현할 수 있어 늘 감사하고 행복하다.”는 말은 그의 진솔한 작품세계를 되돌아 보기에 충분했다.

 

사실 찬찬한 솜씨와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자수는 우리 규방예술의 대표적인 장르중 하나이다. 우리나라에서 자수란 조선시대 서화(書畫)와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미학적 정신에서 보면 서화와 일맥상통하는 예술 양식을 지니고 있다. 표현 매체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 그림 속에 담겨져 있는 미학적 요소와 회화 이론이 자수 작품 속에도 담겨 있음은 현존하는 조선후기 자수 작품들을 통해서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동양화론의 전신론(傳神論)과 사실론(寫實論)이 회화의 기초적 정신이라면, 자수 작품 역시 그러한 범주 안에서 예술적 견지를 함께하며 표현되어 있고, 서양미학의 모방(模倣)과 재현(再俔)의 문제와도 서로 상통(相通)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전통적 예술논리를 자수라는 한국적 문양을 통해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표현하는 이혜경의 작품에는 ‘동서의 철학’이 깊이 자리하고 있다. 서양에서의 재현적 모방에서 표현되어지는 ‘무엇을 그릴 것인가.’라는 문제 보다는 동양에서 오는 전통적인 개념의 ‘어떻게 그리느냐.’라는 고민과 과제를 작품 속에 담고 있음은 그가 즐겨 쓰는 소재에서 비롯된 것이다.

 

화면 속에 조각보의 배치나 꽃문양의 조합들이 형식적인 구성을 뛰어 넘어 조형적 조화로 새롭게 탄생되고, 생명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조그마한 알들의 불균형적이고 리드미컬한 대칭들이 새로운 생명의 원리로 표출되고 있다. 이는 다분히 서양 미학의 관점보다는 동양적 화면구성에서 얻을 수 있는 기운생동(氣運生動)적 요소들을 담고 있다. 카시러(E.Cassirer)가 예술은 상징적 언어(symbolic languae)라고 말했듯이, “예술은 사물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實在)를 발견해 내는 것”이라는 주장은 그의 그림 속에서 설득력을 얻기에 충분하다. 즉 예술은 “살아 있는 형상”이라는 카시러의 주장처럼 사실감이 주는 완벽한 표출(表出)보다는 예술가의 눈과 손, 그리고 상상력에서 완성되어지는 결과물이 보다 큰 감동을 전해 줄 수 있음을 다시금 느끼게 해 준다. 자유의식의 원칙 속에 강인하면서, 유희적인 그의 연작(蓮作)들은 고전적 비평을 빌리지 않더라도 현대 미학적 사고(思考)에서도 신선함을 더해주기 충분하다.

 

 

김태곤 <대백프라자갤러리큐레이터>

덧글 0 개
덧글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