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5    업데이트: 24-01-15 11:36

평론 언론

2007. 8 . 문화교양지 일하는 멋
김정기 | 조회 1,173

 

김정기 화가를 만나다       


그림,  나의 마음속에 살아있어 주기를 바란다


비오는 여름밤. 책 한권 읽었다. 어둑해진 사위가 점점 환해오는 것을 보니 밤이 지나간 모양이다. “바람은 오늘의 풀을 흔들며 지나가지만 흙속에 숨은 풀의 흰 뿌리는 다치지 못한다”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단 두 문장에 매료되어 나는 밤새 내 살아온 삶의 시공간을 넘나들었다. ‘흙속에 숨은 풀의 흰 뿌리’, 이 짧은 두 문장에서 김정기 화가가 떠올랐다. 시류에 휩싸이지 않고 생산적인 그림이 아닌 솔직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평생 그림과 연애하며 살고 싶다는 그가.


서양화가 김정기씨를 만났다. 칠곡 작업실은 대구 도심보다는 공기가 청량하다. 그를 만난 때는 연두빛 초여름이었다. 연두빛이 주는 설렘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그런 설레임과 같은 것일 테다. 고집이 꽤나 있어보였다.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단 한 번도 다른 길을 생각해본 적도 없는 것을 보면 분명 고집은 있다. 안동에서 자란 김정기화가는 글자를 아는 순간부터, 소질이 있는 지 없는 지 화가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막연히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겠다고 했단다. 만화를 유독 잘 그렸던 형을 따라 만화를 그리면서도 그의 꿈은 화가였다. 맞벌이 하는 부모님이 늦게 들어오시는 집에 혼자 들어가기 싫어 골목에 앉아 흙그림을 그렸단다. 부모님의 반대는 지속됐지만 그림에 대한 열망은 포기 하지 않았다. 친구 집에 몰래 화구를 갖다 놓고 그림을 그렸고 안동에서 객지인 대구로 나온다. 계명대학교 서양화과에서 그의 청년그림은 시작된다. 삽화, 차트 등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객지생활의 외로움 따위는 문제가 아니다.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그에겐 최고의 행복이었다고. 그이는 다작을 한다. 나무에도 캔버스에도 수채화 유화…젊다는 것으로 에너지를 자극했고 많은 전시회에 참가했다.


고향의 산하에서 보고 느낀, 몸에 베인 서정적인 이미지가 화풍에 옮겨온 듯 그의 작품엔 풍경이야기가 많다. 그는 산과 바다, 늪, 시골길 등과 같은 자연이 좋단다. 화가에게 있어 스케치 여행은 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에너지라는 그는 1년에 꼭 한번은, 같은 자연이라도 경이롭기까지 하다는 강원도로 스케치 여행을 떠나고 여름이면 섬진강을 따라 사진 여행을 간다. “자연을 따라가는 여행을 통해 많은 것을 보고 느낍니다.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 물론 소리를 담을 수는 없지만 그림을 통해 그 소리를 느끼게 하고자 하는 것이 제 그림의 철학입니다. 모든 예술이 그렇듯 감동이 살아있는 그림, 나의 그림을 보고 사람들이 자연을 감상하고 잃어버린 추억도 순수도 찾아가길 바라는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욕심인가요?” 그는 이어 덧붙인다. 자연파괴, 인간의 이기를 반박한다. “그림 속에는 분명히 살아있는데 현실에서는 이미 사라져 버린 자연이 많아요. 개발이라는 문명에 의해 자연이 사라져 버린 거죠. 아니, 내 몰린 것이라고 해야 옳겠네요.”



그랬다. 도시화라는 거대한 철거 속에 자연은 고른 숨을 쉬지 못한다. 문명이라는 이기적인 현실은 자연에게 상처를 남겼지만 김정기 화가는, 사라지기전의 그 아름다운 풍경을 기록하듯 캔버스에 고스란히 보존했다. 사라져가는 고향집, 잃어버린 나무숲, 말라버린 내(川)가 흐르고 있었다. 잃어버린 ‘그곳’을, 우리들에게 그림이라는 창을 통해 찾아주었다. 그러니 욕심 아니다. 그의 그림에선 시골 고향집 부엌에서 저녁밥 짓는 구수한 냄새가 난다. 어머니의 따스한 젖무덤 같은 그리움도.


종교, 자연, 예술은 하나이며 셋 중 그 어떤 것도 정신이 깃들지 않은 것이 없다고 말하는  김정기 화가에게 그림은 무엇일까. 졸업 후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림을 그릴 때면 두근대는 소녀의 박동처럼 떨림이 온단다. “그림은 나를 발산 하는 에너지입니다. 내 젊음과 열정, 세상과 마주하는 내 삶의 소통창구입니다.” 그림의 멋은 변화와 통일이며 왜 라는 질문을 갖게 만든단다. 아직도 끊임없는 질문과 반복을 하며 그림세계에서 외도하지 않는다. 애인 같은 수채화와 부인 같은 유화가 있고, 어린 시절 흙 그림을 그리면서 수없이 뭉개고 그리기를 반복하던 그 즐거운 놀이가 지금도 화가로 살게 하고 있어 감사하단다.  


봄날 솟아오르는 생기발랄함, 여름날 장대비 내리는 비릿함, 가을의 처연함, 겨울 빈 나무의 허무함… 그 수많은 빛깔을 품고 살아 움직이는 김정기 화가의 풀의 흰 뿌리. 화가로 사는 든든한 버팀이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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