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3    업데이트: 21-10-27 14:02

평론 언론

김정기의 작품을 보다 김수영 (영남일보 논설위원)
아트코리아 | 조회 354
마르셀 뒤샹의 ‘샘’을 시작으로 앤디 워홀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마릴린 먼로’, 피에르만초니의 ‘예술가의 똥’ 등을 거치면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 대세가 되는 시대가 됐다. 최근에는 이탈리아에서 살바토레 가라우가 실존하지 않는 투명예술작품 ‘로소노’를 선보여 주목받기도 했다. 100여 년 동안 미술 분야에서의 색다른 만들기 열풍은 좀처럼 사그라들 기미를 보이지 않으며 미술시장의 흔들리지 않는 맹주 역할을 해오고 있다. 육체의 땀방울이 만들어내는 노동력은 반짝이는 아이디어 속에서 좀처럼 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양상이다. 세상 전체가 화이트칼라 위주로 돌아가면서 정신노동자가 더 대접받는 시대이다 보니 그 흐름을 미술도 거역할 수 없으리라.

화가 김정기는 이런 측면에서 눈에 띈다. 점점 만드는 예술로 고도화되어가는 변화된 미술시장에서 꿋꿋하게 그리는 미술을 고집하고 있다. 누군가는 우직함을 넘어 우둔하다는 비판도 서슴지 않을 수 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장래 희망으로 화가를 적은 뒤 오직 그 길만 50년 가까운 세월을 걸어온 것도 쉽지 않은데 시쳇말로 한 물간 자연풍경에 고집스럽게 매달리고 있으니 시대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화가라는 핀잔에도 달리 할 말이 없다. 그렇지만 그의 성격을 알고 그에게 예술철학을 한 번이라도 들어봤다면 자신의 판단이 속단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물론 그도 한때 고뇌를 했던 적이 있었다.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주위의 평가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던 그는 15~16년 전 화풍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화가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 화가임과 동시에 처자식을 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등이 그를 엄습해왔다.
예술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해본 고민이자 아픔일 것이다. 깊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결국 ‘초심으로 돌아가자’라는 것이었다. ‘내가 왜 그림을 그리려고 했는가.’ 그의 화두였다. 화가가 되려 했던 이유에 관한 질문이었다. 그림이 미치도록 그리고 싶어서 택한 길이었다. 이러니 결론은 간단할 수밖에.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김정기 하면 떠오르는 힘 있는 자연풍경은 이런 탄생 배경을 가진다.

화랑 나들이에 나섰다가 김정기의 작품을 보면 문득 프랑스 화가 폴 세잔의 그림이 생각나곤 했다. 평생을 사물과 형태의 본질을 탐구하고 그림을 그리는 방식에 대해 고민했던 세잔은 이후 피카소·브라크 등의 입체파, 색채의 마술사 마티스 등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20세기 예술의 큰 부분을 세잔에게 빚지고 있다’라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말년에 고향에 머물면서 그린 '생트 빅투아르산' 연작은 고집스럽게 자신만의 그림 방식을 찾고자 했던 그의 최대 걸작이다.

산을 즐겨 그린 소재적 측면에서나, 산이 내뿜는 에너지란 측면에서 김정기의 그림은 세잔의 작품들과 묘하게 오버랩된다. ‘만드는 그림’이 아닌 ‘그리는 그림’, 나아가 ‘그리는 소재’가 아닌 ‘그리는 방식’에 천착해온 측면에서도 세잔의 정신을 이어간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진한 서양화의 냄새가 느껴지는 김정기의 그림에서 왠지 동양화의 또 다른 기운이 휘몰아치는 것은 왜일까. 그가 동양화의 ‘화육법(畵六法)’ 중 ‘기운생동(氣韻生動)’을 화법의 중심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그의 붓질이 점점 더 단순해지면서 여백의 미까지 살아나고 있다. 꽉 찬 붓질과 마티에르 속에서도 이상하게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무언가를 생각하게 만들고 상상하게 한다. 점점 밝아진 색채는 공간을 더욱 확장하는 효과까지 가진다. 김정기의 중후한 색상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그림의 변화가 신선함을 줄 수 있다. 작업에 대한 이런저런 고민이 사라지면서 그림이 밝아지고 있다는 그의 말에서 심적 평온이 불러오는 색채의 정화를 마주하게 된다. 자연의 변화무쌍함과 넘치는 활력을 오롯이 화폭에 담아내려는 초심을 잃지 않으려 아직도 야외 사생을 즐기는 그의 모습에서도 식지 않은 열정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걸어온 길이 드디어 30회 개인전이라는 인생의 또 다른 전환점에 이르렀다. 작가로서의 숱한 고민이 녹아있는 이 전시를 통해 김정기의 제대로 된 모습을 발견하길 기대한다. 그의 발전된 변화에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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