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    업데이트: 15-06-18 11:38

평론

한 점 거리낌 없이 하늘을 우러러 보다 -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아트코리아 | 조회 1,274

김윤종의 하늘보기

한 점 거리낌 없이 하늘을 우러러 보다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김윤종은 자연을 그리고 하늘을 그리고 구름을 그린다. 이 일련의 그림들을 통해서 작가는 자연에 대한 경이와 신비를 표현하고자 했다고 한다. 아마도 시종 작가의 그림을 관통하는 지배적인 주제의식일 것이다. 자연에 대한 경이와 신비는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말해준다. 인간에 대한 자연의 입장이 아닌,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말해준다. 자연은 도대체 입장과 태도의 주체일 수가 없다. 자연이란 말을 풀어보면 스스로 그렇고 원래 그런 존재이다. 스스로 그렇고 원래 그런 존재는 인간이 인식하는 영역 밖에 속해져 있어서 입장과 태도로부터 초월해 있다. 입장과 태도는 자연을 대하고 세계와 대면하는 인간의 몫이다. 인간은 인식하고 개념화하는 한에서만 자연을 대하고 세계와 대면할 수가 있다. 인식하고 개념화하는 프리즘이 없다면 자연도 없고 세계도 없다. 학습된 것들, 말하자면 관습과 관성과 선입견의 지평이 없다면 자연도 없고 세계도 없다. 다만 절대적인 무질서와 혼돈이 있을 뿐이며, 생판 처음 보는 낯설음과 생경함이 있을 뿐이다. 바로 자연의 본성이며 자연의 원형에 맞닥트리는 것이다.

인식의 밑바닥에서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의식의 영도지점에서 새로이 시작하기 위해서 잠정적으로 인식된 것들, 인식으로 프로그램된 것들을 봉하는 현상학적 에포케의 기획과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예술의 기획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쩌면 예술은 세계 자체와 대면하고 자연 자체에 직면하는 프로젝트일지도 모른다. 학습된 지평을 걷어내고 보면 자연 자체가 보인다. 하늘 자체가 보이고 원초적인 하늘이 보인다. 그렇게 낯설고 생경한 하늘이 경이로움과 신비감을 자아낼 것이다. 이따금씩 수인이 창살에 내려앉은 먼지가 키워낸 이름 모를 풀을 보고 우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풀에서 생명을 봤고 그 경이로움에 압도당한 것이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그저 보는 것이 아니다. 발견한다는 것이다. 그저 보는 것이 아닌, 발견할 때 풀은 비로소 생명으로 와 닿고 경이로움에 압도당할 수가 있게 된다. 바로, 사건이다. 발견에 뒤따른 경이로운 사건이며 주체의 내장을 휘젓고 뒤집어 놓는 일이다. 그래서 작가는 하늘보기를 주제로서 제안한다. 아마도 학습된 하늘이 아닌, 인식되고 개념화된 하늘이 아닌, 관성적인 하늘이 아닌, 안 봐도 비디오인 하늘이 아닌 하늘 자체를 보고 싶고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이며 기획일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그 일은 가능한가. 현대인에게 자연은 여전히 경이로운 대상이며 신비감을 자아내는가. 문명화된 현대인에게 자연은 겨우 풍문으로나 남아있는, 전설처럼 아득한 이야기일 수 있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현대인에게 자연은 없다. 그들에게 어떻게 자연을 돌려주고 하늘을 돌려주고 구름을 되돌려줄 것인가. 하늘을 보라는 작가의 주문은 아마도 이처럼 잃어버린 자연이며 상실된 하늘 그리고 부재하는 구름을 다시금 존재의 층위로 현존시키는 프로젝트일 것이다. 그림의 외양으로 드러난 겉보기가 아닌, 그림의 겉보기가 불러일으킨 내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네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흔히 자연을 고향에다가 비유한다. 존재는 다름 아닌 자연에서 비롯했고 자연에서 왔다는 말이다. 흙에서 왔고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과도 같다. 그러므로 자연을 상실했다는 말은 고향을 상실했다는 말과도 같다. 다시, 그러므로 하늘을 보라는 작가의 주문은 이처럼 상실된 자연을 되돌려주고 고향을 되돌려주는 기획일 수 있겠다. 여기서 고향은 당연히 지정학적 장소와는 상관이 없는, 저마다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상실감의 대상이며 사건일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을 보라는 작가의 주문은 사실은 하늘을 보도록 저마다에게 걸어오는, 작가의 주술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 주술에 홀리고 말고는 저마다의 몫으로 주어진다. 그렇게 하늘이 보이는가. 어떤 하늘이 보이는가. 하늘은 어떻게 열리고 오는가.

 다시, 작가는 자연을 그리고 하늘을 그리고 구름을 그린다. 대부분의 그림에서 땅이 차지하는 비율은 얼마 되지 않은데 비해, 화면의 대부분을 하늘이 차지하고 구름으로 채워진다. 그림에서 땅이 차지하는 얼마 되지 않은 비율은 그러나 중요하고 결정적이기 조차한데, 하늘을 강조하고 구름을 두드러져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땅이 없이 화면이 온통 하늘이며 구름으로 채워진 그림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 하늘의 존재감이며 구름의 스케일은 제대로 혹은 결코 전달되지가 않는다. 존재감이며 스케일은 비교를 통해서 비로소 드러나 보이며 강조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이처럼 상대적이다. 상대가 없다면 절대도 없다. 마찬가지로 모든 존재는 관계적이다. 땅이 없으면 하늘도 없고 타자가 없으면 주체도 없다. 하늘은 땅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하늘이 될 수가 있었고, 나를 정의해주는 타자가 있었기에 나는 비로소 존재로서 설 수가 있게 된다. 흔히 알려진 바와는 다르게 추상이란 형식논리의 결과물이 아니다. 추상이란 바로 이렇듯 사물과 존재를 관계 밖에 내놓을 때 생기는 일이다. 사물과 존재를 미아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작가는 이처럼 땅과의 비교를 통해서 하늘을 부각하고 구름을 부각한다. 하늘의 하늘다움을, 구름의 구름다움을 오롯이 드러나게 한 것인데, 시점으로 치자면 앙각법에 의해서 가능한 일이다. 알다시피 앙각법은 올려다보는 시점이다. 거꾸로 대상의 입장에선 굽어보는 시점이 설정되는 탓에 이데올로기적이고 제도적인 시점으로 분류되기도 한다(이를테면 동상이나 기념비를 재현하는 방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기서 작가는 하늘의 위용과 구름의 스케일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그럼으로써 자연에 대한 경이로움과 신비감을 회복하기 위해서 이런 앙각법을 도입하고 있는 점이 다르다. 여기서 좀 더 섬세한 관찰과 이해가 필요한데, 하늘의 위용도 구름의 스케일도 마냥 올려다본다고 해서 붙잡히지도 전달되지도 않는다. 땅바닥에 벌렁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관계의 망으로부터 단절된(어쩌면 나 자신으로부터도 단절된, 내가 서 있고 내가 속해져 있다는 실감과는 거리가 먼) 추상적인 하늘이 시야를 채우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자연의 자연다움이 오롯이 드러나 보이게 하기 위해선 마냥 올려다보는 대신, 멀리서 보면서 올려다보아야 한다. 멀리서 본다는 것, 바로 거리감의 문제이다. 그리고 올려다본다는 것은 우러러 본다는 것이다. 바로 태도의 문제이다. 자연을 신성한 존재로서 경험하고 싶다면, 자연의 경이로움과 신비감을 손에 쥐고 전달하고 싶다면 바로 이처럼 멀리서 보고 우러러 보아야 한다. 그렇게 볼 때에야 비로소 자연의 영성이 내 영성과 교감하고, 내 영성의 일부로서 자연이 자기의 영성을 내어줄 수가 있게 된다. 자연의 경이로움과 신비감을 표현하고 싶다는 말은 결국 자연의 영성을 표현하고 싶다는 말이며, 자연의 영성에 내 영성을 합치(혹은 합체)하고 싶다는 말이 아닌가.

 그렇게 멀리서 보고 우러러 보면 무엇이 보이는가. 하늘이 보이고 구름이 보인다. 여기서 하늘은 캔버스가 되고 구름은 그림이 된다. 구름은 하늘을 화면 삼아 그림을 그리는데, 그림이 변화무쌍하고 천태만상이며 천변만화한다. 우뚝한 산을 그리고 견고한 성채를 그리고 새털처럼 부드러운 솜털을 그리고 우르르 몰려가는 양떼를 그린다. 그렇게 그림을 그리다가도 불현듯 흩어버리고 다른 그림을 그린다. 얼마나 빨리 다른 그림으로 옮겨 가는지, 구름이 그림을 그리는 꼴을 쳐다보고 있으면 하나도 지루하지가 않다. 바로, 이행이다. 구름이 그려 보이는 형태는 항상적으로 잠정적일 뿐 결정적이지가 않다. 작가의 그림에서 구름은 비록 붙박이로 고정된 것이지만, 사실은 그 이면에 이처럼 항상적으로 변하는 이행의 과정이며 계기를 숨겨놓고 있다. 바로, 암시에 의해서 가능한 일이다. 그림은 어쩌면 이런 암시를 조성하고 조장하는 문제이며, 이로써 가시적인 것으로써 비가시적인 것을 추상해내는 기술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구름은 어디로 옮겨가고 데려가는가. 바로 세상의 끝이다. 작가의 그림 속엔 그렇게 세상의 끝이 예시돼 있다. 구름이 끝나는 곳이 그렇고, 하늘과 땅 아니면 이따금씩 하늘과 바다가 맞닿는 곳이다. 그곳은 있으면서 없는 곳이다. 있지만 없는 곳처럼 여겨지는 곳이고, 그런 탓에 경이로움과 신비감을 자아내는 곳이다. 바로, 경계다. 그렇게 나는 세상 안쪽과 세상 바깥쪽이 하나로 만나지는 접점 위에 서 있다. 내가 속해져 있는 세상과 내가 바라보는 세계의 경계 위에 서 있다. 그 접점이며 경계 위에 서서 나는 어쩌면 세상의 끝에 연장돼 있을지도 모를 하늘을 우러러 보고, 모든 견고한 것들이며 결정적인 것들을 흩어버리는 구름을 올려다본다. 화면을 수직으로 깊이 파고들 때 보이는 곳이며, 화면을 따라 옆으로 마냥 흐를 때 손에 잡히는 것들이다.

너는 세상의 끝에 서 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세상의 끝에서 비로소 드러나 보이는 것들을 멀리 내다보고 올려다보고 우러러본 적이 있는가. 본다는 것은 보는 것이 아닌, 발견의 문제라고 했다. 그렇게 너는 자연에서, 하늘에서, 구름에서 뭘 발견했는지, 작가의 그림은 묻고 있는 것 같다. 자연을 그리고 하늘을 그리고 구름을 그린 작가의 그림은 이처럼 세상의 끝에 서게 만들고, 세상의 끝에서야 비로소 물어질 수 있는 물음에로 초대하는 것 같다. 경이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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