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    업데이트: 18-05-11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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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 부재에의 시선-권정호의 생애와 예술_김복영 (미술평론가)
아트코리아 | 조회 313

소멸, 부재에의 시선 — 권정호의 생애와 예술

김복영
미술평론가



이번 수성아트피아 기획 권정호 초대전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 가운데는 그가 지역문화 창달을 앞당기려 분투했던 숱한 노고와 당시 불모지와 다름없는 대구의 현대미술을 일으키고자 후진 양성에 혼신을 다했던 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은, 그러나 그의 사회적 이면을 뒤로하고 그간 그가 자신의 예술생애를 가꾸는 데 쏟았던 열정과 업적을 회고하려는 데 뜻이 있다.
 
그는 대구 칠곡에서 태어나(1944) 계명대(1972)와 동대학원(1982) 그리고 뉴욕 프랫대학원(1986)을 거치는 동안, 한국의 근대미술과 서구 모더니즘을 접목시키는 한편, 이 위에서 그 자신의 예술세계가 딛고설 위치를 확인하는 데 집념을 쏟았다. 그간 그의 개인전은 프랫의 「히긴스 홀」과 같은 해 뉴욕의 「갤러리 코리아」(1985)를 시발로, 도쿄(1986), 상하이(2003~2005), 서울(1987~ ), 대구 1987~ )에 이르는 순회의 족적을 밟아 왔다.
 
그간의 업적을 단행본으로 출간한 도록(2005)은 1970년대의 후반에서 1980년대 전반, 1980년대 후반, 1990년대 전반, 1990년대 후반, 그리고 2천 년대에 이르는 5개의 시기로 구분해서 묶었다. 이 글은 편의상 전기(1970s~1980s), 중간기(1980s~1990s), 후기(1990s~2000s)로 나누어 그가 자신의 작품세계를 일구어온 경로를 일별하고, 이어지는 수순에 대해 심층 고찰 할 것이다.
 
1
 
그의 전기는 <<원초, 1977>>에서처럼, 근원적인 요소인 얼룩진 점(點, speckled dot)에 의미를 부여하다가, <<세개의 해골, 1985>>에서 사람의 두개골을 등장시켰고, <<소리, 1984>>에서 스피커라는 음성기기를 결부시켜 점차 점들을 선으로 발전시키거나 색상대비와 명도대비를 강열화하는 데 이르렀다.
 
이 시기의 압권인 <<어느 날 밤, 1987>>이 시사하는 것처럼, 어둠과 밝음을 대척관계로 보는 <신표현>의 경향을 드러낸 것도 전기의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다. 아주 빈번히 등장시킨 주제는 <<세개의 해골, 1985>>에서 보는 것처럼 인간의 두개골이었다. 이후 거의 같은 주제에 집착해서 흑과 백, 빨강과 암청을 곁들인 화면을 전개함으로써 일찍이 멜랑콜릭한 분위기를 정착시켰다. 방금 예시한 작품에서처럼, 패인 유골의 눈과 치아를 분리시켜 <<어느 날 밤, 1987>>에서와 같이 드로잉체의 빨강⋅노랑⋅파랑⋅검정의 강열한 대비와 선드로잉의 색 면 양식을 연이어 선보였다.
 
이에 비해, 중간기는 전기와의 연결선에서 해골 군(群)을 주제로 혼합재료로 제작한 입체와 대형 설치작품에 주력하는 한편, 이와 연장선상에서 선 드로잉 양식을 확장시켰다. 설치양식과 평면 작품에서는 <<현대인, 1997>>, <<무제, 1996>>에서 보듯이 같은 점멸(點滅)하는 흰색⋅노랑⋅빨강⋅검정의 아크릴릭 선을 부각시켜 현대인들의 상실의 의식을 대변하는 한편, 소멸(消滅)과 부재(不在)의 시선을 전면에 드러냈다.
 
그가 그 자신의 <신표현적> 경향을 확실히 정착시킨 건 이 때였다. 그에게서 두개골이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면서 검정 배경과 붉은 전경, 푸른 빛 아니면 그레이톤의 멜랑콜릭한 분위기를 클로즈업시킨 것은 이 일환이었다. 여기서 그는 <<해골들, 1994>>처럼, 무채색모노크롬을 보이는 경우는 물론, 같은 명제의 <<해골들, 1992>>처럼, 선 드로잉과 빨강⋅노랑⋅검정 등 강열한 대비를 동반한 신표현의 두 경향을 차별적으로 등장시켰다. 해골 군을 구상면과 비구상면으로 나누어 등장시킴으로써 표현의 외연을 넓혔다고 할 수 있다.
 
그의 후기는 흑과 백의 모노크롬을 중심으로 보다 간소해진 선 드로잉 양식의 정수를 보여준다. <<미국교육, 2000>>에서와 같이, 임의의 방향으로 정연하게 그어진 유사한 유형의 필세들이 방향타를 바꿀 때마다 병열과 중첩의 세(勢)를 달리함으로써 궤적의 아름다움을 창출한 게 특징이다. <<화몽, 2002>>이 시사하듯이, 갈필로 그었을 때와 고밀도의 필세들이 미끄러져 어우러졌을 때 드러나는 대비와 율동이 주요소로 등장하였다. 이미 중간기의 말엽에 모습을 드러낸 <<선으로부터, 1998>>와 <<추상도형 이미지, 1997>>는 후기에 이르러 ‘선’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전향함으로써, 전기에 보였던 표현적인 선에 대한 관심이 후기를 맞아 복원되는 실마리를 제공했다. 그럼으로써, 중간기의 두개골의 이미지를 선 드로잉의 배후에 은폐시켜 표면에는 드러나지 않는, 심층과 표면의 이중구조를 중심으로 하는 선 드로잉 양식을 전면에 부각시켰다.
 
이번 초대전에 출품하는 근작들은 1990년대 말 이후의 후기 경향을 한 층 강화시킨 작품들이다. 예컨대, <<산수풍경, 1998~2000>>, <<우산과 꽃, 2000~2002>>, <<모든 것은 하나, 2001>>, <<소녀와 개, 2002>>, <<정물, 2005>>같은 후기의 작품들은 이번 초대전에 선보이는 작품들의 원조 격이다. 이 작품들은 선 드로잉에다 인간⋅말⋅고층빌딩⋅개⋅우산⋅꽃⋅부처⋅그릇⋅비둘기⋅추모사진⋅군중⋅불상⋅제단⋅스님⋅동대구역⋅촛불 같은 수다한 이미지를 내재시켜 사물들의 형상을 점멸선(點滅線)을 주요소로 해체하는 경향을 드러낸다. 여기에다 해골군은 입체와 설치양식을 빌려 중단 없이 곁들여진다.
 
이러한 몇 가지는 시기 별로 본 현상들이지만, 그의 생애를 관류하고 있는 점멸점과 선, 그리고 이것들의 배후를 터 잡고 있는 두개골, 스피커 그리고 해체되어 배후에서 표면으로 실마리를 드러내는 수다한 이미지 품목들이 무엇을 함의하는지는 이어지는 절에서 언급할 것이다.
 
이 절의 말미에 이 글의 키워드를 언급했으면 한다. 이른 바 두개골로 상징되는 ‘죽음’ 내지는 ‘소멸’의 시선이 그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죽음과 소멸이란 사실 ‘부재’(不在, absence)를 일컫는 또 다른 이름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것들을 이 글의 전면에 부각시켰지만, 그의 예술 생애는 정확히 말해, 부재의 시선을 통해서 본 소멸(消滅, dissolution), 다시 말해서 부재의 사물들에 붙이는 ‘부’(賦, ode)의 형식이라고 잘라 말할 수 있다. 이 글의 표제로 삼은 ‘소멸, 또는 부재에의 시선’(eyes upon a dissolution or absence)은 그래서 그의 예술과 생애를 정의해줄 용어임에 틀림없다. 아래서는 이 용어들에 의해, 그의 심층을 살핀 후, 우회해서 그의 기표(記表)와 기의(記義)를 재기술하는 수순을 밟을 것이다.
 
2
 
그의 심층을 말하기에 앞서,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이 수순이 왜 필요한지를 유념해주었으면 한다. 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약간의 멘트를 붙이자면, 사람들의 일상 시각이란 흔히 존재하는 것들에 관심을 갖는다는 걸 잠시 생각해 보는 걸로 족할 것이다. 일상인들은 죽었거나, 소멸했거나, 존재하지 않는, 이른 바 부재의 것들은 단지 추억의 품목으로 간주하거나 예외적인 걸로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의 눈에는 부재에의 시선이란 정상이 아니기에 흔히 기각된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부재에 주목하거나 집착한다는 건 상궤가 아니라는 거다. 그래서 일상인이 부재를 응시한다는 건 예컨대, 갑자기 떠난 고인의 추모식에 참석했을 때 처럼, 꼭 그래야만 할 충분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작가가 부재에 주목하는 건 전적으로 이와 궤를 달리한다. 충분한 이유가 없어도 그 자신의 미확인 이유에 끊임없이 견인된다. 그에게는 오히려 이게 정상이다. 그의 작품들이 의미를 생성해낼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비평의 시선은 이러한 미확인 이유를 그들의 작품에서 해명해냄으로써, 그의 작품들이 어떠한 경로를 밟아 그러한 미확인 절차를 밟게 되었는지를 말해야 한다. 부재에 대한 시선은 예컨대 1926년 시인 한용운이 기울어가던 국운을 탄식해 읊었던 <<님의 침묵>>을 상기시키는 데가 있다. 이를테면 ‘님은 갔습니다. /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 차디찬 티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 운명의 지침(指針)을 되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러졌습니다. /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얏습니다. /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에 등장하는 부재의 정한(情恨)이 그것이다. 다수의 시학자들은 한용운의 부재에의 시선에서 가버린 ‘님’은 시인 자신만이 아니라 한 시대의 나라 운명이 초래한 총체적인 상황이 작용했음을 지적한다.
 
권정호의 부재에의 시선은 이와는 전적으로 다를 것이다. 그 자신의 개인사부터가 다른데다 그가 살아온 ‘근대기’라는 총체적인 인간적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앞 절에서 살핀 그의 생애의 작품들이 이를 말해준다. 권정호의 부재를 말하기 위해서는 그가 살아온 개인사와 사회사를 연관시켜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그의 전기의 평면작품은 물론, 중간기의 설치물, 나아가서는 후기의 영상작품에까지 계속해서 등장하는 점멸하는 점과 선들의 기호로 요약되지만, 이것들 모두는 그 자신의 개인사와 사회사를 동반하고 있음을 보인다.
 
개인사를 말하기 전에 사회사를 먼저 언급한다. 그의 생애와 관련을 갖는 사회사적 사건들로는 제 3공화국에서 제 5공화국에 이르는 군부통치, 1980년 광주사태, 산업사회화와 물질사회화, 정신적 가치의 절하와 도덕적 해이, 1990년대 물질적 향락의 만연과 대구 지하철 참사 같은 대형 사건들을 우선 곱을 수 있다. 그의 평면작품과 영상작품의 상징체로 등장하고 있는 점멸하는 점들과 얼룩들은 단순한 기하학적 단위체라기보다는 이러한 제반 사건들에서 연유한 실존적인 절망, 이를테면 인간이란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함의한다. 인간성을 상실한 인간이란 한 낱 점멸체(點滅体, glimmering particles)의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절절히 시사한다.
 
점멸체의 대극점에 자리하는 건 그가 전기부터 줄곧 등장시켜온 인간의 두개골이다. 점멸체가 너무도 가벼운 인간 존재를 시사하는 미소(微小) 단위라면, 두개골은 이와 대척관계의 죽음과 공포의 ‘트라우마’(trauma, 外傷)를 내재한 섬찟한 기의를 시사한다. 그가 이처럼 무겁고 섬찟한 기의를 택한 건 전적으로 그 자신의 개인사의 산물이다. 그에 의하면, 그가 중고교 시절 선친이 경영하던 병원은 교통사고로 항상 피와 주검, 생과 사(死)를 오가는 사람들로 넘쳤다고 한다. 가업을 이으려 의대를 지망했던 형이 안방에 가져다 놓은 두개골은 작가가 어린시절 감내하기 어려운 공포의 사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린 시절의 지울수 없는, 그래서 그의 삶의 전 맥락을 관류할 트라우마가 여기서 유래했다. 실존의 너머를 응시하는 동기가 여기서 시작되었을 게 틀림없다.
 
현상 너머의 세계, 요컨대 부재의 세계를 응시하는 시선이 일찍이 그의 마음에 자리하게 된 게 이것이다. 소멸의 상징인 점멸점이 이와 대척점에 자리한 것도 이와 연장선 상에서였다. 스피커와 디스크, 그 밖의 많은 이미지 소재들은 부재의 세계와 현존의 세계를 잇는 미디어로서 이것들을 빌려 부재의 세계를 발하려 했던 게 틀림없다.
 
그가 어린시절 부재의 세계를 시사하는 사진과 영상물에 접했던 것도 부재의 시선을 증가시킨 요인이었다. 이 시절에 그가 본 이미지들과 영상들은 인간이 어떻게 인간이기를 거부할 수 있는 지를 그의 의식에 각인하기에 충분했다. 그가 1990년대 월남전의 잔혹상의 대명사격인 ‘킬링필드’의 잔혹상을 고발하기 위해 아프리카의 토우나 유사한 사건을 다룬 만화에 주목한 게 이를 말해준다. 인간의 잔혹사에 대한 그의 트라우마적 대응이 그의 의식에 하나의 기전(機轉, mechanism)으로 자리잡히는 데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그의 부재에의 시선에서 드러나는 트라우마는 그의 눈을 일상과는 다른 특정 사물을 빌려 부재의 세계로 견인하는 동기가 되었다. 그가 사물을 부재의 시선으로 보는 건 어느덧 그의 사유와 의식 안에 특정한 ‘커텍시스’(牽斥力, cathexis)의 성향(프로이트)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앞서 예시한 작품들 말고도, <<모든 것은 하나, 2001>>, <<선으로부터, 1998>>가 이를 시사한다.
 
그의 부재의 시선에는 일상의 사물들이란 ‘일체가 하나’(Everything is one)라는 인식이 자리한다. 장 뒤뷔페(Jean Dubuffet)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세대로서 현장에서 참상을 목격한 게 트라우마로 작동한 것이 그 예다. 이 때문에 뒤뷔페가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지만, 뒤뷔페의 경우, 그의 부재의 시선 역시 사람들을 보면서 ‘한낱 석탄의 검정 부스러기에 진배없다는 것’, 만물이란 모두 이처럼 산산 조각난 파편에 다름 아니라는 ‘전일’(全一, everything as one)의 시선이 그의 예술세계를 지배했던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권정호의 트라우마는 그가 비록 전후(戰後)세대이긴 하지만, 그 특유의 개인사와 사회사가 후발적으로 작동함으로써, 일찍이 전쟁세대가 겪었던 것과 유사한 트라우마를 무의식에 내재했다. 전후세대에 속하는 안제름 키퍼(A. Kiefer)가 역시 그러했던 것처럼, 권정호의 점멸하는 점과 선, 색채 모두가 여기서 연유했던 걸 이해해야 한다. 1980년대 뉴욕 유학시절에 있었던 신표현주의의 발흥은 일찍이 그에게 하나의 예감을 불어 넣기에 충분했다. 뒤뷔폐와 안젤름 키퍼가 걸었던 방향과 유사하게 권정호 또한 두개골과 같은, 특정 사물에 대해 그 특유의 커텍시스가 작동했다. 그가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이점을 실토하고 언급했던 건 단순히 이들의 영향의 수용 정도를 넘어 그 자신의 운명이었다고 하는 게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한 작가의 시대와 사회사, 나아가서는 그의 생애를 통해서 드러나는 상징들, 특히 그가 일구어낸 작품의 기표들을 이해하는 데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우선 주목할 건 그의 작품에 일관되게 등장하는 트라우마의 기표들이다.
 
전기에서 중간기를 거치면서 줄곧 등장시켰던 점멸하는 점과 선들의 기표들을 이와 관련 아래서 다시 주목해야 한다. <<원초, 1977>>, <<선으로부터, 1998>>, <<선과 해골, 1996>>, <<소리, 1998>>에 이르는 두개골과 소리, 기타 형상들이 점이나 선들의 기표(記表)와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를 기의 면에서 해명해야 한다. 이와 연장선에서 그의 후기와 근작들에 주목해야 한다는 건 말할 것도 없다.
 
기표의 경우를 먼저 언급한다. 권정호의 기표들이 본질적으로 점과 선의 간단없는 해체와 절단을 특징으로 한다고 여러번 말하였다. 점을 찍고 이으면서 점과 선을 계속해서 생성하는 건, 다시 말하자면 소멸과 부재의 시선이자 그 소산이다. 그에게서 소멸과 부재는 곧 점멸하는 점과 선이라는 아주 작은 것들과 동의어로 이해된다.
 
흔히 오해하듯이, 그의 시선은 본질적 환원(本質的 還元, essential reduction)에 기반하지 않는다. 그의 부재에의 시선은 ‘환원적’(reductive)이라기보다는 외적인 사물들에 대해 판단을 보류하는(훗설) 수준의 것이다. 왜 그가 보이는 사물들에 대한 판단을 보류했을까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누차 언급햇듯이, 이는 ‘트라우마적 사유’(traumatic thought)의 외표(프로이트, 라캉)에 지나지 않는다. 일단 사물들이 트라우마적 시선의 세례를 받으면, 그것들이 외적 지각의 모습을 잃게 된다는 게 정설이다. ‘스키조이드’(分裂,schizoid)의 충동이 필연적으로 기표들을 해체하는 데 관여하기 때문이다.
 
기표들의 해체는 사물의 외관을 다루는 데 있어 하나의 체계적인 조작(systematic operation)을 동반한다. 이러한 사실은 르네 마그리트(Renē Magritte)나 호앙 미로(Joan Miro)에서 처럼, 권정호의 작품세계를 말하는 데 있어서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권정호의 스키조이드 충동은 점과 선을 기하학적 윤곽이나 궤적으로 존치하는 걸 거부하고 이것들을 문자 그대로 혼연한 카오스로 치환한다.
 
그의 ‘점멸주의’(點滅主義, glimmerism)가 여기서 유래했다. 간단없이 끊고 잇는 방식은 하나의 단위체를 끊임없이 변형함으로써 틀에 박힌 반복을 불허하는, 이른 바 단속성(斷續性, intermittence)의 표현이다. 그러나, 화면 전체에서 보아 여전히 전경과 후경의 경계, 나아가서는 명과 암의 이항대립, 벡터들의 비교적 안정된 체계라는 최후의 보루는 후발적으로 작동된다. 그래서 거반은 오토마즘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수순은 <<예감, 1997>>에서와 같이, 부동하는 선과 점들이 점멸하는 유동 속에서도 어김없이 나타난다. 유골을 상상케하는 점멸하는 검정색의 원환체가 중경의 구조를 이루면, 그 전경에는 붉은 빛의 혼령이 화면 전체를 간단없이 배회하는 적색 유동체들이 자리한다. 이어서 화면의 후경을 이루는 밑바닥에는 크롬옐로우와 흰색의 윤무가 미세톤을 주고받는다. 이 모두는 하나의 후발적 수순이다. 결코 예정된 전방위적 계획에 의한 건 아니다.
 
이 모두를 기표망 안에 감싸않는 것 일체가 그의 점멸에의 시선이고 부재에의 시선이다. 하나의 총체적 무의식의 기전(機轉)에 의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의 시선이 작은 것들에 대한 존경과 헌사를 아끼지 않는 것도 여기서 기인한다. 미소망상(微小妄想, micromania)을 방불케 하는 그의 시선은 당연히 신표현계열의 미소충동 내지는 해체충동과 맥을 같이한다. 이어서 서술해야 할 마지막의 사항이 그의 ‘기의’(記義)들이다. 그의 기의들의 품목은 제 1절에서 예고하고 2~3절에서 재 언급했던 두개골⋅소리⋅화면의 배후를 장식하는 인물을 비롯한 온갖 사물들이 아닐 수 없다.
 
이것들 가운데서 두개골은 그의 트라우마를 시사하는 상징물이면서도, 그의 미소세계 또는 부재의 기표들을 기의에다 결부시키는 데 가장 강력한 매개물이다. 이 때문에 그의 기의가 어떠한 건지가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앞서, <<예감, 1997>>에 대해 말하면서 간략히 기표면을 언급했지만, 화면의 중경과 전경을 장악하고 있는 두개골의 점멸선들과 붉은 환영들의 윤무는 그의 의식의 피안을 시사하는 기의의 품목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대작으로 곱히는 <<화몽, 2002>>과 소품에 해당하는 <<정물, 2005>>, 나아가서는 근작들(2009)에 등장하는 누워있는 인물과 애견, 일상용품과 기물들, 불상들은 모두 무엇인가를 함의한다. 이 작품들에는 소리를 상징하는 빨간색의 바코드같은 시그날이 마치 작가의 표지나 사인인양 화면의 좌측 하단에 빠짐없이 각인되어 있는 걸 볼 수 있다. 이것들은 그래서 작가 자신과 가장 가까운 기의적 품목들임에 틀림없다.
 
1절에서 개요를 언급했지만, 여기서도 이를 단서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건 그가 부재의 기표들을 기의에다 연결시키는, 공감할 수 있는 매개물이 있어야 했다는 걸 예상시킨다. 매개항을 그가 중요시했던 건 그가 부재의 시선을 이른 바 ‘연기’(緣起, pratityasamutapāda)에 의존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그의 기표들 상호 간에는 그래서 동시(同時)적이거나 이시(異時)적이거나 간에 인(因)과 연(緣)이 작동한다. 마음의 인과 사물의 연이 자동적으로 개입했다는 거다.
 
연기적 발상에 의하면, 그의 기표들은 상응한 매개항을 가짐으로써(因) 현실세계(緣)와 의미를 교환할 수 있다. 이를 위해 그가 등장시킨 검붉은 환영들, 킬링필드의 대지에 딩구는 유골들, 아니면 사람과 동물과 부처들, 일상용기들 모두는 그 나름의 경계가 다른 단자적인 매개물이지만, 이것들 간에는 슈퍼스트링(superstring)같은 끈들이 작동함으로써 그 의미가 절대적이기 보다는 상대적인 게 된다. 그래서 이것들 모두가 똑같이 기표들의 부동(浮動, moving)을 현실적인 것들에다 견인하는 연기적 역할을 하고, 그럼으로써 기의의 부동성을 견인하는 중간자로서의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기의가 결코 부재의 경계를 넘지 않는다는 걸 말해준다. 그가 등장시키고 있는 매개물들이 구상적인 것들이라 해서 현실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지시하는 건 결코 아니다. 그의 기의 역시 부재의 사물들, 이를테면 지하철 참사로 희생된 영혼들, 킬링필드에서 사라저간 희생자들, 나아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일체의 것들을 위한 추모의 제례(祭禮)아니면 그 정경을 함의한다. 그가 근작들에서 부처를 등장시킨 것도 지금은 부재하는 것들의 열반왕생을 기원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하철참사 희생자들을 위한 촛불은 물론, 동물, 심지어 일상 용품들마저 일체가 피안에 존재하거나 차안에는 존재하지 않는, 요컨대 부재의 것들의 왕생을 기원하는 제례의 전령들이다.
 
그의 예술은 궁극적으로 삶의 경계를 둘러싸고 있는 불투명한 세계를 그린다. 지금껏 살펴본 다수의 기표들과 이미지를 빌려 일반적으로는 근원의 세계를 현전시키기란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살핀 것처럼, 온갖 노력으로 현전케 하려는 시도(리요타르)를 보여준다는 데 의의가 있다. 그래서 그가 예술에 대해서 갖는 남다른 감회를 이렇게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삶이란 참으로 보잘 것 없고 미소한 것이 아닐까? 예술이란 이렇게 미소한 것들, 필연적으로 소멸을 거쳐 부재에 이를 것들을 끄집어내, 우리가 보아왔던 이 세상이 사실은 공(空)하다는 걸 선포하기 위해 마련한 제례에서 낭송할 헌사(獻詞, dedication)가 아닐까?’
 
■ 김복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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