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8    업데이트: 23-02-16 09:38

언론, 평론

[나의 예술, 나의 삶] 한국화가 김봉천
관리자 | 조회 1,197
자르고 뜯고…두꺼운 화폭 파격적 재창조



한국화가 김봉천 작가가 자신의 화실 '시지헌'에서 '은-현' 시리즈 작품제작에 몰두하고 있다.
한국화가 김봉천 작가가 자신의 화실 '시지헌'에서 '은-현' 시리즈 작품제작에 몰두하고 있다. 


김봉천 작 '은-현'
김봉천 작 '은-현'

무릇 예술가의 존재의의는 자기만의 예술 장르를 수단으로 창조적 조형세계를 열어가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 가는 것이며, 유(有)에서 무(無)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1983년 옛 동아쇼핑 내 동아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연 이래 올해로 화업 37년째를 맞은 한국화가 김봉천(62)의 작업도 이러한 과정의 연속이다. 작가는 보이는 흔적을 부수거나, 조용한 가운데 움직이는 사물의 존재양식을 포착하며, 숨김과 드러냄의 방식을 통해 나타나는 표현미학을 추구해 왔다. 김봉천이 이와 같은 미술의 삶을 살게 된 배경에는 그의 삶을 통틀어 2건의 에피소드가 바탕에 깔려 있다.

첫 번째 사건은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고향 예천 집 이웃에 예쁜 초등학교 여교사가 내려와 있었는데 김봉천이 초교에 입학하니 마침 그 여교사가 담임이 됐다. 가뜩이나 시골소년의 마음을 뒤흔든 그 여교사는 어린 김봉천의 그림을 보고 "잘 그린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부터 그림에 재미를 붙인 그는 중고시절 미술부를 거쳐 영남대 미술대학(78학번) 회화과로 진학했고 화가의 길로 나섰다.

두 번째 사건은 대학 2학년 때 고 정치환 교수에게서 한국화 사사를 할 때였다. 당시 스승은 '많은 표현과 기법보다 잔잔한 연못에 돌을 던지면 일어나는 파문처럼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힘이 있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어떠냐'는 가르침에 요즘말로 필이 확 꽂혔던 것이다.

"서양화는 물감이 쌓여가는 것이라면, 한국화는 물감이 화선지 밑으로 스며들어 금방 드러내지는 않지만 깊이 있는 울림을 만들어 내기에 적합하고 그것이 나의 적성과도 맞아떨어진 것 같아요."

경북 칠곡군 동명면 남원로 팔공산의 가산산성이 올려다 보이는 마을에 8년 전 마련한 아담한 화실 '시지헌'(時至軒). 이곳에서 김봉천은 소품 위주의 작업을 하며, 대작을 준비할 때는 구미시 시미동에 소재한 다른 화실을 주로 이용한다.

작가는 20대 때부터 대구시전 초대작가가 될 만큼 많은 공모전에서 수상 경력을 지닌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 이런 그가 첫 개인전에서 선보인 화풍이 '파흔'(破痕) 시리즈이다.

'부서진 흔적'이란 뜻의 파흔 시리즈는 사물로부터 숨겨진 것을 찾고 세월의 흔적을 추구한다. 이때 사용한 기법은 파라핀을 이용한 프로타주(Frottage)기법이 주류를 이룬다. 프로타주 기법은 오래된 세월의 흔적을 파라핀을 이용해 표현한 것으로 화선지 위에 파라핀으로 조형언어를 칠한 후 그 위에 먹이나 채색을 하는 판화 형식을 응용한 것. 이 때문에 그의 '파흔' 시리즈는 우리나라 고유의 문양을 살려내면서 참신한 감수성이 두드러지는 추상 또는 반추상의 회화성을 지니게 된다.

'파흔'을 계기로 김봉천의 화풍은 이후 두 번의 변신을 더 꾀하게 된다. 40년 화업을 눈앞에 둔 그는 10년 주기로 화폭에 변화를 가져온다. 그의 두 번째 화풍은 '정중동'(靜中動)에서 따온 '정(靜)-동(動)' 시리즈의 출현이다.

'庭前有月松無影(정전유월송무영'뜰 앞에 달 떠있는데 소나무엔 그림자 없고) 欄外無風竹有聲(난외무풍죽유성'난간 밖엔 바람 없는데 대나무에서 소리가 들리네)'

작가는 언제가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벽에 걸린 이 시구를 보고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게 '고요함 속의 움직임'(靜中動)에 대한 이미지였다고 한다. 이 시는 '지봉유설'을 쓴 이수광이 10대 때 지은 시의 일부이다.

'정-동'시리즈는 화면에 둥근 달의 형태가 먼저 나타나고 그 안에 여러 형태의 그림자 조형이 비치는 화풍으로 특히 화면 전체를 가로지르는 발(簾) 느낌의 파라핀 선들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특징이다.

가끔은 태양의 강렬한 빛 아래 모습을 드러낸 세상들보다 달의 은은한 빛 아래 보일 듯 말 듯 존재의 현현을 알리는 세상이 훨씬 아름다울 때도 있는 법. 김봉천의 '정-동' 시리즈는 바로 달빛 아래서 있는 듯 없는 듯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세계를 묘사하고 있다. 이때가 1993년으로 대구문화예술회관 청년작가전이자 그의 10회 개인전에서 처음 선보였다.

작가의 세 번째 변신은 이로부터 10년 뒤인 2013년 대백프라자갤러리에서 열렸던 개인전 '은(隱)-현(顯)' 시리즈이다. 이 시리즈는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은-현' 시리즈는 '정-동' 시리즈의 필연적 후속물이다. '고요함 속 움직임'이란 결국은 '숨김과 드러냄'의 또 다른 속성이기 때문이다.

다만 작가는 여기서 표현되는 발(簾) 효과의 기법을 달리 하게 된다. 지금까지 발 효과에 파라핀을 사용했다면 '은-현' 시리즈부터는 두꺼운 사합장지를 칼로 층을 따라 뜯어냄으로써 그 효과를 표현하게 된다.

"문득 파라핀 없이 발 효과를 내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단 물감을 칠한 후 가로나 세로 형태의 선을 뜯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김봉천이 추구하는 화풍인 '파흔' '정-동' '은-현' 시리즈에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가 구체적인 형태는 잘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메타포를 적극 활용한 은유와 상상력이 작품의 조형언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만 '은-현' 시리즈 이후 최근엔 포토샵을 이용해 화면을 미리 구성한 후 그 위에 먹이나 채색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봉천은 1993년부터 2012년까지 대구예술대학교 한국화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대구도시철도 2호선 대공원역사에는 벽화 공모에 선정된 도예부조로 된 그의 작품이 걸려있다.

작가는 내달 9일부터 그의 화업을 중간 결산하는 대구문화예술회관 선정 '올해의 중견작가전'에 그동안 작업한 대작을 선보일 예정이다.

사진 글 우문기 기자 pody2@imaeil.com

우문기 기자 pody2@imaeil.com
덧글 0 개
덧글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