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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齋 서병오 .28] 석재의 대표적 제자, 김진만과 서동균 / 영남일보 2013.01.01
관리자 | 조회 233
[石齋 서병오 .28] 석재의 대표적 제자, 김진만과 서동균


김진만의 자질과 인품에 반해 아호 지어주고 ‘벗’으로 여겨
서동균에겐 자신이 죽은 뒤 관 덮을 명정 써달라는 유언 남겨


긍석 김진만의 지조와 강직한 성품을 엿볼 수 있는 작품‘묵죽’(왼쪽)과 ‘기명절지’.

석재 서병오는 팔능거사(八能居士)로 불렸던 만큼 분야마다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그중 서화의 대표적 제자로는 긍석(肯石) 김진만(1876∼1934·음력으로는 1933년 11월12일 사망)과 죽농(竹農) 서동균(1902∼1978)이 꼽힌다.

석재는 긍석의 예술에 대한 자질과 인품에 반해 자신의 호에서 ‘석(石)’자를 가져와 ‘긍석’이라는 아호를 특별히 지어주었으며, 화제를 통해 그를 ‘벗(友)’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죽농은 석재가 임종을 앞두고 자신의 관을 덮을 명정(銘旌)을 써달라는 유언을 남긴 제자다. 그리고 석재가 창립해 이끌어오던 교남시서화연구회를 물려받아 운영했다. 죽농이라는 호도 물론 석재가 지어주었다.

석재의 제자인 우송(又松) 신대식(1918∼85)은 자신이 엮은 책 ‘석재 서병오’에서 긍석에 대해 ‘석재선생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을 뿐만 아니라 실로 석재 선생의 수제자로서 문기 넘치는 탁월한 서화가였다. 석재 선생보다는 10여세 연하이고, 석재 선생 댁에는 매일같이 왕래하였으며, 선생의 애호를 많이 받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석재가 각별하게 대했던 애국지사 김진만

학식과 서화는 물론 인품도 훌륭한 데다 독립투사이기도 했던 긍석을 석재는 각별하게 여기고 대했던 것 같다. 긍석이 석재보다 먼저 별세하자 석재는 추모 시(輓肯石鎭萬)를 통해 긍석에 대해 각별한 감회를 드러냈다.

‘옛날 그대와 함께 만리 길 간 것 생각하네(憶昔同君萬里行)/ 초나라와 오나라 산하 이리저리 다녔지(楚山吳水路縱橫)/ 위해(威海) 뱃머리에서 이별하던 일 기억하는가(奇曾威海船頭別)/ 눈물 어린 눈에서 가고 멈춘 정을 보았지(淚眼相看去住情)// 마음 따라 붓 한 자루 휘두르니(隨意揮來筆一枝)/ 동파의 서체요 사정의 시로다(東坡書體士亭詩)/ 그대 옥과 같고 삼절을 겸했으니(其人如玉兼三絶)/ 글씨 쓰는 이 헤아려 봐도 누가 다시 있는가(歷數臨池更有誰)// 난초와 계수나무 꺾인 소식 차마 못 듣겠네(蘭桂折不堪聞)/ 인간의 모든 일 뜬구름 되었구나(萬事人間盡化雲)/ 슬프다 영혼마저 부를 길 없는데( 靈魂招不得)/ 옛산에 낙엽만 비오듯 하네(舊山黃葉雨紛紛).’

1876년 8월 대구에서 태어난 긍석은 부유한 집안에서 한학과 서화를 배우면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긍석은 석재의 두 차례에 걸친 중국 주유를 모두 함께했다. 1차 주유(1898∼1902) 때 상하이(上海), 쑤저우(蘇州) 등을 석재와 함께 주유하며 여러 유명 예술인과 정치인 등을 만나 교유했고, 2차 주유 때(1908∼11)도 석재를 수행해 상하이와 칭다오(靑島) 등을 돌며 포화, 손문, 제백석 등 많은 현지 인사들과 교유했다. 두 차례에 걸친 중국 주유는 긍석의 작품세계에도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긍석은 1915년 대한광복회에 가입,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일제강점기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광복회(1915∼18)는 독립군 양성을 목적으로 군자금 모집과 무기 구입에 역점을 두고, 친일부호 처단 등도 당면과제로 삼았다. 경북 풍기에서 발족된 광복단과 대구의 조선국권회복단 일부 인사가 모여 1915년 7월 대구에서 결성했다. 총사령은 박상진이 맡았다.

그는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1916년 8월 총사령으로부터 받은 권총을 휴대하고 김진우, 정운일, 최병규 등과 대구 부호 서우순(긍석의 장인)의 집에 숨어들었다. 그러나 서우순이 비명을 지르고 그의 집사가 달려와 격투가 벌어지면서, 긍석의 동생 김진우가 권총을 발사하고 도망을 가게 되었다. 일행은 일단 탈출했으나 곧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유명한 ‘대구권총사건’이다.

긍석은 1917년 이 사건의 주모자로 10년 징역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뒤 1930년 출옥했다. 긍석은 출옥 후에도 석재의 사랑채를 드나들며 교남시서화연구회를 꾸려갔다. 1931년에는 팔공산 동화사 사적비 글씨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1934년 초 대구 자택에서 석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긍석은 오랜 기간 독립운동과 옥중생활을 했기 때문에 서화에 전념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남아있는 작품도 석재나 죽농에 비해 적다.

그가 남긴 작품은 기명절지(器皿折枝)와 묵죽 작품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기명절지 작품은 구도 감각과 묘사력이 요구되는 분야로, 긍석의 작품을 보면 그가 남다른 회화적 소질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묵죽을 비롯한 사군자 작품에는 석재의 서풍과 함께 중국 상하이의 해상화파(海上畵派) 영향이 드러난다. 묵란은 민영익, 묵매는 오창석, 묵죽은 포화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석재와 함께한 중국 주유를 통해 접한 해상화파의 영향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서법에는 두 가지 도가 있으니 하나는 그 형상을 모방하는 것이고, 하나는 정신을 그리는 것이다. 모방은 쉬우나 정신을 그리기는 어렵다(書法二道 一是模其形者也 一是寫其神者也 模也易寫神難).’

긍석이 작품 화제를 통해 드러낸 서화관이다. 긍석은 이처럼 석재와 마찬가지로 문인화에서 형상의 모방이 아니라 정신을 강조했다. 이런 서화관은 영남문인화 형성의 핵심이 된다.

긍석의 묵죽은 특히 그의 성품을 드러내듯 강직하고 기교를 찾아볼 수 없는 필법을 보여준다.

긍석에 대한 조명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 가운데, 맥향화랑이 1980년에 ‘긍석 김진만 유작전’을 열면서 ‘긍석 김진만 서화집’을 남긴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 도록에는 그의 작품 52점과 함께 한자 화제를 정리해 담고 있다.



◆석재의 교남시서화연구회 물려받은 서동균

죽농은 1902년 대구에서 출생,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는 조부로부터 어릴 때(1908년)부터 천자문을 배우고, 서예도 함께 배웠다. 조부는 임종 전에 죽농에게 서예 체본을 써주기도 했다. 조부 별세(1911년) 후 죽농 부친은 당시 대표적 유학자인 김만취(金晩翠)를 스승으로 모셔 죽농에게 소학, 논어, 맹자, 대학, 중용 등을 배우게 했다. 15세 때(1916년) 서병주가 개설한 강습소에서 신학문을 배운 뒤 이듬해 해성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해 공부하며 서동진, 이효상, 백기만 등과 교우관계를 맺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일본 헌병에게 체포돼 투옥, 6개월 만에 출감할 수 있었다.

그후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대표적 화가 문하에서 1년 동안 서화를 연마했다. 훗날 죽농의 문인화에서 살펴볼 수 있는 남다른 회화성과 소묘기량은 이때의 학습효과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죽농의 본격적인 문인화 공부는 석재의 문하에 입문하면서부터 이뤄졌다. 석재는 1920년 의성군수 관사에 걸려있던 죽농의 15세 때 서예작품을 보고는 대구로 돌아와 그를 불러 만나본 뒤 제자로 삼고 ‘죽농(竹農)’이라는 아호도 지어주었다. 석재는 당시 자신의 글씨 및 그림 몇 작품과 안진경서첩 한 권을 주며 “자네가 이 서첩을 백 번 쓰면 겨우 글자 흉내만 낼 것이고, 천 번을 쓰면 글씨 잘 쓴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며, 만 번을 쓴다면 틀림없이 명필이라는 소릴 들을 걸세”라며 열심히 노력할 것을 당부했다. 죽농은 5년 동안 5천번을 썼다고 한다.

석재 문하에서 서화에 매진한 죽농은 조선미술전람회에 사군자를 출품, 연속 8회 입선하기도 했다. 석재 별세 후 교남시서화연구회를 맡아 서화활동을 펼치고 1938년에 2차로 일본에 건너가 오사카에 2년 동안 머물다 귀국했다. 해방 후에는 경북여고와 신명여고 교사로 재직했고, 교남시서화연구회는 영남서화회로 개칭한 뒤 ‘영남서화원’ 간판을 내걸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왕성한 작품활동을 했다.

죽농은 임종 직전, 자신의 작품 700여점 중 스스로 남겨도 될 만한 작품으로 생각한 50여점을 골라내고 나머지는 모두 불살라 버렸다.

죽농은 학습기에는 석재의 영향을 받아 농묵의 필법을 구사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화단의 대가로부터 세밀한 필법과 맑은 묵법으로 대상을 표현하는 기법 및 화면 구성법을 습득했다. 이런 기법들은 그의 문인화에 회화성을 불어넣는 특성으로 작용하게 된다.

스승인 석재의 문인화 작품이 서예적인 데 비해, 이런 죽농의 문인화는 작품을 회화적으로 확대·심화시키고 있다. 농담 변화와 풍부한 색으로 대상의 입체감을 표현하고, 구도를 화면 전체로 확대하면서 풍부한 회화성을 지니게 하고 있다는 평을 듣는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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