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락재 김경국 서각
오늘 14     전체 93,781
글 수: 2    업데이트: 15-10-23 14:52

언론&평론

대구 신매동서 주점 ‘야미안’ 운영 서각가 김경국씨
아트코리아 | 조회 1,015
  • 영남일보
  • 이춘호기자
  • 2015-10-23
  •  

    초대작가급 실력…“그냥 서각하는 ‘주점사랑방 아저씨’로 남고 싶어요”

    너털웃음이 끊어지지 않는 수더분한 이웃집 아버씨 같은 포스의 자락재. 그는 낮에는 각을 하고 밤에는 술을 팔며 생활예술가의 길을 가고 있다.


     

    대구시 수성구 신매동 한 주택가에 있는 괴짜 같은 아날로그 주점 ‘야미안’. 이 공간을 작업장 삼아 낮에는 서각하고 밤에는 주점을 꾸려가는, ‘주각야경(晝刻夜耕)’하는 서각인이 있다. 바로 자락재(自樂齋) 김경국씨(62). 오후 6시에 문 열고 다음날 오전 2시쯤 문을 닫는다. 처음 온 사람은 사면에 빼곡히 걸린 온갖 형태의 서각 작품에 눈길을 뺏긴다. 식탁 바로 옆에 작업대가 있고 그 바로 옆에 2천여장의 LP음반을 돌리는 전축도 있다. 전각으로 이미 초대작가권에 진입했지만 그는 굳이 손님에게 티를 내지 않는다. 너털웃음이 풍성한 그는 무심코 시작한 수석 생활 중에 만난 서각에 2부인생을 걸었다.

    의성군 비안면 자락리에서 태어난 그는 고만고만한 농군의 아들이었다. 고교 졸업 후 의성군청에 들어간다. 제대 후 삼성전자에 합격했지만 병원 원무과로 진로를 바꾼 뒤 16년간 병원에서 지낸다. 병원을 나와 부산에서 첫 실내 골프연습장을 달맞이고개에서 열었지만 김영삼 대통령의 골프금지령에 직격탄을 맞는다. 친구와의 매매계약조차 난관에 봉착해 송사거리로 불거지게 된다. 설상가상의 나날이었다. 건설맨으로 1년 남짓 있다가 대구로 옮겨와 경산 영남대 정문 앞에서 프랜차이즈 우동집을 연다. 하지만 9년 만에 식당도 자기 길이 아니라서 접는다. 막막한 시절, 우연찮게 경산수석회와 인연이 된다. 부산 시절 그는 해변을 거닐며 기이한 돌을 많이 수집했다. 수석의 오묘함도 모른 채 대구로 올 때 1천여점을 갖고 온다.

    나름 감각을 인정받아 경북도 수석회연합회 사무국장이 된다. 점입가경(漸入佳境)의 나날이 이어진다. 그 다음해에 제1회 경주세계엑스포에서 세계수석대전이 열렸는데 그가 행사 준비를 한다. 그때 800여점의 절정의 수석과 내로라하는 쟁쟁한 수석인을 알게 된다. 행사 직후 금강산 온정리에서 열린 남북합동 수석전에도 참여한다.

    수석에 몰두하다
    행사장에 선물로 온
    서각에 마음 빼앗겨
    서예 익히고 瓦刻·목각 입문

    주점 뒤편에 공방 만들어
    낮엔 새기고 밤에는 주점 운영
    하루 13시간 작품 매달리기도

    지금까지 1천여점 새겨
    대구미술대전 특선 4·입선 3회
    개인전도 3회나 가져

    서각이 없었다면
    무엇을 하며 살아갔을까 싶어요

    ◆수석에서 서각으로 터닝

    수석전을 통해 예술적 구도와 보는 방법, 배치법, 전시법, 연출법, 작명법 등도 섭렵해나간다. 하지만 수석보다 행사장에 선물로 온 고졸질박한 서각에 더 마음을 뺏긴다. 일단 수석을 받치는 지판목을 하나둘 모으기 시작했다.

    수석과 서각은 맘을 풍성하게 했지만 생계는 바닥권. 돌과 각 못지않게 생계도 중요하다 싶어 주점을 열었다. 주점은 그의 일터이자 작업장이며 사랑방이었다. 일을 내기 위해 한학자이며 서각인이기도 한 일산 박위호 선생을 찾아갔다. 서각법 이전에 서예가 더 절실했다. 선생의 권유로 와각(瓦刻)에 입문한다. 이 과정에 전각의 요체인 낙관과 인장 새기기에도 몰두한다.

    힘 조절이 원활치 않아 피아노를 처음 배우는 사람처럼 손목이 늘 아팠다. 생각대로 칼이 움직이자 각이 균제미를 갖게 되었다. 성취감이 엄청났다. 재료구하기가 관건인 것 같아 특이한 기와를 구하러 팔공산 주변 및 경북의 여느 기와 공장도 숱하게 기웃거렸다. 집에 오면 기와를 깎았다. 심야에 칼질을 하면 옆집에는 큰 소음으로 들렸다. 적잖게 욕을 얻어먹었다.

    정처럼 쪼는 것과 끌로 파내는 것의 차이를 알아갔다. 기와의 물성을 익힌 뒤 나무로 넘어갔다. 선생으로부터 받은 ‘현대서각의 이론과 실제’(이현준 저) 등 서각 관련 서적은 물론 유명 서각·전각전에 나온 작품을 다각도로 분석했다.

    목각의 경우 그냥 바탕선을 따라 깔끔하게 파내면 그만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무는 나무의 갈 길(결)이 있었다. 그 결을 부릴 줄 아는 게 각의 승부처였다. 이젠 나이테를 보면 어떤 방향으로 각해야 될 건지 감이 온다.

    ◆조각칼도 결국 하나의 붓

    “조각칼이 곧 붓입니다. 서각은 칼로 새긴 붓글씨죠. 서각이란 결국 서각도를 붓처럼 획순대로 깎아나가는 것이에요. 서예의 필법을 모르면 서각도 엉망이 되고맙니다. 서예의 기본 필법인 ‘중봉직필(中鋒直筆)’이 각 속에 구현이 되어 있어야죠. 붓끝이 글자의 중심을 지나가야 글맛이 나듯 각도 마찬가집니다. 좌우 각선이 만나는 계곡선이 중앙선으로 살아있어야 기운생동하죠. 표면이 유리처럼 너무 매끈해도 너무 우툴두툴해도 ‘칼맛’이 없어요. 양각의 바탕을 깎아낼 때도 불규칙적인 파형(波形)을 유지해야 합니다.”

    느티나무, 박달나무, 은행나무, 가죽나무 등 귀한 목재를 수백점을 구해놓았다. 글씨에 맞춰 나무를 찾아야 사리에 맞지만 제약조건이 있다. 어떤 때는 좋은 소재의 나무에 맞춰서 자형을 축소·확대해 새겨야 한다. 수리·기하학적 감각이 절실하다. 서각이 너무 재미있어 겨울에도 주점 뒷마당에 마련된 공방에서 13시간 넘게 삼매경에 빠지는 날이 많았다. 칼맛을 잃지 않기 위해 지속적으로 작업해야 한다. 하다 보면 교과서에 없는 감을 익힐 수 있었다.

    “책에 적당한 힘이라고 하지만 그게 어떤 힘인지는 깎아봐야 알죠.”

    그는 전통의 맛도 중요하지만 현실을 반영하기 위해 요즘 캘리그래피도 함께 배운다. 최근에는 칼맛보다 더 큰 벽이 그를 막아선다. 바로 색 선택이다. 칼이 지나간 자리에 무슨 색칠을 하고 그 배경은 무슨 색으로 해야 할지가 늘 고민이었다. 서각에 현대회화의 감각까지 요구되는 대목이다.

    ◆신매동 주점사랑방 서각 아저씨

    입문한 지 3년 만에 KBS대구경북방송총국 전시실에서 첫 개인전을 했다.

    “솔직히 개인전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도 몰랐어요. 단지 욕심 때문이었죠.”

    전시회 날이 다가올수록 밤샘 작업도 늘어났다. 낮에 각을 하고 밤에 주점 일을 하고 새벽 2시에 아내를 집에 데려다주고 다시 작업에 몰두했다. 그렇게 해서 첫 전시회 때 나옹선사의 ‘토굴가’, 왕희지의 ‘난정서’와 도연명의 ‘귀거래사’ 등 40여점이 전시된다.

    “서각이 없었더라면 뭣하며 살아갔을까 싶어요. 서각은 분명 제 삶의 회초리입니다. 서각도 모르고 돈버는 데만 몰두했다면 몸이 엉망진창이 됐을 겁니다. 요즘 워낙 고매하고 유명한 예술가가 많아 저는 그쪽으로 가고 싶지 않습니다. 빛이 안나잖아요. 그냥 서각하는 ‘신매동 주점사랑방 아저씨’로 남고 싶어요.”

    지금까지 1천여점을 새겼다. 특히 좋아하는 반야심경의 경우 1년에 8개도 새겼다. 동방금석문연구회에 회원으로 있으면서 탁본에 대한 안목을 많이 높였다. 3번의 개인전, 대구미술대전에서 4회 특선, 3회 입선을 했다. 현재 새하얀 미술대전 초대작가, 한국각자협회 초대작가, 경북향토사연구회 회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위원 등으로 있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덧글 0 개
    덧글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