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    업데이트: 18-05-11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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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즘, 신형상미술 그리고 해체주의_고충환 (미술평론가)
아트코리아 | 조회 289

모더니즘, 신형상미술 그리고 해체주의

고충환
미술평론가



하나의 형식을 심화시키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여러 다양한 형식들을 넘나드는 작가의 경우도 있다. 전자가 자기 형식에 강한 반면에 그만큼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다면, 후자의 경우는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는 반면에 그만큼 자기 형식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그러한 일면적인 접근보다는 더 근본적인 개별적인 성향 즉 체질론의 한 형태로 봐야 할 것이다. 이런 체질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권정호의 작업 편력은 전자보다는 후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권정호의 그림에는 의미와 절연된 순수 추상의 논리가 있는가 하면, 특정의 의미를 환기시키기 위한 기호의 논리도 있다. 구상적인 요소와 함께 추상적인 요소도 있고, 상징적인가 하면 표현적이다. 그의 그림에서는 앵포르멜과 모노크롬, 기하주의와 음향파, 미니멀리즘과 추상표현주의, 그리고 액션페인팅과 신형상미술이 하나의 화면에 공존하기도 하고, 각각 독자적인 형식을 견지하기도 한다. 분석적이고 즉물적인 서구적 멘탈리티와 순환론적이고 관조적인 동양적 멘탈리티가 서로를 견인하면서 조화를 이루기도 하고, 서로 충돌하면서 갈등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의 그림은 기본적으로 평면 회화가 중심이지만, 여기에 사진과 설치가 더해지는가 하면, 나아가 해프닝의 요소마저 발견된다. 이 모든 다양한 형식적인 편력은 그대로 다양한 형식 실험에로 이어지며, 시기적으로 이전 작업에 나타난 형식이 변형된 형태로 근작에 다시 나타나기도 한다. 이처럼 권정호의 작품세계는 다양한 형식을 넘나들며, 특정의 형식이 특정의 시기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전형적인 현재진행형의 작가이며. 그만큼 역동적이다.
 
1970년대, 모색기
 
권정호의 작업은 크게 뉴욕의 프렛 인스티튜트 수학을 위해 도미(渡美)한 1982년을 기점으로 해서, 그 이전의 순수추상회화와 이후의 형상미술로 구분된다. 작가 개인적으로는 모색기에 해당하는 1970년대 그의 회화 경향은 당시 국내 화단 중 특히 대구 화단의 경향과 직간접으로 연루돼 있다.
 
이를테면 <흔적>, <환상>, <잔상> 등의 작업에서는 가급적 색채를 배제시킨 모노크롬의 화면과, 비정형의 얼룩들 그리고 안료의 물질감에 바탕을 둔 앵포르멜 류의 원형질을 연상시키는 화면이 특징이다. 회화를 하나의 현상으로 보는 한편, 그 현상에 대해 어느 정도의 우연성의 개입을 인정한다. 작가의 인격적 현실이나 개성을 표출시키기보다는 회화와 화면 자체의 자족적이고 내재적인 논리를 중시하는 이러한 경향은 특히 <점> 시리즈에서 강조된다. <점> 시리즈는 이후 <선으로부터> 시리즈와 함께 그의 작업이 일정정도 모더니티의 실현에 접맥돼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니까 회화의 지위를 특정의 의미나 내용 대신, 점, 선, 면, 그리고 특히 평면으로 대변되는 회화의 기본적인 요소에로 되돌리려는 모더니즘 특유의 환원주의와 관련된다. 이는 당시의 그림이 색채 사용을 가급적 절제하고 있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추상화에의 이러한 경향은 앵포르멜, 추상표현주의, 미니멀리즘, 그리고 기하추상을 망라한 신조미술협회전(新潮會)에 작가가 비교적 초기부터 참여해 왔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신조회는 1972년에 창립되었으며, 작가는 1974년부터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전시에 참여하고 있다).
 
1980-1990년대, 신형상미술
 
앞서 언급했듯이 작가의 작업은 1982년 미국 유학을 계기로 하나의 전기를 맞게 된다. 순수추상회화를 지향하던 것에서 신형상미술로 전향한 것이다. 이전의 무채색이 중심인 화면에서 원색을 보다 과감하게 화면에 끌어들이는 것으로, 그리고 이전의 정적이고 관조적인 분위기에서 보다 감각적이고 역동적인 화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변화한 것이다. 그리고 회화의 당위성을 회화 자체의 자족적인 구조와 형식 원리에서 찾던 것에서 회화 외적인 존재를 설명하고 지시하고 암시하는 기호적 속성에서 회화의 존재 이유를 찾는 것으로 변화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작가 개인의 인격적 현실인식이 회화의 존재에 깊이 연루되게 된 것이다.
 
이는 일면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러니까 그동안 모더니즘의 환원주의 논리에 의해 억압된 것으로 간주돼온 인간 실존에 대한 욕구의 목소리가 상당한 힘을 얻게 된 것이다. 여기서 이전의 형상미술이 세계의 감각적 외관에 대한 객관적 재현(세계 자체를 하나의 대상으로 보고, 그 대상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이를 재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신형상 미술은 한 개인이 처해있는 현실 인식과 이로부터 비롯되는 실존적 위기의식의 표출이 곧 회화의 대상이고 목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권정호의 그림에 나타난 강한 원색과 그 원색들의 현란한 대비효과 자체는 물론 조형적인 한 장치로서 도입된 것이긴 하지만, 이와 함께 무엇보다도 작가 개인의 인격적 현실인식이나 사회에 대한 어느 정도의 메시지를 함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강한 표현을 위해서 원색을 사용 한다’는 작가의 말과도 통한다. 말하자면, 그의 그림에 나타난 색채는 곧 표현인 것이다. 이러한 회화관을 배경으로 한 그림들이 <소리>, <해골>, <하늘>, <기氣> 연작이다. 이 그림들은 각각 개별적으로 그려지기도 하고, 더러는 하나의 화면 내에 공존하기도 한다.
 
소리 연작
 
<소리> 연작은 현대인의 일상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온갖 소음들과 전파 그리고 전자음에 대한 작가의 반응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처럼 소리를 형상화한 작가의 그림들은 마찬가지로 소리를 매개로 한다는 점에서 음악과도 통한다. 그리고 음악 자체는 모든 예술 가운데서도 가장 추상적인 형식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작가의 다른 여타의 장르들이 어느 정도 묘사와 재현을 매개로 하여 삶의 현장성에 연루돼 있음에 반해, 그 문법이 추상적인 음악은 이러한 삶을 재현하는 것에 대해 상대적으로 취약할 수밖에 없다. 그만큼 장르 내재적 특질이 강하다는 말이다. 이로써 권정호의 <소리> 연작이 현저하게 순수 조형적이고 추상적인 형식을 띠는 데에 따른 이유가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소리> 연작의 이면에서는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가 서로 통하는 공감각적 표현에 대한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공감각에 대한 인식 자체는 20세기 초 최초의 추상주의 화가들의 형식실험에로 소급되기도 한다.
 
작가는 이러한 소리를 형상화하기 위하여 화면에 스피커를 도입하는데, 그림으로 그려 넣기도 하고 더러는 하나의 오브제로서 화면에 부착시키기도 한다. 그 자체가 기하학적인 도형처럼 생긴 스피커 고유의 형태는 화면에서 일종의 구심점 역할을 한다. 이를테면 배경 화면의 분절된 선들과, 반복 나열된 점선들 그리고 더러는 비정형적이고 유기적인 선들의 다발을 자기 내부로 불러들이거나 혹은 이와는 반대로 자기 외부로 확산시킨다. 그리고 이 선들이 각각 고유한 소리를 상기시킨다. 예를 들면 점선들이 기계음 고유의 단절음을 상기시킨다면, 유기적인 선들의 다발은 보다 인간적인 소리에 가깝다. 이 소리들이 화면에 갇혀 맴돌기도 하고, 열려진 대기를 향해 퍼져 나가기도 하는 것이다.
 
보기에 따라서 작가의 <하늘> 연작은 소리 연작에서의 배경화면이 독자적으로 발전한 것일 수 있으며, 또한 <기> 연작 역시 소리를 형상화한 다양한 선들의 동세 표현이 발전한 것일 수 있다. 그러니까 <하늘>과 <기> 그리고 <소리> 연작 중 어느 것이 먼저랄 것도 없이 하나로 어우러져 서로를 견인하는 계기로서 작용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 관계는 상보적이거나 혹은 상호 포괄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그만큼 그 자체 일말의 논리적인 과정으로서보다는 자연발생적인 귀결로 보인다. 그런가하면 소리가 퍼져 나가는 모양새 곧 음파(音波)는 기의 발산과도 통하며, 그 자체를 에너지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소리와 기가 하나로 만남으로써 화면을 생동감과 함께 긴장감으로 충만한 역동적인 에너지의 장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는 것이다.
 
해골 연작
 
권정호의 작업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소재는 무엇보다 해골이다. 여기서 <소리> 연작이 현대인의 일상에 대한 작가의 반응을 형상화한 것이라면, 일련의 <해골> 연작은 이 보다는 더 근본적인 인간 실존에 대한 물음과 그 반성에 그 맥이 닿아 있다. 때로는 <수난>, <십자가>, <제물>, <죽음>의 형태로 변형돼 나타나기도 하는 해골 그림에서는 단순한 종교적 메시지 이상의 인간의 실존에 대한 의식과. 이에 따른 작가 개인의 정념을 거침없이 표출시킨 강렬한 에네르기와 페이소스 그리고 일말의 묵시록적인 암울한 정서가 느껴진다. 보기에 따라서는 개인적인 신화와 원형의식에서 회화의 당위성을 찾는 신표현주의 와의 영향관계가 느껴지기도 한다.
 
작가는 해골을 표현주의적인 방법으로 화면에 그려 넣기도 하고, 신문지 위에 드로잉하기도 한다. 특히 신문지 위에 그려진 해골의 이미지는 작가의 작업에 나타난 해골이 단순한 소재적 차원이나 형식적인 차원에서의 흥미 유발 이상의, 상당할 정도로 시대정신 혹은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의 맥락에 연루된 것임을 말해준다. 그런가 하면 작가는 해골을 석고로 떠내는가 하면, 때로는 종이의 원료인 천연의 닥을 소재로 하여 떠내기도 한다. 특히 닥으로 떠낸 존재의 무게를 상실한 가볍고 속이 빈 해골은 유명한 바로크 알레고리 곧 바니타스(인생무상)의 전언을 상기시킨다.
 
이렇듯 작가는 해골을 평면의 그림으로 재현하기도 하고, 떠낸 해골의 모형을 공간에 설치하기도 한다. 그리고 해골 모형을 특정의 상황 속에 집어넣어 재 맥락화 한다. 그 재맥락화의 과정에서는 일말의 해프닝의 가능성이 발견되고, 또한 그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에서는 유사 르포르타주와 개념미술의 가능성이 발견된다. 말하자면 작가는 해골 군(群)을 설치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의도된 현장성을 연출한다. 예컨대 천연의 밭이나 돌무더기 속에서 우연하게 군집을 이룬 두개골 군을 발견하고, 이를 캐내는 유사 발굴의 형식을 도입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캐낸 해골 군을 마치 박물관을 연상시키는 방법으로 유리관 속에 안치시키고, 그 모든 과정을 기록한 사진을 함께 전시한다. 그런가하면 발굴된 해골 군을 하나의 무더기로 쌓아 설치하기도 하는데, 여기에서는 킬링필드에서의 해골 무덤과 함께 카타스트로피(전면적인 파국)를 떠올리게 한다. 이 모든 과정의 이면에는 최근의 학제간 연구 방식에 대한 이해가 깔려 있다. 말하자면 작가는 고고학 또는 인류학과 미술이 만나는 접점의 한 가능성을 모색한 것이다.
 
그런가하면 권정호의 그림에서는 이중화면 내지는 다중화면이 발견된다. 이를테면 구상적인 이미지와 추상적인 이미지, 기하학적인 화면과 유기적인 화면, 무채색의 화면과 원색의 화면, 하늘 그림과 해골 그림,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화염의 형상과 해골 형상이 나란히 놓이는 식이다. 그 중에는 의미론적으로 서로 연관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전혀 무관계한 것들이 대비되는 경우도 있다. 이는 아마도 최소한으로 암시적인 것들, 혹은 아예 서로 무관계한 것들을 함께 놓음으로써 그림에는 미처 나타나 있지 않은 제 3의 의미를 붙잡으려는 욕구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 욕구 자체는 원래 무의식에 속해 있던 것을 의미의 층 위로 끌어올리려는 초현실주의자의 기획과도 통한다. 그 이면에는 모든 이분법적인 것들을 음(陰)과 양(陽)의 관념 속에 불러들여 하나로 통합시키려는 작가의 기획이 놓여 있다.
 
2000년대, 선으로부터
 
권정호의 근작들은 사실상 이전의 <선으로부터> 시리즈(특히 1990년대에 집중적으로 제작된)에서 이미 시작된 것이다. 말하자면, 작가의 선 시리즈에 대해서는 굳이 선이라는 특정의 제목을 붙이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선에 대한 형식실험의 맥락에서 볼 수 있는 다른 그림들과 함께 작가의 거의 전 시기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는 무작위성과 함께 이미지와 의미를 하나로 넘나드는 서체(書體)에 반영된 동양정신이 깔려 있다. 즉, 이미지는 이미 하나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또한 의미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형상의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평면 위에 그어진 우연적이고 무작위적인 선이 하나의 형상인가 하면, 하나의 의미도 된다는 논리이다. 그리고 그 선은 초현실주의의 칼리그래피 와도 통하고, 추상표현주의 혹은 액션페인팅의 드로잉과도 통한다. 그런가하면 작가의 선 그림 중에는 분절된 선들의 다발을 반복 중첩시키는 방법으로써 화면을 가득 메운 그림도 있는데, 이는 마치 전통적인 자개공예에서의 끊음질 기법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보기에 따라서 그 선 자체는 육화된 붓질에 나타난 무작위적이고 우연적인 흔적을 중시하는 동양적인 서체와 함께, 분석적이고 조형적인 요소를 중시하는 서구적인 드로잉의 개념을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선에 나타난 감각적 개념이 그의 형상작업에서의 드로잉에도, 그리고 이후 근작에서의 해체적인 선 그림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특히 그의 형상 작업에서는 색채와 함께 드로잉이 거의 절대적인 중요성을 차지하며, 여기서 그 드로잉의 기본은 다름 아닌 선이다. 이를 생각할 때 그의 일련의 선 그림에 나타난 형식실험에서 이미 다른 여타의 형상작업을 결정짓는 요소 중 중요한 부분인 드로잉의 한 가능성이 태동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체
 
작가의 근작들은 마치 매직아이(Magic Eye)를 연상시키는, 추상적이고 분절된 선들과 특정의 형태가 하나로 만나는 화면이 특징이다. 작가는 이 그림들에서 그리기와 지우기, 드러내기와 숨기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과의 경계를 넘나드는 한편, 그것들을 하나의 화면 속에 해체시키고 통합시킨다. 오직 선으로만 특정의 형상을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 중첩시켜, 최종적인 화면에서는 형상이 화면 가득히 분절된 선들의 편린 속에 해체돼 나타난다. 그럼으로써 그림에서는 겨우 드러나 보이는 형상, 겨우 존재하는 형상, 최소한의 흔적으로 겨우 암시되는 형상을 알아볼 수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화면에서는 분절된 선들과 해체된 형태가 어떠한 경계도 없이 혼연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는 모든 차이와 구분 그리고 경계가 사실은 하나의 논리로부터 유출된 것이라는 작가의 세계관(일원론적 사유에 접맥돼 있는)을 실천한 것이다. 이는 그대로 <녹아서 하나가 되다>(2001), 혹은 <모든 것은 하나>(2001)라는 그림의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도 일맥상통한 것이다.
 
이렇듯 권정호의 그림에는 탁자나 다기(茶器) 등의 정물, 해골과 하늘, 사람과 개 등의 소재가 주요 형상으로서 등장하지만, 그 형상 자체가 목적이거나 대상은 아니다. 오히려 그 형상은 그림을 시작하기 위한 최소한의 계기이거나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림에서 주된 대상은 형상보다는 그 형상을 해체시키는 선들의 유희, 선들 상호간의 유기적인 관계, 선들과 화면과의 관계, 그리고 화면에 도입된 형상과 이를 해체시키는 분절된 선들과의 관계인 것이다. 이는 작가의 근작이 기본적으로는 해체주의를 실천하고 있으면서도(재현의 논리를 해체시키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모더니즘적 환원주의에로 되돌려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는 그 자체 의식적인 행위이기보다는 작가의 잠재적인 모더니즘적 성향이 무의식적으로 표출된 경우로 보여진다.
 
이로써 권정호의 작업 편력은 대략 1970년대의 모색기, 미국 유학 이후 시기인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신형상미술, 그리고 2000년대의 선으로부터 시리즈와 해체적 시기로 귀결된다. 부연하면, 모노크롬의 화면과 안료의 물질감 그리고 비정형적인 화면에 바탕을 둔 앵포르멜 류의 작업에서 작가는 회화의 존재 이유를 회화 내적인 논리에서 찾는 모더니스트로서의 한 전형을 실천한다. 이후 신형상 미술의 영향을 받은 <소리> 연작과 <해골> 연작에서 작가는 회화의 당위성을 현실에 반응하는 시대정신과 인간 실존에 대한 사유의 계기에서 찾는다. 그리고 <선으로부터> 연작과, 이로부터 그 결정적인 계기를 얻고 있는 근작에서 작가는 모더니즘적 환원주의와 함께 해체주의를 실천한다. 그동안의 이러한 작업 편력의 이면에는 회화 자체의 존재를 묻는 회화의 논리와, 회화와 인간 실존 혹은 사회와의 관계를 묻는 관계의 논리가 서로 조화를 이루거나 충돌하면서 긴장감을 견인해내고 있는 것이다.
 
■ 고충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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