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1    업데이트: 13-09-24 16:07

언론 평론

“단순하면서도 내면 담아내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아트코리아 | 조회 993

단순하면서도 내면 담아내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겨울바람이 매섭게 몰아쳤다. 그러나 맑은 하늘아래 오후 햇살을 받은 산등성이는 봄날 같은 여유를 부리게 했다. 나는 언제부턴가 겨울산과 겨울나무가 좋았다. 검푸른 소나무들과 나목이 된 나무숲은 마치 크림을 많이 넣은 커피 색 같다. 단풍의 계절 가을은 너무 현란한 색채로 정신을 빼앗아 간다. 그러나 겨울나무는 하나의 이파리도 갖지 않은 채 차가운 겨울 하늘에 온몸을 내맡기고 있는 그 당당함이 좋다. 삭풍은 마른 이파리를 날려 보내고, 거기다 죽은 가지마져 앗아간다. 죽은 듯 뻗어있지만 겨울을 이겨낸 가지는 살아있는 것들이다.

겨울나무는 봄 안개가 피어나 가지를 감싸면 그 안에 생명의 물줄기를 흘려보내 싹을 틔운다. 나는 그런 겨울나무가 좋다. 내 삶도 아무 말 없이 삭풍에 맨몸을 드러낸 겨울나무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군더더기 없이.

나는 김일해 선생의 능평리 화실을 찾아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며 그런 생각에 골몰했다. 선생의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능평리 화실은 분당에서 고갯마루를 넘어, 작은 계곡을 지나 한참을 올라가면 동편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평면 45평 규모의 화실에 들어서자 가운데 지펴둔 난로에서 송진 냄새가 방안을 가득 채운다. 벽면마다 선생의 그림들이 걸려 있고, 작업실로 통하는 건너편 문을 열고 나가자 탁 트인 전망을 통해 발아래 집들과 건너편 산줄기가 눈에 들어온다.

화실에는 조각품들과 오래된 등잔이며, 손때 묻은 소품들이 많다. 그런데 화첩에서 보았던 그림과 사뭇 다른 색채의 그림들이 걸려 있다. 과거 그림보다 더 많이 생략되었거나 화려하게 채색이 대비된 그림들이다.

신자연주의, 채색주의 화풍 가진 화면의 지휘자

선생의 화풍에 대해 미술평론가 박용숙은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대부분 자연 풍경을 다루고 있지만, 인위적인 풍경요인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그렇게 인위적으로 꾸며진 경관이 그의 그림에서는 마치 비인위적인 자연 풍경처럼 보임으로써, 그의 그림의 뛰어난 예술성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김일해의 풍경화를 채색주의 풍경화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말은 그가 자연을 순수하게 색채를 이해하거나 반대로 색채로 풍경을 재구성하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길고 굵은 곱슬머리를 뒤로 넘기고, 적당히 콧수염을 기르고 있는 선생에게 물었다.

선생의 그림에 대해 신자연주의 혹은 채색주의라고 하는데 이 말에 동의하시는가요?”

그렇게 봐주는 것 같습니다. 사실 그림은 사진이 아니며, 실사도 아닙니다. 높은 산을 낮게 하거나 멀리 또는 가까이 재구성하는 것이 작가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통해 지휘자가 오케스트라를 조율하듯 전체 화면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어떤 작가들은 여행을 하면서 도로변에서 좋은 풍광을 카메라에 담아 그것을 화폭에 그리는 경우들을 보는데 나는 별로 바람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왕에 여행을 하고 풍경을 담으려면 발품을 팔아 사람들이 닿지 않는 곳에도 가보고, 아무도 보지 않는 것들을 만나보고 그것들을 재구성해 그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평론가 신항섭 선생도 선생의 그림에 대해 채색주의라는 평가했습니다. 그분의 말을 빌리자면 미적 감각은 순수미에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풍경이든 정물이든 현실 색에 얽매이지 않고, 자의적인 색채 배열로 현실로부터 독립된 회화적인 공간을 만들어내는데 특별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채색에 대한 특수함을 지적한 것인데, 이 부분을 직접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처음부터 진지한 질문 때문인지, 얼굴에 웃음기를 지운 채 양손을 움직여 큰 동작을 만들며 설명에 들어갔다.

구상회화의 매력은 색채입니다. 사물의 형체는 화가라면 다 그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색채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눈으로 보여 지는 색채 말고 화면에 맞는 색을 찾아 그림에 불어넣어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제 채색의 지론입니다.”

그것은 사물의 고유한 색깔을 무시한다는 말씀으로 들리는데요?”

그렇습니다. 그림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그 가슴속에 새로운 느낌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사진과 같은 색채로서는 약합니다. 각각의 물체나 풍경이 갖고 있는 색을 찾아내 강조함으로써 그 색채가 마음을 흔들어 깨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될 수 있는 한 사물의 고유색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선생의 대답은 확실히 파격적이다. 일반적으로 자연의 색을 그래도 아니면 좀 더 확실하게 표현하는데 선생은 느낌을 주는 색채를 만들어낸다고 하니 말이다. 이것은 인상파(The impressionists) 화가들이 주로 사용하는 방식이 아니었던가?

선생의 이러한 바탕은 어떻게 형성되었다고 보십니까?”

제 그림은 자연주의에서 출발해 18세기 인상파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림은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시대 역사를 보면 80년대에는 정치적인 성향을 반영한 민중미술(民衆美術) 활동이 활발했습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군사정권의 퇴조와 함께 소멸되어 다원주의(多元主義)로 바뀌었습니다. 저도 그 시대를 살았으므로 그런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그런 그림은 한두 점으로 족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결국 그림은 편안하고 아름답고 희망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자연주의 쪽으로 굳어졌습니다. 21세기 들어 건축이나 모든 예술이 단순화되고 현대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런 시점에서 저는 구상이면서도 단순하고 현대적인 작품을 그려낼 것이냐를 과제로 삼고 작업했습니다.”

선생의 대답처럼 그의 그림은 일상이면서 다른, 다르면서도 같은 느낌을 주는 특성이 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창의적이며 의도적인 배치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풍경화는 물론 정물이나 인물화에 있어 그 포즈나 배경은 전체적 조화를 위해 조밀하게 계산되어 배치한 것들이다. 이것이 그림의 완성도를 높이는 기법이다.

또 그림이 갖고 있는 색채 역시 일상의 색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데, 전체적으로 큰 터치임에도 불구하고 배색과 혼합, 터치의 기술이 완벽한 채색을 만들어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를 밀고 나가는 능력을 보인다. 결국 세필을 통한 정밀묘사가 줄 수 있는 작은 설명을 생략하여 그 그림이 담고 있는 주제의 내면을 깊이 음미할 수 있는 상상력을 자극해내고 있다. 이 때문에 선생을 신자연주의(新自然主義) 화가라고 부르는 것이다. 선생은 말한다.

풍경화나 정물화에서 모든 그림은 많은 연구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점과 선의 굵기와 거리, 면과 색, 면의 크기 등을 충분히 생각하고 계산해서 그려야 합니다. 스케치 여행을 많이 다니지만 결국은 내가 본 대상을 파괴하려고 합니다. 그래야 내가 원하는 그림이 그려집니다.”

다작 통해 터득한 독창성 키워

김일해 선생은 교육자였던 아버지 밑에서 엄격하게 자랐다. 중고등학교 시절 그림을 잘 그린다는 얘기를 들었으나 부친은 미술전공을 반대했다. 가출 등의 반항을 통해 겨우 사범대학에 입학하는 조건으로 미술공부의 길을 뚫었다. 대학에서 배운 이론은 흥미가 없었다. 교수들이 가르쳐준 사실적 화풍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군복무를 마친 선생은 칩거하며 독창적 화법에 매달린다. 그 시기에 대해 선생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대학 4학년 때부터 3년간 나는 매월 3천 호 정도를 그렸습니다. 그림이 되든 아니든 마구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작업에 미친 것입니다. 두문불출하고 그림만 그리다보니 판단기준이 생겼습니다. 그것이 내가 추구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선생은 그 후 1981년부터 83년까지 목우회 공모전 특선, 1983년부터 연 3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 특선을 차지함으로 실력을 인정받게 된다. 다작을 통한 자기 그림이 대구의 이름 없는 화가를 중앙에서 주목받는 화가의 이름을 얻게 했다. 선생은 이후 변종화 선생을 만나 미술에 대한, 또 미술계에 대한 도움의 말을 들으며 1987년 서울로 올라와 전업작가로서 작업과 전시회에 전념한다. 그리고 신세계미술관과 선화랑, 일본 동경 진출 등 활발한 활동을 통해 지평을 넓혀간다. 선생은 변종화 선생과의 만남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처음 만나자고 할 때는 화풍이 맞지 않는다고 판단해 2년 정도를 미루었습니다. 그러다가 대구에 내려올 기회에 선생을 만나 많은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나는 변종화 선생과의 만남을 통해 그림에 대해 충고를 들었거나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프로작가정신을 배웠습니다. 대학에 있다가 프랑스에서 그림을 공부하신 변 선생님은 덮어놓고 그림을 그려서는 안 되고, 수십 명이 전시를 해도 보는 사람에게 감동 즉, 느낌을 전달하는 화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분은 돈을 주고 샀을 때 돈이 아깝지 않도록 하는 그림을 그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에 봐도 좋고 50, 100년 후에 봐도 느낌을 줄 수 있는 국경을 넘나들 수 있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씀이 제게 양약이 된 것이죠.”

선생은 이제 마음이 가면 손은 따라가며 그림을 그려내는 경지라고 했다. 그림은 누구에게서 배웠다고 되는 것이 아니란다.

타고나면 좋겠지만 노력이 최상의 방법입니다. 노력하는 일을 통해 캔버스를 많이 없애고, 물감을 없애야 합니다.”

미술학도들에게 있어 많은 시간을 투자한 노력만한 스승이 없다는 말이리라. 자신도 영남대학교와 대학원을 마쳤으나, 최근에야 수원대학교에서 학생들을 만난다고 했다.

요즘 젊은 작가들은 조금 한다 싶으면 강단에 서고 싶어 합니다. 서두르지 말고 그림에 몰두해 자기 그림을 그릴 수 있으면 나머지는 덤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선생은 앞으로 하고 싶은 그림의 방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내 그림에 더 변화를 주고 싶습니다. 이제 좀 더 설명을 덜하고 내면을 더 표현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은 것입니다. 형체가 없어도 그 내면의 정신을 표현할 수 있다면, 오래된 벽에서 느끼는 느낌, 즉 오랜 세월을 살아온 인간의 인고를 담을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무엇을 그릴 것인가 보다는 무엇을 뺄 것인가, 비울 수 있는 게 무엇일까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내가 큰 터치로 그리는 이유는 생략하면서도 그 안에 포함된 그림을 그리기 위해 내가 차용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선생은 대담 말미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림은 재주나, 테크닉만으로 하는 것이 아님을 젊었을 때는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림에 철이 들면서 마음으로 그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손끝에서 나오는 붓 터치만으로는 보는 사람에게 그림에서 느껴지는 감동과 깊이를 전달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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