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    업데이트: 18-05-11 10:21

Critics

구축과 해체의 합류_박소영
아트코리아 | 조회 301

구축과 해체의 합류

박소영
미술비평-2005


권정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특징은 수많은 선에서 드러나는 형태의 단순성이다. 또한 대립하는 여러 요소들이 한 프레임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그의 작품세계를 표출한 전시가 중국 상하이미술관에서 (9.5~9.15)열렸다. 그의 작품에 항상 존재하는 동양성과 현대성이 현지 관객들의 호응을 불러 일으켰다는 평가다.
 
궁극적으로 모든 것은 하나로 모인다’ 는 일원론적 사유를 창작의 축으로 하는 권정호의 작품세계는 역설적으로 구축과 해체,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이질성과 동질성 같은 이원론에 기반을 둔 변증법적 구조 안에서 전개된다. 숨은그림찾기처럼 보이는 그의 최근작들은 일견 무질서해 보이지만 나름의 질서를 가진 선들의 놀이로 채워져 있다. 또각또각 분절되고 재구성되어 독특한 리듬감을 발산하는 선적 구조의 형상들은 음운문자와 표의문자의 요소가 혼합된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를 연상시킨다. 구체적인 대상을 나타내는 선들과 무작위적인 선들은 어느 것이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다발적으로 회화 공간에서 용출하고 사라지면서 구축과 해체의 연속선상에서 상호침투하고 있다. 모더니즘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자기 규정적인 그림의 자율성은 작위성을 배제한 선긋기에 의해 평면성으로 환원되어 권정호의 회화구문에서 표음적 기능을 담당한다. 그 너머 오버랩된 구체적인 대상들은 표의적 기능을 지니고 화면에서 깊이감을 형성한다. 이러한 이중적 구조체제를 통해 화면의 구성, 형상과 배경의 관계, 선과 형태 등에 관한 조형적 문제들은 쉽게 해결되어 버린 듯하다.
 
형상과 기호, 행위와 언어는 그의 회화에서 분리할 수 없는 현실이며, 추상과 구상의 이분법을 뛰어넘어 화면에 신선한 활력과 다이내미즘(dynamism)을 부여한다. 〈촛불〉, 〈제단〉, 〈추모〉 등의 타이틀이 시사하듯 권정호의 2000년대 작품의 대다수는 그가 속한 지역과 시대의 아픔을 위로하는 레퀴엠이라 할 수 있다. 2003년에 제작한 〈2·18 지하철〉 연작에는 작가의 예술세계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해골과 불상이 흑백으로 양분된 화면에 병치되어 위령제의 의미를 극대화한다. 화면의 한쪽에는 화마로 시커멓게 그을린 벽에 유족들의 피맺힌 글들이 각인되어 있고, 비극의 현장을 밝히는 촛불은 불가마 속에서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린 희생자들을 위로하듯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해골들을 나열하거나 집적시켜 마치 고고학적 발굴 현장을 각색한 듯한 과거 그의 설치작업에서도 사고와 자연재해의 참혹함, 인간의 잔인함과 난폭함이 남긴 끊임없는 상처를 관람자에게 전달하려는 강렬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이렇듯 찢어진, 산산조각 난 ‘부서진 현실’은 작가의 의식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그에게 창조란 전쟁, 폭발, 화재, 홍수와 같은 재앙에 속절없이 희생될 수밖에 없는 나약하고 불안정하며 절망스러운 존재로 실존하는 인간의 운명과 부조리에 대한 철학적, 예술적 성찰의 결과이다. 그의 작품은 오로지 예술만이 이러한 참혹한 것들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힘을 소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역설적으로 예술이 이러한 난폭함(violence)과 접촉함으로써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의 화면에 나타나는 ‘부서진 현실’은 이런 예술을 통해 치유된다. 허공에 떠 있는 망령처럼 보이는 희미한 검은 해골 형상들은 실제의 참상이 전체의 죽음으로 변형됨을 암시한다. 이것들 사이로 분출하는 몇 개의 노랑과 파랑 선은 현실의 끔찍한 고통을 초월하여 영원한 안식의 세계로 희생자들을 인도하려는 작가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작가의 최근작에도 자주 나타나는 빨간 직사각형을 관통한 동그라미들은 중국인의 생활과 밀착된 숫자와 행운의 상관관계를 상징하는 기호로서 화면에 비극적 현실을 극복하는 희망적인 비전을 가져다준다. 이러한 ‘부서진 현실’에서 초월과 영원을 길어 올리려는 불생불멸의 열반을 상징하는 불상 형태로 완성된다.
 
권정호의 예술세계에서 대위법적으로 전개되는 이질적인 요소들과 상반되는 형식들은 각각의 독자적인 영역을 고수하면서도 화면에 독특한 체계를 구축하여 반향과 공명을 자아내는 다성회화를 창조한다. 지난달 상하이 미술관에서 열린 대규모 회고전에서 그는 도가사상과 불교에 심취한 동양적 사유와 서양적 회화 방법론의 접점에서 하나의 양식에 안주하지 않고 쉼없이 변천을 시도하는 자신의 역량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이미 이루어 놓은 것과 단절하고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현재진행중’인 이 작가의 의지는 동서양의 합류와 여러 다른 문화간의 교류라는 언제나 열린 형식의 종합적인 연구로 이어질 것이라고 기대한다.
 
■ 박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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