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7    업데이트: 17-03-29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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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준 을 말한다
김종준 | 조회 902

1 김종준
김종준은 조용한 사람이다. 그는 김광석 같이 순박하고 외로운 사람이다.

이는 전적으로 나의 개인된 생각이지만 나는 그를 그렇게 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시골사람이면서 도회지 사람이기도하다. 그는 착하고 때론 무심하다. 그는 은유적이다.

은유를 통해 사랑을 표현했던 영화 ‘일 포스티노’의 순박한 시골 청년 마리오(파블로 네루다로부터 시를 알게된 순수한 시골청년, Massimo Troisi 분) 처럼 그는 은유를 보고자 한다. 그 은유는 여운(余韻)의 다른 이름이다.


햇살 가득한 시골 들녘 혹은 산길 모퉁이에도 은유는 살아 숨 쉰다.

은유를 보는 자는 시를 아는 자요, 사랑의 기억에 목이 마른 자다. 사랑에 목마르고 희망이 그리운 사람들이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쓴다.


그가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많아지면 나는 그에게 묻는다. “그림 안 그리는 시간엔 주로 뭘 합니까?” 꾸물꾸물한 그의 대답은 이러하다. “그냥 그림 생각 한다” -그림생각 안 할 땐 그림을 그린다는 역설적인 이 이야기에 나의 인내(忍耐)는 처연(悽然)해진다.- 나는 그가 좀 더 시간이 많았으면 좋겠다. 여행을 떠나 오랜 시간 낯선 하늘색과 공기가 다른 곳에서 지내보기를 권하고 싶다. 내 능력이 된다면 다시 연애를 시키고 싶다. 술을 마셔도 좋을 몸이라면 술을 먹이고 싶다. 이 모든 것이 철없는 나의 욕심이다. 그는 나와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다지 많은 이야기를 한 것이 없고, 할 것도 없다. 현상적으로 드러난 이야기는 밑천이 시원찮다. 난 그에게 많은 이야기를 한답시고 주절거려 보지만 혼자 술 취한 사람의 독백처럼 되고 만다. 나는 그제야 현상적인 것만 이야기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김종준은 쉬운 사람이다. 그러함과 함께 김종준은 은유적이다. 김종준은 은유의 도를 단순한 데서 찾고 있다. 그는 어렵게 말을 돌려서 할 줄 모른다. 그것은 대단히 좋은 행동이며,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가 만약 세련된 기교에 빠진다면 그의 삶은 지금 보다 기름지게 살고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런 인생의 가치를 누구보다도 그가 잘 알기에 그는 쉽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최대한 자신의 몸을 혹사시켜 노동의 즐거움을 누리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이유로 그의 그림을 보는 우리들은 대가없는 즐거움을 누린다.

한편 김종준은 변화가 별로 없다. 생각을 많이 하는듯하지만 그의 인생은 무료하다. 자신은 무궁무진하게 변화무쌍한 과정을 거쳐 왔다고 생각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야말로 단순하게 살고 있다. 아무리 다양하게 그림을 그려도 나는 김종준의 그것 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향기를 느낀다. 그는 아날로그 인간이다. 인터넷을 하지 않기 때문에 화가 날 때도 있다.-현실의 변화에 반응하는 그의 무딤과 무관하지 않은 이유라고 표현 할까?- 그러한 일상에 답답함을 느끼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는 그의 향기가 있다. 그 향기의 형태는 오래된 유년의 서정(抒情)과 젊은 날의 희망, 그리고 이제야 붓질의 행간을 아우르는 상징과 은유의 시작을 알리는 모습으로 비춰진다.  

지금부터 그의 그림을 통해 그의 향기를 말하고자한다.




2 김종준의 그림


1980년대 후반 그는 의기충천한 미술학도였다. 당시 대학 초년 시절 중앙미술관에서의 4인전에 출품된 그의 그림을 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그는 생각이 많았다. 창조적 욕구가 넘쳐흘렀다. 신구상 계열의 모노톤으로 그려진, 형태가 불분명한 그의 누드화는 흡사 베르나르 뷔페의 컬러를 연상케 하는 회색 톤의 그림이었는데 그의 의욕을 한 눈에 알 수 있을 만큼 역동적이었던 걸로 기억이 난다.

이후 90 년대 초반까지 그는 풍경과 인물, 신구상 계열의 다양한 그림을 그렸다. 당시 그는 그림에 대한 생각이 많았던 것이다. 그는 그림을 잘 그리려고 노력했었고, 그림 그리는 노동을 즐겼다. 그는 매끄러운 질감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초벌작업에 많은 공을 들였다. 이것은 당시 그가 생각이 많았기 때문인 이유이기도 하다. (대체로 무엇 하나에 인생을 건 사람들은 절박하고 생각이 깊어진다. 그리고 그 하나에 건 인생의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쉽게 생각지 않고 자꾸만 자신의 틀로부터 변화하고자하는 욕구를 가진다.)

그는 나름대로 변화를 즐겼다. 그러나 그것은 사소한 깨달음과 자기반성의 표현이지 진정한 의미의 확연한 변화는 아니다. 이런 그의 사소한 깨달음은 진솔하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그가 가진 이 진솔함은 대체적으로 순박한 그의 성품과 관련이 있고, 이 순박함은 진보적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박차고 나오는 탈피를 원하지 않았다.


1995년 김종준은 첫 개인전을 열었다. 다시 이듬해 두 번째 개인전을 열었고 그는 많은 시간 작업에만 몰두 했었다. 당시 그의 그림은 다양한 밑 작업을 통한 관념적 풍경이 많았고 정물과 인물도 그렸다. 그의 밑 작업은 그의 색깔을 드러내는 요소이면서 자신만의 흔적이고 싶어 하는 욕구의 표현방법이기도 했다. 1996년 소헌 갤러리의 큐레이터 박미정은 김종준의 그림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김종준의 작품에는 사물의 내적인 울림이 있다.”... 이 말은 그가 있는 그대로의 대상에 집착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고, 대상을 바라보는 데 있어 현상적인 것 이상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김미정이 이야기하는 김종준의 리얼리즘적 요소(이농 현상 등,)나 사회고발적 요소(시골사람들의 소외되고 피폐한 모습의 이미지 등,)에 대한 언급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는 김종준의 그림을 지극히 개인사(個人史혹은 個人事)적인 진솔한 고백과 자연을 통한 일상의 감동을 통해 인간의 서정적 감정을 유발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서정성의 가치가 리얼리즘의 그것과 양비론적 비교우위 운운 하고 싶은 의도는 없다. -


그러나 ‘내적울림’이라는 영역의 폭은 다양하게 이해할 수 있다 생각되며, 그 내적울림에 대한 나의 해석은 여운(余韻)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의 그림은 현상적(現象的)이지 않다. 그의 그림이 현상적이지 않은 이유는 그가 바라보는 자연의 해석이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되면서도 보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자연, 혹은 어떠한 대상을 바라보며 감동을 느끼고 창조적 충동을 느끼는 것은 일차적인 동기이다. 그러나 그것을 어떠한 방법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관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의 폭이 달라진다. 지금 그는 생각이 많은 시절, 창조적 욕구로 충만해 있던 시절보다 훨씬 보편적이다. 나는 김종준의 그림을 통해 나의 유년(幼年)을 포함한 과거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 흔적의 여운을 느낀다. 그의 최근작은 정(定)의 느낌이 강해 다소 외로운 느낌을 준다.

그의 그림을 통해 외로움을 느끼는 건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여러 사람들과 인터뷰를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부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는 풍경속에 점경인물(點景人物)을 그려 넣지 않는다. 김일해나 이원희는 점경임물이 있는 풍경을 통해 관조적(觀照的)인 시각을 견지하는데 비해 이러한 그의 방식은 그의 자의적(自意的)성향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풍경을 그리면서도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고, 자신이 느끼는 풍경의 정적(定的)인 느낌을 통해 자신만의 사색의 공간을 그려낸다. 이것은 현상적일 수 없는 요소인 것이다.


1998년 세 번째 개인전에서 작가는 좀 더 밝은 화면을 보인다. 늦은 오후의 햇살로 추측되는 들녘의 싱그러운 색깔을 여지없이 담아내고 있었다. 그는 참 맑은 햇살을 그려낸다. 황혼 직전 혹은 이른 아침의 아름다운 그의 풍경은 나로 하여금 다시 외로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역시 그의 풍경엔 사람이 없다. 그는 자신의 풍경을 통해 사람들을 그 황망한 아름다움의 들녘에 홀로 있게 한다. 작가 자신은 외로운 사람이고, 사람은 외롭다는 것을 자신의 자연을 통해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섯 차례의 개인전을 통해서 그의 풍경은 단 한 사람도 허락하질 않았다. 우연일까? 그는 인물화를 그리지만 옷을 입은 사람은 그리지 않는다. 차라리 얼굴만 그릴지언정 누드화만 고집한다. 그 누드화도 햇살을 입히거나 어둠 속에 던져놓아 고유의 색을 표현하지 않는다. 그는 벌거벗은 여인을 통해 자신만의 자유를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사람이 없는 자연을 통해 자신의 외로운 추억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일까?

특이한 개성은 거부한 채 평이한 풍경을 통해 현상의 것이 아닌 것을 시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일까?


2001년 네 번째 개인전의 김종준은 서문에서 스스로 이렇게 제목을 건다.

‘자연-그 그리운 흔적을 찾아서’

그에게 그리운 흔적이란 무엇일까? 청도 촌놈이 자라온 유년의 풍경을 말하는 것일까? 나이가 들어가면서 지켜볼 수밖에 없이 점점 사라져가는 풍경의 아름다운 흔적을 말하는 것일까? 자신이 느껴왔던 기억속의 희미한 기억들을 말하는 걸까?

그는 자신의 실존(實存)을 자연에서 찾는 노력을 한다. 자연과 사람만이 그의 실존을 확인해줄 수 있는 걸 파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연의 형상을 빌어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지 모른다. 그런데 김종준의 자연을 보는 해석법은 평이하면서도 남다르다. 보편적이면서도 시적 감수성이 많아지기 시작하는 시기가 이 때 인걸로 추측된다. 그는 길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면 분할이 많이 보이는 사적(私敵)인 감수성의 나무 등을 주제로 한 그림보다는 보편적인 풍경이 좋다. 다섯 번째 개인전에 출품된 ‘아침이 오는 길’ 이라는 작품은 새벽안개가 산등성이에 걸친 시골 풍경을 보이고 있는데, 그 길의 여운은 평이한 것만의 느낌은 아니었다. 보편적이지만 그 풍경의 길은 하나의 시적 여운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것은 잃어버려서 외로움을 느끼게 하는 과거에 존재, 즉 대기의 향기이며 그리움인 것이다. 그리고 잃어버린 자신의 내재됨에 관한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 제작된 400호 대작 ‘구연정의 아침’ 또한 지독하게 외로운 한가한 풍경이다. 자세하게만 표현된듯한 화면은 암갈색조의 부분에 와서 거친 붓질과 나이프 자욱이 난무하고, 명암의 대비만 강렬한 것이 아니라 흔적(질감)의 느낌이 다채로운 대비를 보이고 있다. 이처럼 그는 빛을 그리면서 보편을 이야기하고, 어두운 부분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다스리고 있는 것이다. ‘동강의 아침(카다로그에는 ’가을이 오는 길‘로 명명되어져 있다)’은 그의 풍경구도가 점차적으로 시원해지고 대범해짐을 알 수 있다. 이전의 그는 들녘이나 논밭을 세밀하게 그리고 원근을 단계적으로 표현하였지만 ‘동강의 아침’은 큼직한 구도에 이분법적인 원근으로 처리되어 순간적인 인상을 강렬하게 포착해내고 있다.(인상주의 화가 모네의 그림들이 대다수 그러한데서 알 수 있듯 빛의 움직임을 포착 하는 데는 과감한 구도법이 강한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김종준의 그림이 더욱 보편성을 드러내는 시점이 바로 이시기인 것이다.


2003년 겨울 여섯 번째 개인전에 출품된 그의 그림들은 좀 더 자신의 내면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도 그의 그림은 보편성이 더욱 확연해진다. 자신의 내면이 공감을 이끌어낸다는 이야기이다. 창을 통해 보이는 풍경은 더욱 더 그의 갇혀진 기억들을 끄집어내고 있다. 자연의 풍경을 드디어 창을 통해 보고자하는 그의 소재변화를 통해 그는 다시 한 번 자신의 기억과 흔적의 기록에 몰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지극히 주관화 되어가는 과정의 하나로 볼 수 있으며 다행스러운 것은 그러한 자의적 주관화 속에서도 보편적 공감대를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학자 장미진이 예전에 필자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작가에 의해 어떠한 대상이 재현되어지면 그 형상을 통해 일차적으로 작가의 성격이나 인성을 볼 수 있다. 작가가 좀 더 깊이 있는 사색을 하였다면 그림은 작가의 세계관이나 철학마저도 읽게 하며, 한 발 더 나아가 더욱 깊이가 더해지면 보편적 공감대를 얻을 수 있으니, 그것이야말로 그림이 하나의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 말에 무척 고무되었으며 지금도 그러한 사고를 견지하며 살고 있다.) 김종준은 어설픈 보편성이 아니라 하나의 잔재된 기억과 잊고 있었던 향기를 일깨워 그 여운으로 대중에게 공감을 이끌어내고 있다.  소재로 꽃이 많아지는 것도 눈 여겨 볼만하다. 그는 꽃을 그리며 하나의 상징을 만들고 있다. 꽃은 그에게 어떠한 기억의 구체화된 대상이고 그러한 기억은 잠재되어있던 것들의 어느 순간 발현의 모습이다. 그는 그러한 기억의 형태를 꽃으로 대신하는 것이다. 꽃은 구체적인 묘사를 통하지만 몽환적인 공간성을 가지고 있다. 꽃이 꽃임과 동시에 하나의 시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을 은유한 것이고, 사람의 마음을 적시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소품의 정물이나 일부 풍경에서 가끔 드러나는 형상의 자의적 해석이 희미하게나마 풍경 속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도 변화된 모습중 하나다.

그는 변화한다. 서서히 변모하는 과정들이 때론 빠름의 미학에 길들여진 작금의 시각에 다소 진부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 나름대로의 끊임없는 자기고찰과 새로운 조형욕구에 갈증 하는 모습을 항상 보인다.


나는 김종준이 진보적인 사실주의에 빠지든, 형이상학적인 자기 세계관에 빠지든 괘념치 않는다. 그는 은유를 보편적으로 말 할줄 아는 사람이고, 쉬이 갈 수 있는 길도 먼 산을 바라보며 가는 인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어떠한 동기의 유발 없이 어설픈 흉내내기를 절대로 할 줄 모를 만큼 고지식한 사람이고, 남을 속이는 행동을 했을 때 스스로 부끄러운 표정을 숨길 줄 모르는 사람이기에 그러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는 진솔하다. 그리고 착하다. 그는 진솔하고 솔직한 그림을 그리는 성실한 사람이다.


지금의 시대에 노동을 즐기면서 자신의 인생을 한 곳에 투자하는 사람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두에게 각인시켜주길 간절히 바라며 나는 덧붙여 소망한다.

지켜보는 이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 사람이 가치의 전부일 수도 있다고.......그래서 건강하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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