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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의 투옥, 그리고 화은(畵隱)의 삶 _ 긍석 김진만 / 이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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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의 투옥, 그리고 화은(畵隱)의 삶 _ 긍석 김진만
 
긍석(肯石) 김진만(金鎭萬, 1876~1933)은 근대기 대구 서화계의 주요 작가로 <팔공산 동화사적비>(1931)를 비롯한 서예와 사군자, 괴석, 화훼, 기명절지 등의 그림을 남긴 문인화가이다. 또한 김진만은 독립군 군자금 마련을 위해 1916년 동생 김진우(1881~?)를 포함해 광복단 단원들과 벌였던 ‘대구 권총 사건’ 주모자인 독립운동가이다. 김진만은 이 사건으로 10년 형을 선고받아 대구형무소에서 8년 4개월 감옥살이를 했다. 김진만 일가는 동생 뿐 아니라 아들들도 항일 투쟁을 했던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김진만에게 ‘건국훈장 국민장’(1977)이 추서되었다. 김진만이 출옥 후 화은(畵隱)의 삶을 살게 된 것은 근대기 대구의 대표적 서화가인 석재 서병오(1862~1936)의 먼 조카사위(姪壻)로서 그와 매우 친밀하게 지냈기 때문이다. 서병오는 김진만이 58세의 길지 않은 생애로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뜨자 만시(輓詩)에서 옥(玉)과 같은 인품에 삼절을 겸했다고 하여 시서화를 모두 인정했다. 김진만은 기명절지화에 뛰어나 자신의 화풍을 이루었고 근현대기 대구화단 기명절지화의 전개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80년 유작전이 열려 간략한 서화집이 발간되었다. 2015년 1월 ‘경북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양되었으며, 2017년 대구를 대표하는 ‘근현대 문화예술인물 12인’에 선정되었다.
 
1. 독립운동가 김진만
 
  김진만은 분성 김씨로 대구에서 김재양(金在穰)과 전주이씨 춘옥(春玉)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나 대구부 남산정 668-7번지에 살았다. 김진만이 태어난 1876년(고종13)은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일본과 맺게 됨으로서 개항장이 설치되고 일본인 상인들의 상륙과 더불어 제국주의 일본의 경제적 침투가 시작된 해이다. 1888년 13세 때 4년 연상인 서우순(徐佑淳)의 장녀 서복(徐福)과 결혼하여 이듬해 장남 영조(永祚)가 출생했고 이후 영우(永祐), 영기(永祺), 영정(永禎)의 4남과 필순(畢順), 분조(粉祚), 순분(順分)의 3녀를 두었다. 장인 서우순은 대구의 이름난 부호였다.
  33세 때인 1908년 겨울 서병오와 함께 중국 여행을 떠났던 것을 보면 가산이 넉넉했던 것 같다. 이 때 서병오는 상해에서 민영익(1860〜1914), 포화(1830〜1911) 등과 교유했는데 김진만도 이러한 일정을 함께 했을 것이다. 이듬해 가을 김진만은 웨이하이웨이(威海衛)에서 서병오와 헤어져 먼저 귀국했다. 이 중국 여행은 서병오가 남긴 화제 글과 시를 통해 김진만이 동행했음을 알 수 있을 뿐 김진만 자신의 언급은 찾기 어렵다. 다만 작품 속에 쓴 ‘해산유자(海山遊子)’라는 별호가 중국 여행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약 1년간의 중국 여행은 김진만에게 서세동점의 시국에 대한 인식과 중국의 서화에 대한 견식을 갖는 경험이 되었을 것이다.
  김진만의 생애에서 가장 주목되는 일은 41세 때인 1916년 8월 15일(음력) ‘대구 권총 사건’ 주모자로 일경에 체포된 일이다. 이 사건은 김진만, 김진우 등이 김진만의 장인 서우순의 집에 침입하여 권총으로 위협하며 독립군 군자금을 모금하려 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권총을 발사한 동생 김진우는 징역 12년을, 김진만은 징역 10년을 대구복심법원에서 선고받았다. 일제가 작성한 『고등경찰요사』에 이 사건은 박상진(1884~1921)의 칠곡 부호 장승원 살해사건과 함께 광복단 사건으로 분류되어 있다. 김진우가 소지했던 권총의 출처가 박상진이기 때문이다. 박상진도 이 사건으로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박상진은 선산의 의병장 왕산(旺山) 허위(1855∼1908)의 제자로 1915년 1월 대구에서 조선국권회복단을 결성한 대한광복회 총사령이다.
 

  김진만은 형 변경으로 8년 4개월을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고 1924년 가출옥했다(『시대일보』1924. 6. 26). 이 사건은 일제 강점 하에서 적극적 저항을 택했던 김진만의 삶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김진만의 아들 영조, 영우, 영기 등도 항일 투쟁에 적극 참여 했고 이로 인해 김진만은 세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다. 김진만과 김진우에게 건국훈장 국민장이, 김영우(1895~1926)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김영우의 장남 김일식(1912~1953) 또한 사회운동과 학생운동을 통해 민족운동을 이어갔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옥바라지를 하며 할아버지 형제와 아버지 형제의 항일독립운동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기 때문이다. 김진만가는 김영우, 김일식 3대로 이어진 독립운동, 민족운동 집안이다.
  이상으로 보면 김진만은 10대에 결혼하여 4남 3녀를 두었고, 30대에 서병오와 함께 중국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다. 독립운동으로 인해 40대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냈으며, 동생과 세 아들 또한 일제에 저항한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사진으로 본 김진만은 넓은 이마와 갸름한 얼굴형의 단아한 모습이다. 짧은 머리는 기름을 발라 넘겼고, 카이저수염을 다듬었으며, 천으로 동정을 대고 고름 대신 단추로 여민 개량식 두루마기 차림이다. 콧수염을 팔(八)자 모양으로 다듬어 양쪽 끝을 비벼 올린 카이저수염은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수염 모양에서 유래되어 뜻이 크고 자존심이 강한 성격을 상징한다. “독립지사인 신채호와 김좌진은 평생 카이저수염을 하여 자신들의 꿋꿋한 독립의지를 드러냈다. 이 시기에 카이저수염은 지사의 상징이 되었다.”고 한다(이이화, 『한국사이야기』, 한길사, 2004). 김진만 또한 자신의 꿋꿋한 저항의지를 카이저수염으로 나타낸 것이다.
 


2. 화은(畫隱): 그림에 숨은 삶의 한 방식
 
  40대를 감옥에서 보낸 김진만이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린 시기는 1924년 49세로 출옥하여 1933년 58세로 타계하기까지 10여 년 간으로 여겨진다. ‘대구 권총 사건’ 이전인 30대는 계몽운동과 항일활동에 참여했다. 김진만은 1908년 9월 조직된 달성친목회에 참여했다. 달성친목회는 대구를 중심으로 청년들을 규합하여 교육과 실업을 장려하는 계몽운동단체를 표방했으나 실제로는 비밀리에 국권회복을 위한 배일사상을 고취했다. 김진만은 대구출신의 청년지사 서상일, 윤창기, 정운일, 서창규, 이시영 등과 함께 활동했다. 1915년 서상일을 중심으로 달성친목회 회원들이 국권회복을 목표로 조선국권회복단을 결성했고, 같은 해 7월 박상진 등이 풍기의 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을 통합하여 광복회를 결성했다. 조선국권회복단과 광복회는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의 독립운동기지건설을 지원하고 독립군을 양성함으로써 무력투쟁을 통해 독립을 달성하고자 했다.
  김진만이 출옥 후 뒤늦게 서화가의 길로 들어섰음은 서병오가 1932년 열었던 휘호회 안내장에 제자를 ‘배효원ㆍ서동균ㆍ김진만’의 순서로 들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다. 당시 이들의 나이는 35세, 31세, 57세로 김진만이 가장 많음에도 마지막으로 언급한 것은 입문한 순서에 따른 것이라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서동균은 1920년 경 자신이 서병오의 문하에 입문하니 배효원이 먼저 배우고 있었다고 했고(『매일신문』1974. 8. 14), 김진만은 이때 투옥 중이었다. 제작 날짜가 확인되는 김진만의 작품이 드문 가운데 가장 이른 기년작이 1927년인 점도 그가 출옥 후 사회활동 대신 서화에 몰두했다고 여겨지는 한 이유이다.
  김진만의 서예와 그림은 『긍석 김진만 서화집』에 52건 157점이 실려 있고, 연관되는 전시 관련 도록이나 개인 소장품 등 필자가 파악한 김진만의 작품은 300여점이 넘는다. 그런데 김진만은 대부분의 그림에 일관되게 제화시와 ‘긍석’이라는 아호, 인장만 있을 뿐 다른 내용을 그림에 남기지 않았다. 문인화는 대부분의 경우 제화시와 함께 언제 그렸다든지, 어디서 그리게 되었다든지, 어떤 계기로 그렸다든지, 그릴 때의 심정이라든지, 누구에게 그려준다든지 하는 그림과 연관되는 사정을 함께 써넣게 마련이다. 서예 작품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김진만은 이러한 부가적 정보를 일체 기록하지 않았다. 언제 그렸다는 날짜조차 거의 남기지 않아 300여 점 중 자신이 날짜를 쓴 예는 2점에 불과하다.
  김진만이 자신과 관련된 사적인 기록은 물론, 제작한 날짜조차 남기지 않은 것은 의도적인 둔세(遁世) 의식에서 비롯된 은둔의 태도를 보여준다고 파악된다. 그는 일제에 적극 저항하여 긴 감옥 생활을 겪었고, 자신의 세 아들을 먼저 보내야했다. 옥고를 겪고, 자식들을 떠나보낸 후에도 여전히 일제치하에서 살아야했던 김진만은 세상과의 단절을 택하고 의도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모든 것을 버리고 산 속으로 들어가 은거할 수는 없는 처지에서 사회 안에서 살면서도 자신을 세상과 격리시키는 ‘은(隱)’을 실천하려 한 것은 동아시아에서 오랜 역사 시기를 거치며 이어져 온 삶의 한 태도이다. 당나라 시인 백낙천은 세상을 버리고 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소은(小隱)일 뿐이며 조정의 높은 벼슬을 지내며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속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야말로 대은(大隱)이라고 했다. 옛사람들이 시은(市隱), 조은(朝隱), 관은(官隱) 등의 말로서 세상 속에 살면서도, 조정의 벼슬을 지내면서도, 관직에 몸담으면서도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를 지켰듯 김진만은 화은(畵隱)을 통해 세상과의 불화를 견디려 했다. 김진만은 집안의 가산을 모두 독립운동을 위해 썼으며 그가 그림을 그렸던 것은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 모금을 위해서였다고 한다.
 
3. 김진만의 서예와 사군자화
 
  김진만은 “당시 석재선생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을 뿐만 아니라 실로 석재선생의 수제자로서 문기 넘치는 탁월한 서화가 … 석재 선생 댁에는 매일같이 왕래했으며 선생의 애호를 많이 받았”고, “출옥한 후에도 석재선생 댁을 빈번하게 출입했으며 선생과의 친교가 대단”했다는 증언이 있을 정도로 서병오와 친밀했다(신대식 편저, 『석재 서병오』). 1932년 서병오가 남중섭(1873~1950), 김규진(1868~1933) 등과 합작한 8폭 병풍에 김진만의 <국석도>가 한 폭으로 들어가 있어 서병오가 서화가들과 교류하는 자리에 참석하기도 한 것을 알 수 있다. 서병오 이외에는 대구의 산수화가인 허섭(1878~1934)의 산수화에 화제를 쓴 것이 여러 점 있어 허섭과의 교유를 알 수 있다. 이 외에 서화가들과의 교류는 잘 찾아지지 않는다. 허섭이 작고한 이듬해인 1934년 열린 대구의 양화 단체 ‘향토회’ 제5회 전람회에 서병오, 서동균, 허섭 등과 함께 김진만의 작품이 찬조 출품된 것은 그가 대구화단의 중요 인물이었음을 알려준다.
 


  김진만은 글씨도 잘 썼으나 서예 작품을 많이 남기지는 않았다. 서병오, 박기돈 등 쟁쟁한 서예가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글씨에 능한 한묵 계층이 많았던 대구였으므로 그림에 치중했을 것이다. 김진만은 왕희지풍 해서를 많이 쓴 것으로 여겨진다. 화제의 행서를 보면 행간과 자간을 가지런하게 맞추면서도 농담과 태세를 살려 변화를 준 자연스러운 서풍을 보여준다. <팔공산 동화사적비>는 왕희지 풍으로 단정하면서도 부드럽게 쓴 해서로 작고하기 2년 전인 56세 때 글씨이다. 본문은 매우 잔 글씨이고 양쪽에 세운 돌 말뚝 사면에 4자씩 좀 더 크게 쓴 글씨 중, 자비의 눈으로 중생을 보살핀다는 ‘자안시중(慈眼視衆)’은 『묘법연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에 나온다. 기명절지 그림 중에 그려진 책의 제목을 ‘화엄경’으로 써넣은 예도 있어 친 불교적 성향을 가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진만은 사군자 뿐 아니라 수묵의 사의(寫意) 화풍으로 화훼, 괴석, 기명절지 등 다양한 그림을 그렸다. 병풍이 많아 대작을 주로 한 것도 한 특징이다. 기명절지화 중에는 선명한 색채의 서양 물감을 부분적으로 사용한 예도 보여 다양한 시도를 하며 자신의 화풍을 이루어간 것을 알 수 있다. <화훼십폭병풍>은 사군자, 괴석, 모란, 파초, 계수나무, 오동나무 등 군자화목(君子花木)을 그린 것이다. 다루고 있는 소재나 표현 방법, 필묵법 등에서 서병오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좁고 긴 화폭에 두세 번 크게 굴곡지며 힘차게 뻗은 묵매의 운필이나, 길쭉하게 높이 솟은 괴석, 모란의 짙은 먹색, 석란의 구도와 난잎의 표현, 파초의 간결하고 단순한 서예적 필치 등이 서병오의 영향을 받은 점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먹색이 부드러우며 필치가 안정되고 침착한 김진만 고유의 개성이 드러나고 있다.
 
4. 기명절지화, 전환기의 그림
 
  김진만이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잘 그렸던 기명절지화는 한국근대회화사에서 의미가 큰 그림이다. 김진만의 기명절지화는 당시 서울화단 기명절지화와 차별되는 대구화단 고유의 화풍을 이룬 점에 있어서나 근현대기 대구 사군자화가들이 기명절지화를 겸하여 그리며 대구화단 고유의 특징을 전개시켰던 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기명절지화는 조선 말기 장승업(1843~1897)에 의해 탄생하여 근대기에 일시적으로 유행한 그림이다. 값비싼 중국 고대 청동기인 기명(器皿)과 상서로운 꽃과 열매 등 절지(折枝)의 조합이 특징적이어서 기명절지화로 불리게 되었지만 이밖에도 문구류를 비롯해 무척 많은 물건이 등장한다. 기명절지화의 소재, 구도, 표현 기법, 화면 분위기 등을 잘 보여주는 그림이 장승업의 <백물도(百物圖)>이다.
 

  ‘온갖 물건(百物) 그림’이라는 제목처럼 고동기(古銅器)류와 국화, 백모란, 백목련, 보라색 벌개미취, 불수감, 구근까지 그린 수선화 등 절지류, 배, 밤, 토란, 연밥, 가지, 무 등 과일과 채소류, 게와 조개 등 어해류를 비롯해 수석과 인삼, 주전자도 그려졌다. 고식(古式)의 연적인 수중승(水中承)과 벼루가 화면 중심부에 그려져 있어 이 물건들이 놓인 장소가 지식인 남성의 서재, 곧 문방(文房)임을 알 수 있다.
  문방을 상상의 장소로 하여 그려진 온갖 물건들은 지식계층의 문아(文雅)함을 나타내는 것도 있고, 수석과 인삼 등 장수와 건강을 상징하는 통속(通俗)적인 것도 있다. 고동기, 국화, 게, 벼루 등은 양면적으로 해석되는 물건들이다. 고동기는 금석학의 연구 자료이면서 아무나 소유할 수 없는 값비싼 수입 골동품이다. 국화는 오상고절(傲霜孤節)의 군자 식물이면서 동시에 기국연년(杞菊延年)의 장수화(長壽花)이기도 하다. 게는 횡행(橫行)의 오기와 자존 등 문화적 상징이 있지만 한편 맛있는 안주거리이다. 수중승과 벼루 또한 서재에 꼭 필요한 문방용품이면서 수집과 감상의 대상인 사치품이기도 하다. 위계적 질서가 엄중한 시대였다면 역사를 증거 하는 고대 문물인 고동기와 흔한 무가 같은 비중으로 한 화면에 그려질 수 없었을 것이다. <백물도>는 문아와 통속이 격의 없이 뒤섞였으며, 장수와 구복, 일상적 삶의 향유라는 가치가 혼재하는 그림이다. 기명절지화는 전통시대의 문인 취향에 바탕 하면서 이러한 정서를 일상적인 향유로 다루고, 기복의 욕망 또한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는 독특한 성격의 그림이다.
  기명절지화는 많은 소재들이 등장하는 복합적 그림이다. 그만큼 연관되는 그림들도 많다. 조선 후기 이래 운치 있는 문방 생활의 한 요소로 유행한 고동서화 애호 풍조가 낳은 문방도, 책가도 등과도 통하고 청나라의 박고도(博古圖), 세조도(歲朝圖), 청공도(淸供圖), 병화도(甁花圖) 등과도 연관되는 국제적 성격의 그림이다. 장승업이 기명절지화를 그릴 수 있었던 직접적 이유는 중국어 역관인 오경석(1831~1879), 오경연(1841~?) 등 중인 계층의 후원을 받으며 다양한 중국 그림을 견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어 역관 중인들은 중국을 자주 왕래하며 청 말의 금석학과 서화고동을 애호하는 문화를 직접 접했고, 여기에 동참할 수 있는 식견을 갖추고 있었으며, 감상과 수집을 뒷받침할 경제력도 있었다. 기명절지화는 중국어 역관을 비롯해 문화적, 경제적 역량을 갖춘 새로운 엘리트인 중인 계층의 후원으로 탄생한 전환기의 그림이다. 지식계층의 문방 취향과 일상의 가치에 대한 옹호, 현실적 욕망이 혼재하는 다면성의 그림이기 때문이다.
 
5. 김진만의 기명절지화
 
김진만의 서화는 서병오와 친밀하게 교유하며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14년이나 나이 차가 있고 서병오의 화풍을 따르고 있는 점에서 제자 그룹에 속하지만 서병오는 작품 속에서 제자를 형(兄) 또는 군(君)이라고 한데 비해 김진만은 친구(友)로 호칭하고 있어 김진만을 서화 제자로만 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김진만은 유학 지식인으로서 시서화의 교양을 지닌 위에 서병오와 워낙 자주 만나고 서병오의 작품을 많이 접하다보니 서병오의 영향으로 서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김진만의 기명절지화 또한 서병오의 도상과 화풍을 배우는 것으로부터 시작했음을 이들의 <기명절지>작품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이 두 작품은 아래쪽에는 바구니에 갈대와 함께 담아 놓았던 게들 중 몇 마리가 바구니를 탈출하는 광경이며, 위쪽에는 탁자 위에 돌과 함께 심어 놓은 국화 분재를 그렸다. 그려진 도상이 일치할 뿐 아니라 세로가 긴 화면에 상단과 하단의 이단 구도로 그린 점, 발묵법이 두드러지는 서예적 필치와 소략한 묘사 등 화풍에 있어서도 김진만이 서병오를 배웠음을 알 수 있다. 국화를 먹선의 실국으로 표현했고, 바구니 아랫부분을 생략했으며, 바구니에서 거꾸로 떨어져 바닥에 배를 보이며 뒤집어져 있는 게 등 세부 표현 또한 일치한다. 탁자의 다리를 짧게 한 것 만 다르다. 김진만은 서병오의 기명절지화를 충실히 학습하며 배운 것이다.
  기명절지화는 장승업에 의해 1880년대에 처음 나타났고, 장승업을 사숙한 조석진(1853~1920)과 안중식(1861~1919)에 의해 계승되어 이들이 가르친 서화미술회의 소수 제자들에게 전수되었다. 기명절지화는 화보류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그림도 아니고, 산수나 사군자처럼 접하기 쉬운 그림도 아니다. 근대기에 기명절지화 작품을 실제로 볼 수 있는 기회란 무척 드물었을 것이다. 시각 자료 또한 흔치 않은 시대였다. 그런데 대구에서 기명절지화는 1910년대에 나타난다. 대구화단에서 현재 알려진 가장 이른 기명절지화는 1917년 서병오가 그린 것이다. 서병오는 두 차례 중국 여행을 통해 중국 그림에 견문이 많았고, 서울의 서화가, 소장가들과도 친분이 많았다. 근대기 기명절지화의 대표적 작가인 이도영(1884~1933)은 서병오와의 인연으로 대구를 찾아와 몇 달 간 머무르며 작품을 제작한 일도 있다. 서병오는 기명절지화의 화의(畵意)와 도상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므로 서울화단의 채색 공필(彩色工筆) 화풍 기명절지화를 자신의 수묵 사의(水墨寫意) 화풍으로 소화하여 그릴 수 있었던 것이다. 서병오는 기명절지화를 수묵 사의 화풍으로 대구화단에 소개했지만 많이 그리지 않았다. 반면 김진만은 짧은 작품 활동 기간임에도 근대기 대구화단 작가들 중 가장 많은 기명절지화를 남겼다.
  김진만의 <기명절지>2폭은 그가 자신의 독자적 화풍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오른쪽 화폭은 긴 다리를 곡선으로 우아하게 처리한 중국식 탁자, 지통(紙筒)에 꽂힌 붓과 약간 펼쳐진 두루마리, 벼루 위에 아직도 갈고 있는 듯 세워놓은 먹, 물구기(墨匙)가 걸쳐져 있는 수중승 등 탁자 위의 광경을 화면의 한 쪽 변을 중심으로 절단식으로 배치한 세련된 구성이다. 상단으로는 왼쪽 아래에서 시작한 매화가지가 뻗고 있으며, 하단에는 탁자 다리에 매단 물고기가 있어 구경거리를 풍성하게 배치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구성력의 안정된 화면을 보여준다. 탁자의 테두리, 물고기의 배 등에 약간의 담채를 가미하여 부드럽고 친근감 있는 화면을 이루었다. 이 그림은 서병오의 거칠고 다소 경직된 필묵 운용에 비해 부드러운 농담의 먹색과 담채를 활용해 기물의 실재감과 입체감을 살린 묘사력을 보여준다. 탁자다리의 아랫부분은 갈필을 구사함으로서 먹의 강약을 통해 자연스럽게 입체감을 나타낸 효과가 있다. 김진만은 과감한 묵법과 투박한 서예적 필치가 특징인 서병오풍 기명절지화를 배웠지만 사군자화와 유사한 필묵 사용에서 벗어나 기명절지화에 적합한 회화적 표현력과 구도 감각을 갖춘 자신의 화풍을 이루었음을 <기명절지>2폭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서병오가 대구화단에 소개한 기명절지화에 집중하여 김진만은 자신의 화풍을 이루었고, 사군자화 위주였던 1920~30년대 대구화단에서 가장 많은 기명절지화를 그려 대구화단에 정착시켰다. 근현대기 대구 문인화가들이 사군자를 위주로 하면서 기명절지화를 겸하였던 데에는 김진만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서병오의 서예적이고 분방한 필치에 비해 김진만은 필선을 서예적으로 운용하면서도 사의적 묘사성을 확보하여 자신의 문인화풍 기명절지화를 이루었다. 김진만의 화풍은 당시 서울의 정교하고 장식적인 화원화풍 기명절지화와 크게 다르다.
 
6. 서울과 대구, 다른 기명절지화
 
  기명절지화는 문인 문화의 문아함과 세속의 욕망이 혼재하는 그림이다. 장승업은 상충되는 이 두 가지 가치를 절묘하게 복합시켰다. 고동기와 채소는 위계 없이 한 화면에 그려졌고, 선택된 소재들은 순서와 가치 개념 없이 무작위하게 나열되어 중심 없는 구성을 이루고 있으며, 먹색을 주조로 하면서 다양한 담채를 부가하여 수묵과 채색의 절충을 이루었고, 격조 있는 선염의 몰골법과 정밀한 선묘법을 함께 사용하여 사의 화풍과 화원 화풍을 섞은 이중적 화풍을 구사했다. 소재 선택, 구도, 채색, 형태 묘사 등에서 장승업은 아속(雅俗)이 공존하는 문방을 표현했다. <백물도>의 문아함으로 수용될 수도, 부귀함으로 수용될 수도 있는 복합성은 기명절지화의 탄생 배경이 된 중인계층의 지식인이면서 한편 부유한 전문 직업인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반영한다.
  그러나 기명절지화는 근대기 화단으로 이어지면서 장승업이 이루었던 교묘한 절충과 복합의 균형은 깨어지고 서울에서는 부귀와 길상을 과시적으로 나타내는 채색 공필의 장식적인 화원화풍을 위주로 그려졌고, 반면 대구에서는 문인의 정서와 문방생활의 아취를 나타내면서 수묵 사의의 문인화풍으로 그려졌다. 장승업의 기명절지화에 복합되었던 아속의 두 가지 화의(畵意)는 근대기에 서울과 대구, 두 도시에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 것이다.
  서울화단 기명절지화는 장승업을 사숙한 조석진(1853~1920)과 안중식(1861~1919)에 의해 계승되었다. 이들은 깔끔하고 정돈된 붓질의 섬세한 필치, 산뜻하고 감각적인 색채미, 정확한 형태와 세밀한 세부묘사 등 정교한 필치를 구사한 격조 있는 장식미를 보여준다. 조석진과 안중식은 다양한 회화적 기량과 다채로운 구성으로 장승업의 도상을 답습하기도 하고 확장하기도 하면서 다수의 기명절지화를 남겼다.
  근대기 대구와 서울의 서로 다른 기명절지화 화풍을 김진만의 <기명절지>와 안중식의 <기명절지>를 나란히 놓고 보면 확연하게 알 수 있다. 안중식은 두 폭 모두에서 값비싼 중국산 골동품인 항아리, 사각 향로(方鼎), 고(觚) 등의 고동기가 화면의 중심을 이루며, 여기에 심어진 난초와 이름을 알 수 없는 꽃나무는 세필 구륵법으로 그려지며 화려한 색채로 칠해졌다. 절지류로 복숭아, 황모란, 백모란, 귤 등이 장수의 상징인 수석과 함께 그려졌다. 복숭아 또한 장수의 상징이며, 모란은 부귀를, 큰 귤(大橘, daji)은 같은 발음이 나는 대길(大吉, daji)을 의미한다. 완전한 채색화로서 수묵은 검은색으로만 사용될 뿐이다. 문방구류는 없다. 반면 김진만은 중국 고동기를 그리지 않았고 기명류로 수중승, 화분, 주전자 등이 보일 뿐이며, 절지류로 [그림입니다.] 소나무, 연꽃, 불수감, 나리꽃 등이 그려졌다. 『논어』에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也)”고 한 군자 식물인 소나무가 두 폭 모두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오른쪽 폭은 6권의 책과 두 과(顆)의 인장, 수증승 등 문방용품만이 소나무를 배경으로 탁자위에 그려졌고, 왼쪽 폭은 받침대 위에 놓인 소나무 분재, 나리꽃과 불수감, 주전자, 영지와 수석이 그려져 있다. 수묵화이며 두세 가지 색채만 연한 담채로 사용했을 뿐이다. 김진만의 기명절지화는 사군자를 비롯해 소나무, 계수나무, 비파, 연꽃 등 군자(君子) 화목(花木)이 많이 나타난다. 고동기를 비롯한 값비싼 기명이나 상서를 상징하는 과일과 채소 등의 비중은 약한 편이다. 이러한 소재 구성과 화풍은 다양한 종류의 중국 고대 청동기를 정확하게 묘사하고, 해음(諧音)의 길상적이고 기복적인 꽃과 과일, 채소 등이 많이 등장하는 서울지역 기명절지화와 차별된다.

  근대기 서울화단 기명절지화는 직업적인 전문화가층에 의해 소수의 당대 귀현(貴顯)을 수요자로 한 화려하고 장식적인 그림이다. 중국 고동기를 비롯한 값비싼 기명, 해음의 꽃과 과일, 채소 등 길상적 도상을 세밀하게 묘사한 장식적인 채색공필 화풍으로 그려졌다. 기명절지화의 대표작가인 안중식, 조석진, 이도영은 각각 1919년, 1920년, 1933년 작고했고, 서화미술회에 출입하며 학습기에 기명절지화를 그렸던 1세대 동양화 작가들이 각자 자신의 작품 세계를 이루게 되면서 기명절지화는 잘 그려지지 않게 되었다. 1930년대 이후 기명절지화는 모임을 기념하거나 새해나 경사를 축하하는 선물용 소품으로 간혹 그려졌을 뿐이다. 1930년대 초를 끝으로 서울화단에서 기명절지화는 생명력을 다한 것이다.
  그러나 대구화단에서 기명절지화는 1910년대에 나타나 이후 198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기명절지화는 서병오에 의해 서예적 필치를 위주로 하는 사군자화가들이 겸할 수 있는 화풍으로 소개되었고, 김진만에 의해 대구화단에 정착했다. 서병오, 김진만이 기명절지화를 겸하여 그렸던 선례와 그들이 남긴 기명절지화가 지역에서 유통되며 그림본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이후 많은 사군자화가들이 이를 따랐다. 근현대기 대구 문인화가들이 사군자화를 위주로 하면서 대부분 기명절지화를 겸했던 것은 그들 자신이 문방의 정취를 애호하는 정서를 지녔기 때문이며, 시서화를 향유하고 서재를 경영하는 한묵 계층이 많았던 대구의 지역적 분위기 속에서 이러한 작품이 수용되고 애호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명절지화는 사군자화 위주인 대구전통 화단의 단조로움을 보완하는 역할도 했다.
 
『긍석 김진만 서화집』, 맥향화랑, 1980.
이인숙, 「근대기 대구의 문인화가 긍석 김진만(肯石 金鎭萬, 1876~1933) 기명절지화 연구」, 『민족문화논총』52,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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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원순, 「긍석 김진만의 생애와 예술」,『긍석 김진만 서화집』, 맥향화랑,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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