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김병호
오늘 26     전체 118,610
글 수: 11    업데이트: 13-12-13 12:46

작가노트

2013-02-12 [문화산책] 길에서 만난 그림
김병호 | 조회 1,019

화실 근처에 볼일이 있어 시장을 둘러보던 중 오래된 가게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점포가 아니라 길가 벽에 물건을 쌓아놓고 영업하는 노천 만물상인데, 오래된 물건이 수북이 쌓여있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호기심을 피어나게 하는 물건이 많습니다. 오래된 녹음기나 앰프도 신기하지만 아주 낡은 가죽가방도 참 인상적입니다. 누군가의 세월을 묻혀 고스란히 그 서정을 담고 있는 것들은 정겨우면서도 애잔한 느낌을 줍니다.

구석구석 구경하다보니 한쪽 구석에 그림도 있습니다. 미술전공 학생이나 초보화가가 그린 듯 조금은 어설픈 그림의 구석엔 화가를 꿈꾸던 누군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캔버스가 많이 상했네요. 모두 추억할 만한 누군가의 기록입니다.

한쪽 구석에 예상치 않은 그림이 한 점 보입니다. 무희를 그린 그림입니다. 그림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뒷면을 보니 조금 습기가 차있긴 했지만 상당히 고급재료입니다. 캔버스 틀도 좋은 나무에 고급 아사천으로 입혀져 있습니다. 1994년에 그려진 외국작가의 작품으로 사인이 명기되어 있습니다. 재료가 좋은 것은 싸구려 복제가 아니라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가게 주인에게 가격을 물어보니 5만원이라 합니다. 오래된 그림, 가격 대비(?) 압도적으로 좋은 그림. 사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이 그림을 다른 이의 몫으로 남겨두었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파는 일을 해야 하는 저로서는 묘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이 그림보다 열배, 아니 그 이상 더 비싼 제 그림은 대체 어떤 가치가 있을까요? 조용히 생각에 잠기며 반문해 봅니다. 길을 걷다 만난 그림 하나가 많은 생각을 줍니다. 이국의 화가가 그린 그 그림이 어떻게 칠성시장 만물상으로 흘러왔는지….

분명한 것은 어떤 형태로든 예술은 우리의 삶 주변과 그 삶 속에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싸거나 비싼 물건으로서의 가치를 떠나 나의 형편에 걸맞은 그림이나 예술품을 하나 정도 소장할 수 있다면 이미 우리는 예술을 삶과 함께 누리며 동행하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대구역 뒤쪽의 담을 따라 꽃시장을 향하던 길 위에서의 조우가 그저 반가운 하루입니다.

김병호 <화가>

덧글 0 개
덧글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