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1    업데이트: 13-09-24 16:07

언론 평론

김일해의 재구성적인 풍경화
아트코리아 | 조회 1,237

김일해의 재구성적인 풍경화    

박용숙(미술평론가) 

아직도 풍경을 그리는 일은 화가의 중요한 임무인 것처럼 인식되어 있다. 이 말은 오늘과 같은 복잡한 문명생활속에서도 풍경을 보는 일은 여전히 의미있는 일임을 말해준다. 
케네드 클라크에 의하면 풍경화는 인류의 낙원사상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낙원이 어떻게 생겼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성서에 의하면 선악을 구별하는 지혜의 나무가 있는 동산이 낙원으로 되어 있다. 유명한 서양화가들이 남긴 에덴동산에 관한 그림에는 잔디로 뒤덮힌 동산가운데 능금나무가 서있고 거기에 아담과 이브, 그리고 그들을 유혹에 빠뜨리고 있는 뱀이 그려져 있음을 볼 수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성서에 기초한 것이다. 
그러나 클라크는 낙원사상의 근원지가 페르시아였다고 말하고 실제로 그 시대에 낙원을 그린 그림(벽화)에는 숲과 그리고 꽃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집이 그려져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아무튼 낙원의 요소가 푸른 잔디와, 과일 나무와 숲, 그리고 갖가지 꽃, 과 집(천당)으로 구성되었다는 걸 알수 있다. 물론 우리나라의 십장생도(十長生圖)를 낙원 그림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비록 수묵으로 그렸을 때도 있었지만 동양의 산수화가 낙원사상과 깊이 연계되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김일해(金一海)의 풍경화는 대부분 자연풍경을 즐겨 다루고 있지만, 인위적인 풍경요인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항구, 도시, 마을, 거리, 이국적인 건물들은 모두 자연 그 자체이기 보다는 인위적으로 꾸며진 경관이다. 그렇게 인위적으로 꾸며진 경관이 그의 그림에서는 마치 비인위적인 자연풍경처럼 보임으로써 그의 그림의 뛰어난 예술성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음을 보게된다. 풍경화가 끊임없이 제작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풍경화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범상치않는 재능(예술성)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김일해의 풍경화를 채색주의 풍경화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이말은 그가 자연을 순수하게 색채를 이해하거나 반대로 색채로 풍경을 재구성하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의 풍경화에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 것은 그 점을 뒷받침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자연은 빛(진리)의 그림자일뿐이라고 믿었다. 그러니까화가가 나무를 그리고 구름이나 산을 그리는 것은 진리(빛)의 그림자를 그리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도 예술은 단지 자연을 모방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한 사람의 화가가 나무나 바위를 그리는 것은 그 자체가 진리의 그림자임으로 결국 그림이란 곧 그림자를 확실하게 붙잡아 둠으로써 진리 그자체를 실감하는 일이게 돈다. 
그러나 르네상스이후의 화가들은 자연이 진리의 그림자가 아니라 자연 그 자체가 확실한 대상임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그들의 눈에는 자연은 그림자가 아니라, 그림자를 수반하는 시각적인 주체였다. 르네상스이후의 화가들이 풍경에 원근법을 도입하고 그림자를 확실하게 했던 것은 인문주의(人文主義)시대의 세계관을 구축하기 위한 혁명적인 시도이긴 했으나 그로인해 자연의 본질은 점차 우리의 시선에서 사라지고 죽어있는 자연의 허상만이 우리앞에 남아 있게 되었다. 전반적으로 김일해의 풍경화에서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 것은 주목할 만한 것인데 그것은 자연을 보는 시각에서 그가 매우 세련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의 본질에 가까이 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서양화에서 보자면 제일 먼저 그림자를 제거한 것은 인상주의 시대의 화가들이었다. 그들은 오랫동안의 인문주의적인 자연관을 버리고 자연을 다시 빛으로 환원하려했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 자연은, 그리고 풍경은 곧 빛의 그림자였으므로 빛의 탐구는 필수적이었다. 아름다운 자연이나 풍경은 빛을 제거하면 속할 뿐이다. 왜냐하면 빛은 곧 색채의 원이이었기 때문이다. 
김일해의 그림에서 좀처럼 검은색 그림자가 발견되지 않는 것은 그가 어떤 경로를 통해 그런 경지에 도달했는지 알 수 없으나, 자연이나 풍경을 이루는 주요소(主要素)가 빛과 그림자의 관계가 아니라 실은 빛자체의 문제, 그러니까 색채의 문제로 귀착된다는 사실은 숙지하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림에서 그림자가 사라지면 삼차원적 공간이 무너지며 따라서 화가의 시선은 시제(時制)를 초월하게 된다. 물론 초현실주의 공간에서처럼 그림자가 존재하면서도 삼차원의공간이 무너질 수도 있다. 그러나 김일해의 그림에서처럼 풍경이 기본적으로는 삼차원질서에 의존하면서 그림자를 제거하면 매우 미묘한 분위기가 탄생한다. 그것은 삼차원적이면서도 또한 환상적인 만큼 비현실적인 공간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분명히 김일해의 그림에는 상하좌우가 있으며, 어렴풋이나마 멀고 가까운 것을 느낄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풍경화가 시제를 초월하거나 어딘가 환상적으로 느껴지게 되는 것은 결국 그의 색채의 마술성 때문이리라 믿는다. 화가가 거리의 사람들, 시골길의 사람, 부둣가에 서있는 사람들, 혹은 갯벌에서 일하는 사람을 그릴 때에도 얼굴이나 몸의 디테일을 무시하고 있는 것은 모두 시제를 초월함으로써 그들이 언제, 어떤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그런 모습으로 존재해야하는 가를 알릴 필요가 없다고 그가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색채를 통해서 풍경을 재구성하는 일이다. 이런 일이 시제를 초월하고 그림을 환상적이거나 고도의 서정성을 높이게 만드는 일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일이다.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마티스가 보나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기 전까지는 보나르는 별로 중요한 화가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보나르의 그림들은 색채의 마술적인 기교를 제외하면 이렇다하게 주목받을 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티스가 바로 그 색채의 마술성에 눈을 뜨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린버그에 의해 색채의 폴리포니(poly phony)로 정의된 바 있는 보나르의 이 색채미술은 음악의 화음(和音)처럼 여러색채를 배합하여 가볍고 투명하고 그러면서도 황금을 볼때처럼 아주 미묘한 희열이 일어나는 그런 색감을 실현하는 일이다. 
김일해의 색채법을 보면 여러 가지 면에서 그가 색채의 폴리포니를 의도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는 이렇게 스스로 말하고 있다. 
“ 나는 내 개성을 색채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구상이기때문에 형체에서는 그다지 큰 차가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색에서의 개성은 화면에 어울리는 전체적 하모니가 될 수 있는 색을 찾는 것입니다. 될 수 있는 한 사물의 고유색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생각만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많은 작업량ㅈ중에 터득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말은 그가 색채의 폴리포니를 시도한다는 뜻으로 이해되는 부분이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리고자 하는 대상은 여러면에서 재구성되어야 한다. 이 부분을 화가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밤을 새워 고민하고 연구하면서 내가 본 실상(대상)을 파괴하기에 애씁니다. 그 실체가 파괴돼야 화면에서의 재구성이 가능합니다. 본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나무도 심고 길도 내어 화면에 맞는 구도를 찾고 물체고유의 색이 아닌 ‘느낌’의 색을 찾아 어울리는 화면을 만듭니다. 그러다보면 함축적인 텃치가 나오게 되고 단순화 되지요.” 
김일해의 그림에서는 무채색의 흰색이 많이 섞이면서 강한 유채색의 힘을 약화시키거나, 그렇게해서 만들어진 중간 색조가 전체적인 화면의 분위기를 압도해간다. 그러는 과정에서 선명도가 높은 색상의 소재들이 적절히 배치되면서 전체적으로 그라데션의 효과가 증진되고 있는 것도 실은 색채의 폴리포니에 그가 열중하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폴리포니가 음악의 용어인 것처럼 색채의 폴리포니도 실은 음악적인 감수성을 높이는 한 기술인 것이다. 
전체적으로 김일해의 색채가 무겁게 느껴지지 않고 편안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느껴지고 있는 것은 그가 자연, 혹은 풍경을 이지적으로 이해하거나 단순히 감각적인 반응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색채의 원질서를 통해 역으로 그것들을 재구성해 보는 적극적인 표현법을 쓰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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