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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석 김진만의 생애와 예술 _ 권원순
관리자 | 조회 284
肯石 金鎭萬은 1876年(高宗 13年)8月 24日 大邱府 南山町 622番地에서 金在穰과 李春玉 사이의 長男으로 태어났다. 이 해는 江華條約 締結과 함께 朝鮮의 門戶가 開放되고 弱小諸國이 列強帝國들에 의해 蚕食되어 가고 있던 때이다. 침략과 항거의 피비린내 나는 투쟁의 時代的 状況은 한 藝術家의 悲劇的 生涯를 豫告하는 不吉한 조짐이었으며 그의 人間形成 藝術에 至大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

幼年時節의 총명한 지혜와 壯大한 氣骨은 肯石의 높은 學問과 藝術, 그리고 思想家로서의 資質을 일찍 약속하고 있었다. 四書三經을 熟讀하던 12세 되던 해에 達城 徐氏 門中의 承旨 徐佑淳의 長女로 肯石보다 4年 年上인 閨秀 徐福을 아내로 맞아 모두 4男3女를 두었으니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었다. 29세 되던 1905年에는 소위 乙巳保護條約이 締結되어 日帝는 그 毒牙를 드러내고 있었지만 傾國의 弱小民 運命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한창 나이의 血氣에 차 있던 肯石의 學問과 藝術은 자연히 救國精神으로 歸結되고 있었다. 이듬해 드디어 日本 統監府가 設置되고 韓末 巨儒 崔益鉉이 日警에 체포되어 對馬島에 監禁되어 있다가 그 곳에서 卒去하였다.

1910年 치욕의 韓日合邦條約이 調印되고 大韓帝國이 敗亡함으로써 失國의 百性이란 쓴잔을 들어야만 했다. 이같은 韓末風塵의 침울한 氣運과 日帝下의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긍석의 집안은 항상 和氣를 잃지 않고 夫人의 內助로 큰 변화 없는 살림을 꾸려나갔다. 그러나 평온한 생활 가운데서도 肯石은 조국이 日帝治下에서 독립하지 못함을 慨嘆하고 대대로 물려받은 遺産과 心身을 바쳐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할 것을 決心하였다. 1915年 大邱 達城公園에서 結團한 大韓光復會는 滿洲地方에 武官學校 設立과 軍隊編成을 하고 이를 위한 軍資金은 國內 富豪의 寄附金과 雜貨商 경영에서 얻은 이익금, 海外에서 日本화폐 위조 등의 방법으로 調達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을 직접 또는 간접으로 체험한 肯石은 같은 해 慶北 達城郡 壽城面 安逸庵에서 표면상으로 詩會라 칭하고 同志가 모여 비밀 결사인 朝鮮國權回復團을 조직하는 데 직접 가담하였다.

1916年 軍資金募金이 어렵게 되자 당시 大邱에서 이름난 富豪 徐佑淳(65世,大邱 南町)의 돈을 빼내기로 그의 長男인 徐相俊과 사위 肯石은 合意를 보고 同年 陰 8月 4日 同志 6名을 모아 야간에 침입케 하였으나 徐佑淳의 완강한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되돌아 나오다가 退路를 막는 下人(禹道吉.35)에 휴대한 권총으로 발사하여 重傷케 함으로써 소위 大邱拳銃強盜事件으로 세상을 떠들석하게 했던 것이다. 이듬해 3月 이 事件으로 金鎭瑀 (肯石의 아우)는 징역 12年, 肯石을 비롯한 鄭雲日, 崔丙圭, 林丙日,權國弼 등 5명은 각 10年, 崔俊明은 징역 2年, 朴尚鎭, 金在烈은 징역 6개월, 洪宙一은 징역 5개월, 李始榮은 징역 4개월의 言渡를 받고, 직접 가담자와 연루자 11명 모두 獄苦를 치루게 되었다. 이 사건이 발생하기 이전에도 肯石은 夫人을 보내 여러번 丈人에게서 돈을 얻고자 하였으나 번번히 거절당한 사실이 있는 것으로 보아 大邱中心의 軍資金調達에 얼마나 깊이 가담하였던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1917年 이 해에는 뉴욕에서 개최된 世界弱小民族 代表會議에 朴容晩이 한국대표로 참석했고 다음 해에는 東三省의 독립운동가 呂準 등 39人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1919年에 3.1운동이 발발되고 上海에서는 臨時政府가 樹立되는 등 國内外 愛國志士들의 祖國光復을 향한 발걸음은 힘차고도 빨라지고 있었다. 肯石은 10年이란 重刑에도 挫折됨이 없이 監房을 잠시 쉬는 곳으로 여겨 光復을 위한 자세에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으니 그의 墨竹에 이런 畵題가 보인다.

抱節不為霜雪改 成林終與鳳凰期
節介(竹節)을 안고 서리와 눈을 맞아도 고치려 하지않고, 竹林을 이루어 마침내 鳳凰과 더불어 함께함을 기약하네.

1930年 오랜 刑期를 마치고 出監한 肯石에게는 기울어진 家産과 一擧一動을 監視하는 日警의 차거운 눈빛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한 환경속에서 그의 예술은 逸氣를 뿜고 成熟되어 갔으니 藝術만이 그의 存在 理由였다. 그러나 둘째아들인 金永佑(光復團員)가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獄苦를 치룬후 31세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나니 아들의 慘喪을 당한 정신적 충격과 오랜 刑苦로 인한 신체상의 고통으로 光復의 날을 앞두고 1933年 陰歴 11月 12日 午前 7 南山町 622番地 에서 한많은 57年의 一生을 끝마쳤다.

肯石은 숭고한 애국정신을 발휘하여 조국의 자주독립 운동에 헌신 노력함으로써 국가발전에 공헌한 바 크다 하여 1977年 12月 13日 박정희 대통령이 曾孫 金和燮에게 勳章 國民章을 追叙한 바 있다. 作故時 그를 끔찍이 아끼던 嶺南書藝의 巨峰 石齋 徐丙五는 輓章에 哀絶한 心情을 이렇게 吐露하고 있다.

憶昔同君萬里行 楚山呉水路縦橫
記曾威海船頭別 淚眼相看去住情
随意揮來筆一枝 東坡書体土亭詩
其人如玉兼三絕 歴數臨池更有誰
蘭摧桂折不堪聞 萬事人間盡化雲
怊悵靈魂招不得 舊山黃葉雨紛紛

옛날 자네와 같이 萬里를 여행할 때
楚나라 山, 呉나라 江길을 종횡하였더라.
일찍 威海 뱃머리에서 서로 이별한 것을 생각하니
눈물어린 눈으로 서로 보니 가고 머무는 情이더라.
뜻에 따라 쓴 글씨는
蘇東坡의 글씨체요, 土亭의 詩로다.
玉과 같은 자네가 三絶을 겸했으니
역력히 臨池에 헤아려 본들 다시 또 뉘 있나.
蘭草와 桂樹가 꺾여진 것을 참아 들을 수 없으니
人間萬事가 모두 구름으로 化했구나.
슬프다 영혼을 어데서 부르랴
옛 동산 가을비에 낙엽만 떨어지네.

韓末의 風塵속에서 태어나 亡國의 恨을 안고 日帝治下의 어두운 세상을 살다 간 肯石은 鄕土 大邱가 낳은 博識한 學者요, 愛國志士로서 또 글씨, 四君子, 器血折枝 등 文氣있고 端雅한 作品을 남긴 書畵家로서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아 오늘의 後孫과 後進들에 기리 빛날 敎訓이 되고 있는 것이다.

대체로 畵와 공통되는 畵를 文人들이 自己 修養의 하나로 從事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이름이 붙여진 文人畵의 始初는 王維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그는 自嘲詩에서 "지금 이 못난 詩人,前生에는 畵家였겠지. 제 버릇 버릴 수 없어, 우연히 남에게 알리어졌네." 라 했고, 宋代畵家 趙令穣도 王維에 대해 "詩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속에 詩가 있네”고 하여 詩畵一致의 思想을 엿보게 한다. 일찍이 三國時代 지식인들이 隱遁的 老莊思想에 立脚, 脫俗하여 絵畵를 自娛의 수단으로 이용한 것에서 詩·書·畵 一致 思想이 東洋藝術의 根幹을 이루고 있음은 周知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文人畵는 絵畵의 前提條件으로 高度의 학문수련을 요구하게 되고 그 작품은 全人格의 投影物이며 한 점의 俗氣나 習氣가 용납되지 않았던 것이다.


文人畵의 始祖들이 輩出되기는 北宋時代에 이르러서인 데 墨竹의 文同, 山水의 米芾, 墨梅의 釋仲仁, 墨蘭의 鄭思肖가 그들이다. 그들은 비바람, 눈서리 등 自然의 重壓에도 꿋꿋이 견디어 내는 松·竹·梅·蘭·枯木·巖石 등 脫俗傲然한 것을 통해 胸中逸氣를 吐露했던 것이다. 이 때에 이미 竹·梅는 霜雪에 굽히지 않는 清節과 芳香으로 雙淸이라 했고 芳香을 吐해내는 蘭을 합쳐 三清이라 하였으며 嚴冬雪寒을 이겨내는 松·竹·梅의 굳은 꽃을 한데 묶어 歲寒三友라 하여 畵題에 올랐다. 明末과 清初에 菊花의 傲霜孤節을 높이 평가하여 三清에 가담시킴으로써 四君子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沈心友가 <青在堂畵菊淺說>에서 蘭은 楚나라 屈原이 <離騷>에서 그 幽香을 찬양하고 竹은 衛의 武公이 <詩経>,<衛風>에서 그 淸節을 기렸고, 梅는 宋의 林逋가 孤山에서 얼어 핀 꽃술을 玩賞하고, 菊은 晋의 陶淵明이 栗里에서 그 晩香을 즐기었는데 이들 四君子가 사랑한 네가지는 모두 草木 중에서 우뚝 솟아나 俗氣를 끊어버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文人畵는 士大夫(文人)들이 政治一線의 主導的 담당자로 등장한 高麗前期부터 시작되는데 金富軾의 墨竹과 鄭知常의 墨梅가 뛰어났다는 記錄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朝鮮初期에는 世宗,文宗,安平大君의 3父子와 姜碩德과 그 아들 希顔, 希孟 3父子에 의해 朝鮮文人畵의 序章이 열린다. 蘭은 世宗에 의해 시작되었고, 宣祖의 墨蘭은 文氣가 넘치고, 李霆의 墨竹은 朝鮮朝를 통해 他의 追徒을 不許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中期에는 李霆의 墨竹, 魚夢龍의 墨梅, 黃執中의 포도를 士大夫 그림의 三絶이라 일컬었으니 여기서 朝鮮 固有文人畵風의 成立을 보게된다. 또한 이 時期에는 墨梅가 집중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後期에는 柳德章, 李麟祥,姜世晃 등이 나와 朝鮮 固有의 文人畵 傳統을 이어가나 清으로 부터<芥子園畵譜> 등이 들어와 梅·蘭·菊·竹 四君子의 이름이 文人畵의 畵題로 등장하여 우리 文人畵史上일대 轉換이 일어난다. 그리고 中期의 墨梅 대신 墨蘭이 流行함으로써 柳熙元,申緯 등이 蘭竹으로 名聲을 떨치고 金正喜에 이르면 거의 蘭만을 그리게 된다.

이상으로 文人畵의 意味, 四君子의 源流, 그리고 韓國文人畵를 歷史的으로 간략하게 살펴본 것은 肯石의 藝術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함이었으나 여기서는 다만 수집된 작품들에 나타난 畵法과 畵題를 통한 그의 藝術과 人間을 考察해 보는 데 그치고자 한다. 수집된 백여점 가운데서 墨竹이 숫적으로 절대 우세하며 器血折枝 또한 그에 못지않다. 그리고 몇 점의 글씨와 怪石이 나머지이다.

大邱 富豪 徐佑淳이 그를 사위로 맞아들인 점이나 畵題에서 보이는 글귀로 보아 肯石의 家門은 韓末의 착실한 儒家이며 예의 書堂에서 漢學을 공부했으리라 추측된다. 언제부터인가는 알 수 없으나 鄕土의 書藝 巨峰 石齋 徐丙五(1862∼1935)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그의 筆法氣風을 追從하여하였다. 특히 1901年을 前後하여 石齋와 同行하여 中國의 威海, 蘇洲, 南京 等地로 周遊하면서 그 곳 當代의 碩學 名筆인 吳昌碩, 蒲作英, 齊白石 등과 交遊하면서 大陸의 藝術을 몸소 익혔다. 1920年에 石齋를 중심으로 京鄕各地의 다수 書畵同好人이 모여 嶠南書畫會를 勃起했는데 肯石도 이 會를 통해 畫業에 精進하는 한편 作品도 발표하였다.
 
竹畵는 四君子 중에서 가장 먼저 발달하였고 또 이론적인 著書도 많아 竹은 代表格으로 文人들의 사랑을 받았다. 直剛淳厚한 성격의 肯石은 竹을 즐겨 그렸으며 그의 墨竹은 石齋의 畵法을 追從하여 淸朝風의 範疇를 크게 벗어나지는 못한다. 石齋의 竹이 外方向의 雄渾한 맛을 보여준다면 긍석의 그것은 堅固하며 멋부림이 없는 儉素한 맛을 주는 것이 다른 점이다. 대체로 그의 竹幹은 交幹보다 直曲幹으로 한 것이 많은데 이는 後者가 前者보다 簡潔하고 날씬하여
剛正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매우 시원스럽고 生氣가 있다. 左右生枝는 均衡을 잡으며 堅強하고 圓熟하여 生意가 엿 보인다. 葉은 疊个技法을 많이 사용하여 柔和로워 보이나 다소 무거운 感을 준다. 節은 点節 내지 銀鉤의 技法으로 点墨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그의 墨竹法은 畵竹之法 幹如篆 枝如草 葉知眞 節如隸 所謂書畫一法이라고 한 明 王紱의 畵竹理論과 합당하다 하겠다. 文人畵의 生命은 形似에 있지 않고 神似에 있으며 神似의 境地에 도달하려면 아무래도 文字香 書卷氣가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肯石 또한 항시 形似에 치우칠까 自戒하고 있었으니 그의 墨竹畵題에 이런 글귀가 있다.

寫竹如書法不可強求 形似只要神韻自在

대나무를 그림이 書法과 같아서 억지로 모양을 닮게 요구할 수 없으며, 다만 神과 통하는 韻致가 스스로 마음대로 되는 것을 要締로 할 뿐이다.
肯石의 初期 器皿折枝는 거친 線과 椎拙한 形態들로 인해 面面은 다소 難澁한 면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中年에 이르면서 이러한 難澁 椎拙性은 精濾되어 線은 渴筆에 의해 堅固 簡潔해지며 形態는 簡素한 가운데 意味를 풍부히 하면서 面面은 格을 갖게 된다. 晚年에는 形態와 濃淡에 拘碍됨이 없이 물질은 멀고 마음이 중요하다는 逸意의 境地에 이른다. 또한 그는 글씨, 특히 行書에 能했다고 전해지나 작품이 稀貴하여 잘 알 수 없으나 현재 桐華寺 入口 右則 大自然岩으로 되어 있는 寺蹟碑文에 그 筆跡을 더듬어 볼 수 있다. 藝術의 才質과 清雅, 剛直한 성품에 感動된 石齋는 자기 号에서 石를 따서 肯石이라 雅号를 주며 항상 친구처럼 더 가까이 옆에 두고자 했다. 肯石이 돌을 많이 그리고 遺作에도 石竹이 많이 보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고 한다. 鄭思肖가 국토를 빼앗긴 울분으로 흙 잃은 露根蘭을 사랑하여 墨蘭의 始祖가 되었듯 긍석은 書畵에 精進하면서도 精神을 중히 여겼으니 四君子로 亡國의 설움을 달래고 傲霜孤節의 情神을 배워 몸소 실천한 사람이다. 평생을 두고 바라던 祖國光復의 기쁨을 맞지 못하고 보다 完熟된 文人畵의 世界를 펼치지 못한 채, 서리 맞은 뒤 푸른 소나무의 孤節과 달빛 속 솔바람 소리의 淸雅함으로 살다가 세상을 떠났으니 그가 남긴 글 속에서나 그를 기억하리라.

玉錚珠顆碧山味不尋常
為警迷塵夢古鍾亦在床

玉그릇의 구슬같은 과일은 山中의 맛이 심상치 않고,
昏迷한 塵世의 꿈을 깨우치기 위하여 鍾도 또한 바닥에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