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8    업데이트: 23-02-16 09:38

언론, 평론

[김수영의 그림편지] 칠흑 같은 어둠속 흩날리는 버드나무잎, 그 뒤로 정적 깨뜨리는 묘한 신비로움
관리자 | 조회 2,205
칠흑 같은 어둠속 흩날리는 버드나무잎, 그 뒤로 정적 깨뜨리는 묘한 신비로움
 
김봉천 작 ‘정(靜)- 동(動)’

 동양화의 기법 중에 ‘홍운탁월(烘雲托月)’이 있습니다. 수묵에서 흑과 백 두 개의 색만이 존재하는 특성을 충분히 활용한 표현법으로 ‘구름을 그려서 달을 드러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홍운탁월을 통해서 동양화와 서양화의 표현기법상 특징을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달을 어떻게 그릴까요. 달의 실제 모양에 가깝게 동그랗게 형태를 그린 뒤 최대한 달의 본래 색깔을 잘 드러낼 수 있도록 물감을 칠하는 것은 물론 이러한 달을 도드라져 보이게 밤하늘에도 색칠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동양화는 좀 다릅니다. 달 그림인데 서양화처럼 달을 그리지 않습니다. 달을 감싸고 있는 구름을 칠하여 달의 형태를 은연중에 드러내 줍니다. 달이 있는 자리는 화선지 그대로이며 구름이 남긴 하얀 빛깔의 여백이 자연스레 달이 됩니다.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김봉천 화가는 동양화가 가진 본질을 이어가면서 현대적 감각을 느끼게 하는 작품을 만들기 위한 고민을 끊임없이 해왔습니다. 그래서 소재와 표현기법에 있어 새로운 시도를 거듭해왔으며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한지의 특성을 살린 작업방식을 찾게 되었습니다.

한지는 겹겹이 층을 올려 2합지, 3합지, 4합지 등을 만듭니다. 그는 4합지를 사용해 한지에 원하는 형태를 그린 뒤 나이프나 조각도로 그 형태 주변의 종이를 한 겹 두 겹 뜯어냄으로써 형체를 완성해갑니다. 이렇게 잘라낸 절단면은 겹겹의 층위를 이루어 화면에 명암을 나타내고 작가가 원하는 형태도 완성시켜 나가게 합니다. 단순하게 그림을 그림으로써 형태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구름이 달을 완성해가듯, 한지를 뜯어냄으로써 사물을 완성해가는 방식은 홍운탁월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지를 뜯어내기 전 자신이 원하는 형태를 그려나가는 방식은 서양화의 표현기법과 맥을 같이합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이 동양적인 것 같으면서도 때로는 새로운 멋으로 다가오는 것일까요.

“서양화는 물감을 한 겹 한 겹 쌓아서 다양한 색깔을 내고 깊이 있는 그림을 완성해 갑니다. 하지만 동양화는 한지에 먹으로 그림을 그리면 그 먹이 한지에 스며들게 되지요. 먹의 농도, 수분의 함량 등에 따라 한지에 스며드는 정도, 드러나는 색상 등이 달라지는 것을 이용한 것입니다.”

그의 작품에 대해 미술평론가 김영동은 “김봉천 작가는 한국화 장르가 유난히 실험정신을 강조하면서 재료와 방법을 쇄신하려고 애쓰던 분위기에서 성장한 세대다. 전통과 관습의 혁신을 통해 현대화를 이루겠다는 시대적인 열정이 지배하던 시절, 그 역시 현대한국화의 방향을 모색하며 현대적 미감을 찾았다”며 “다소 파격적인 조형방법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은 다시 구상적인 이미지들을 불러냈다”고 평했다.

김 작가가 최근 수묵화의 특징을 좀 더 확실하게 드러내는 작품으로 내놓은 것이 ‘정(靜)- 동(動)’입니다. 신천둔치의 밤을 담은 작품인데 신천둔치에 있는 버드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은 밤의 정적이 모든 것을 삼켜버린 깊은 숲속, 나아가 우주를 연상시킵니다.

겁이 많은 저는 사실 밤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세상 모든 것에서 무서움이 조금씩 스며나오는 것 같아 자연스레 불빛이 있는 곳을 떠나지 않습니다. 전시장에 걸린 이 작품을 처음 보고는 그냥 스쳐지나칠 뻔했습니다. 별다를 것이 없는 수묵작품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흩날리는 버드나무의 잎이 왠지 애틋해 보이고 큰 버드나무 뒤로 펼쳐지는 크고 작은 점들이 마치 우주공간처럼 신비롭게 다가와 가던 발길을 멈추었습니다. 얼핏 보면 흑백사진 같은 느낌을 주는 작품을 가까이 가서 자세히 들여다봤습니다.

그의 작품 속 밤에는 정적이 주는 무서움·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정적을 깨뜨리는 묘한 에너지와 신비로움이 스며있었습니다. 미처 몰랐던 어둠이 가진 아름다움을 마주하게 하고 그 속으로 발을 내디뎌 걸으라 충동질을 합니다. 그 밤 속에 너의 온기도 채워넣으라고.

주말섹션부장 sykim@yeongnam.com

#김봉천 작가는 1992년 대구 동아미술관 개인전을 시작으로 20여회 개인전을 열었으며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대구미술대전 대상, 중앙미술대전 특선,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 등을 받았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대구문화예술회관, 대구지하철공사 등에 소장돼 있다.

2018.5.25

http://www.yeongnam.com/mnews/newsview.do?mode=newsView&newskey=20180525.01040084801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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