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8    업데이트: 23-02-16 09:38

언론, 평론

김봉천의 제3회 개인전에 부침 - 고충환(미술평론가)
관리자 | 조회 885
김봉천의 제3회 개인전에 부침
 
 
고충환 (미술평론가)
 
작가는 그동안 전통적인 한국화의 범주 내에서 간단없는 실험적 변혁과 자기 정진을 거듭해왔다. 여기서 한국화의 범주란 수묵과 채색 등 얼핏 보기에도 한국화의 전통적 관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며 변혁과 정진이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실험적 모색에 대한 천착과 함께 특히 그의 그림이 현대적 미감으로 읽혀진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수묵 특유의 번짐 효과에 대한 조절과 원하는 색채의 발색에 근접하려는 모색 등의 실험적 시도를 위해 작가들이 자신의 작업에 아교와 백반 등속의 재료를 널리 이용해 왔음은 이제는 널리 알려져 있다. 작가의 이러한 일반화된 재료 이외에 파라핀과 특히 지판과 프로타쥬 등의 판화적 기법을 원용해 화면 운용에 대한 변화를 모색해 왔으며 채색을 거부하는 파라핀의 속성을 이용해 그림의 이미지(형상)와 바탕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의 반전을 꾀하고 있다. 채색을 획득 혹은 회복한 바탕 (전래하는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여백의 묘를 간직하고 있는)과 화면의 반전을 통해 엿볼 수 있는 작가의 관념은 소외된 것에 대한 새삼스런 주목이라는, 구분과 대립에 근거하는 논리의 틀을 넘어 장자의 무구분과 무분별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작가의 작업에서 파라핀과 판화적 기법의 만남은 독특한 질감효과를 유발하고 있으며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여백에 풍부한 서술적 뉘앙스 (암시로 가득한 화면)를 부여하고 있다. 그 질감은 만져서 감지되는 촉감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시각적인 효과에 머물고 있다. 이외에도 한국화 특유의 선적 접근이라는 전래하는 방법론의 틀을 깨고 면적인 화면 운용을 꾀하는 것 역시 의미 있는 형식실험의 한 시도로 간주된다.
 
작가의 작업에서 간취되는 현대적 미감이란 자연색 고유의 중성색 톤을 대치하는 칼라를 의미한다. 이러한 색채에 대한 미적 관념은 장식성이라는 보편적 개념으로 드러난다. 장식성이란 작업의 형식과 관련된 가치 개념으로서 시지각적 거부감을 유발하지 않는 양식화된 화면처리와 운용으로 드러난다. 흔히 추상화의 범람에 대한 근자의 비판이 많은 경우 바로 이러한 사실에 기인한다. 즉 애시당초 작업의 형식에만 연연하거나 혹은 어떠한 종류의 내용성도 담아내지 못하는 나약한 형식성의 논리가 한계로 인식되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이러한 지적이 조형예술 특유의 형식 혹은 형식성에 대한 고루한 변론을 되풀이 하자는 것은 아니다. 일테면 조형예술은 그 특이성에 비추어 볼 때 작업의 형식 자체가 이미 내용 혹은 내용성을 담지하고 있는 ‘의미 있는 형식’ 이라는 등속의 변론을 들 수 있다.
 
이렇듯이 작가의 작업이 표면적으로는 주된 관념의 뿌리를 장식성에 두는 한편 현대적 미감의 표현이라는 보편개념에 머물고 있지만, 일테면 꽃 등속에서 작가 나름의 내밀한 시적 감수성과 소재의 내용성에 대한 고심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유사 이래로 인간은 온갖 삼라만상에 상징성의 옷을 덧입힘으로써 자신의 빈약한 어휘의 폭을 증폭시켜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점은 꽃 역시 예외가 아니며, 대표적인 사례로 사군자에 대한 동양의 전통적인 관념을 들 수 있다.

이외에도 노발리스가 밤의 세계를 지배하는 신의 메신저로 '푸른 꽃'에 심취함으로써 낭만주의적 세계를 펼쳐 보인 점과, 그리고 보들레르가 '악의 꽃'을 통해 상징주의자 특유의 데카당스적인 귀족적 감수성을 표현한 점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한마디로 꽃은 특유의 양의성으로 인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예인들에 의해 널리 소재로 차용되고 있다. 작가의 작업에서 이러한 시적 혹은 문학적 감수성의 일단은 꽃 자체의 묘사에서 드러나기도 하지만, 특이 독특한 울림을 발하는 여백의 묘가 이러한 감성을 증폭시키고 있다.

이렇듯이 여백이 주요한 의미를 담지하는 것은 전체 화면의 크기에 비해 얼마 되지 않은 면적을 점유하는 꽃이 상대적으로 큰 울림공간을 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공간은 그냥 있는 무용의 공간이 아니다. 혹은 균제와 비례 등속의 어법이 작용하는 조형상의 화면만도 아니다. 그것은 꽃 자체가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최소한의 호흡을 필요로 하는 절대공간이다. 그 공간은 꽃의 호흡과 관념이, 그 곁을 지나치는 바람의 스침이, 그곳에 거주하는 온갖 존재가 말하는 울림이, 그리고 유사 이래로 인간이 꽃에 부여해 온 누적된 상징성이 공존하는 살아있는 공간이다. 그것이 절대공간인 것은 공간내의 인자들이 상호간의 조화 여부를 근본적으로 떠나있음에 기인한다. 그 인자들이 화면 내에서 조화를 이루리라는 것은 한낱 인간의 기대치에 지나지 않는다.
이상의 개괄에서 드러나는 작가의 작업에 대한 태도는 화면 내에서 전래하는 재료와 새로운 기법에 대한 모색, 그리고 꽃이라는 특정한 모티브, 고유의 미감에 대한 작가 개인의 내밀한 시적 감수성에로의 승화가 자연스레 공존케 함으로써 전통의 계승에 대한 작가 나름의 방법론의 일단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평면 작업 이외에도 그 경륜이 짧지만은 않은 오브제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그것은 나무로 짠 정방형의 사각틀 내에 테라코타로 빚은 토루소, 소상, 마른 꽃과 들풀, 수석 등속의 오브제를 포치한 것으로서 일부는 사각 틀의 표면을 닥지로 마감하고 있다. 이러한 일단의 오브제 작업은 그동안 작가 개인의 모색 속에 존재하다가 이번 전시를 통해 그 전면적인 소개가 시도되고 있다. 필자 개인으로는 그 오브제 작업에 큰 흥미를 느꼈으며 작가 역시 앞으로 작업에 있어서 의미 있는 방향성을 기대하는 듯 했다. 그 근원은 작가가 일전에 장애인 교사 경험을 토대로 한 것으로 장애인의 특수한 상황에 대한 작가 개인의 주관적 경험을 인간의 보편적 상황으로 객관화시킴으로써 현대인 혹은 초시간, 초시대적인 보편 인간의 병적 징후에 대한 작가 나름의 철학적 성찰을 꾀하고 있다. 그 병적 징후의 드러냄은 대사회적 문제의식이나 보편적 인간에 대한 왜곡된 심상의 표현과 관련되기보다는 작가 개인의 내밀한 성찰과 관조의 성격을 띠고 있어서 피상적인 아픔의 표피를 넘어서는 따스함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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