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이상한 나라의 토끼, 곽인식 탄생 100주년 기념, 남홍-솟는 해, 알 품은 나무
전시일자: 2019. 10. 15 ~ 2019. 12. 25, 2019. 10. 15 ~ 2019. 12. 22, 2019. 10. 01 ~ 2020. 01. 05
장소: 대구미술관
출품작가: 오트마 회얼, 곽인식, 박생광, 남홍
작성자: 곽명지
평소에는 정말 갈 일이 없는 미술관을 방문하는 것도 올해로 두 번째다. 처음에는 이런 경험이 익숙하지 않아서 거부감이 들었지만, 이제는 익숙해지려 한다. 그냥 미술관을 가는 일이 당연하게 느껴진다. 친구들과 미술관 앞에서 만나기로 했기 때문에 미술관까지 가는 길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평소에는 미술관으로 향하는 셔틀버스가 썰렁했었는데 오늘은 사람이 많아 버스가 만원이었다. 나름 신기한 광경이었다. 올해 봄쯤에 방문했을 때에는 가는 길에 벚꽃이 피어있었는데, 가을에 방문하니 핑크뮬리가 피어있었다. 요즘 관광지에서 사람을 끌기 위해서 핑크뮬리를 많이 심는데 미술관 가는 길에 핑크뮬리를 보니 색달랐다. 버스에서 내리면 들려오는 그 노랫소리가 익숙했다. 벤치에 앉아서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 미술관 외부를 살펴보다가 너무 회색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이날의 미술관은 이때까지 방문했던 모습과는 정말 달랐다. 미술관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조용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방문객이 많지 않았는데 말이다. 계단을 올라가기 전부터 그리고 미술관 입구 앞에서부터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가족 단위가 대부분이었는데 어린아이들도 함께였다. 어린아이들이 미술관을 방문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지역의 문화 수준이 높아졌다는 생각을 했다. 티켓을 구매한 후에 드디어 발을 내딛었다.
내가 미술관에 입장하여 가장 처음으로 만난 작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바로 12마리의 토끼들이다. 그것도 눈뿐만이 아니라 머리부터 꼬리까지 모두 선홍색인 토끼 말이다. 처음에 토끼들과 눈이 마주쳤을 때 솔직히 너무 당황스러웠다. 어린아이들은 이 전시물을 만지고 올라타고 있었다. 그래서 그곳은 마치 놀이공원 같았는데 쉽게 내가 마주하곤 했던 ‘만지지 마시오.’ 미술관 팻말과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이 광경을 보면서 요즘 미술은 정말 관객들과 소통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전시의 이름은 <이상한 나라의 토끼>였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야기에서 중점을 토끼로 옮긴 모양이다. 이야기 속에서 토끼는 커다란 시계를 들고 앨리스의 관심을 끈다. 앨리스가 토끼를 따라가면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토끼들을 미술관 1층 어미홀에 배치한 것은 어쩌면 다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 미술관 관람의 시작을 이 아이들이 인도하는 것이다. 가까이서 토끼를 보면 정말 사실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래서 더 친숙하다. 총 12마리라는 것도 ‘십이간지’를 떠올릴 수 있어 참 흥미진진한 작품이었던 것 같다. 전시를 올해 12월 25일까지 한다니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휴가를 떠나는 토끼들이다.


유난히 이번 전시가 기대되었던 이유는 바로 이 분 때문이다. 다른 성씨를 가진 이들은 잘 모르겠지만, 나는 ‘곽씨’로 이는 매우 드문 성이다. 워낙 곽씨 성을 가진 인구가 적다 보니 곽씨를 만나면 나도 모르게 동질감을 느끼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다 가족 같다. 그래서 이 작가의 이름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큰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처음 마주한 작품은 색채가 어두운 편이었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인물의 모습도 어딘가 경직되어 있는 모습이다. 검정색의 모피 코트를 걸친 듯한 그녀의 모습은 진지하면서도 당당해 보인다. 이 작품의 이름은 <모던 걸>이다. 내 생각에 그 당시 새롭게 등장한 신여성을 표현한 그림인 것 같다. 이 작품 속 여성이 작가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작가가 담아내고 싶었던 신여성의 모습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단아한 한복을 입고 긴 머리를 빨간색 댕기로 묶은 이 소녀의 뒤에 개처럼 보이는 형상이 있다. 이 작품의 배경 색깔은 따뜻한 느낌을 주는 색들인데, 전체적인 분위기는 따뜻하거나 밝아 보이지는 않는다. 어두운 무채색 그녀 때문인 것 같다. 다르게 보자면 노을 지는 빛에 그림자가 졌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가 기뻐 보이지는 않는다. 뒤의 개도 꼬리를 흔들지 않는다. 이 <긴머리 소녀>가 더 외로워 보이는 이유는 멀리 홀로 떨어져 서 있는 나무들과 비슷하게 보여서가 아닐까 싶다.

전시실에서 내가 만난 세 번째 여성이다. 그녀는 발레를 하고 있는데 붓터치를 크게 칠해서 발레복의 풍성함을 살린 듯하다. 크게 전신을 그려서 세밀하게 표현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 않는다. 이 작품에 더 끌렸던 이유는 제목 때문이다. <발레하는 연인>. 여인도 아니고 연인. 받침의 차이는 꽤 크다고 본다. 만약에 이 여성이 곽인식 작가에게 조금 더 특별한 존재였다면 이 그림을 그리는 순간이 얼마나 뜻깊었을지 상상이 간다. 사랑하는 사람을 화폭에 담아내는 일은 정말 사랑스러운 일이다. 배경이 선명하지가 않아서 잘 보기는 어렵지만, 그녀가 지금 춤을 추고 있는 공간이 궁금하다. 연습실인 건지 아니면 정말 발레 공연에 오른 것인지. 얼굴이 보이지 않아 표정을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행복해 보인다.

이 작품들을 한 번에 마주하고 나는 피카소를 떠올렸다. 완전히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이 작품들의 화풍이 피카소의 분위기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여러 방면에서 대상을 그린 피카소의 기법과는 다른 기법이지만, 왠지 모르게 자꾸만 피카소와 비교하게 되는 것이다. 일단 이 작품들을 하나하나 살펴봤을 때 하나의 작품을 본 뒤, 그다음 작품으로 넘어가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왜냐하면, 이해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정말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지금도 이해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첫째 줄 왼쪽에서부터 보자. <과일을 먹는 사람>. 사람으로 보이는 생물이 손에 사과 같은 것을 쥐고 먹고 있다. 하지만 그 모습이 너무나도 기묘해서 일반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 모습은 너무 기하학적이다. <태양과 하품하는 사람>. 나는 이 제목을 읽고 중의적인 문제에 빠졌다. 태양과 함께 하품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태양은 그저 배경일 뿐인지 말이다. 사람이 태양을 삼킬 것 같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리고 <국화> 속 주인공은 무척 소박하게 자리 잡고 있는데 그 주위가 너무 혼란스러웠다. 모두 국화를 지키려고 안달 난 것 같다. 네 번째도 <태양과 하품하는 사람>이다. 그 옆의 <떠오르는 태양>은 저 작품에서 희망을 주는 것 같은데 저 세계의 형태를 이해할 수가 없다. <과일을 먹는 사과의 계절>의 그 계절이 사실 언제인지도 잘 모르겠다. 과일을 먹고 있는 저 생명체의 모습이 조금 무섭게 보였다. 공포영화 속에 나오는 괴물의 모습같이 보여서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새빨간 심장으로 보인다.
이 작품까지 보고 나니 이 작가의 세계가 점점 더 모호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작품 해석은 각자의 몫이라는 말을 믿고 작품을 보았다. 주황색 태양이 이글거리고 있고, 사람이 소 등 위에 올라탄 것 같다고 느꼈다. 들쭉날쭉한 선과 정리되지 않은 채색이 이 그림의 특징 같다.

종이에 강렬하고도 질서 없이 칠해진 유화물감의 모습은 유화물감을 억세게 흩뿌린 듯한 모습이다. 이 세 작품 모두 <무제>라서 그 의미를 파악할 시도조차 하지 못 하였다. 하지만 꼭 뇌로 이해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저 작품이 주는 느낌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마구잡이로 물감을 칠했다기에는 끝마무리가 섬세해 보이는데, 스포이트로 화학용품을 떨어트린 모습 같다. 이곳저곳으로 흩날리는 물감 덩어리들의 모습이 밤하늘에 떨어지는 유성 같기도 하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부분은 색상 계열이다. 빛나는 광물의 색깔인 것 같으면서도 단풍의 색깔 같다. 색깔들이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 같다.

이 두 작품 또한 <무제>였다. 파란색과 빨간색을 사용한 작품이다. 정확한 형태를 알 수는 없지만 두 색깔이 내 마음에 들었다. 왼쪽 그림은 두 색깔이 서로 싸우는 듯한 모습인데, 오른쪽 그림은 두 색깔이 조화를 이루는 듯한 모습이다. 형태가 둥글어서 하나처럼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오른쪽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중간에 한 아이가 있는 것만 같다고 느꼈다. 한 아이가 가운데에서 빨간색과 파란색에 둘러싸여 있는 것 같다.

이 그림을 보고 다시 피카소를 떠올렸다. 피카소의 <우는 여인>이 떠올랐다. 비록 이 여인은 울고 있지 않고 미소를 짓고 있지만 말이다. 그녀는 자기 자신의 모습에 매우 만족한 듯하다. 오른쪽을 보면 거울을 보고 있는 여성의 실루엣이 보인다. 그리고 여성이 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바로 정면의 얼굴인 듯하다. 만약 여성의 실루엣을 여성의 왼쪽 손으로 본다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이 될 것이다. 참 이중적인 그림이다.

이 작품이 자화상인 줄 알았지만, 그저 인물화일 뿐이었다. <인물(남)>. 제목 또한 간단하다. 어디서 어떻게 이 남자를 그리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반대쪽 표정이 보이지 않는 남자의 표정이 흥미롭다. 눈동자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인상이 날카롭게 보이는 듯하다.

멀리서 바라보면 세계지도 같은 모습이다. 파란색 유화물감을 두껍게 쌓아 입체감이 느껴지는데 그 모습이 달리는 기차 같기도 하고 해안 같기도 하다.

이 작품은 황토색 계열의 쓰임 때문인지 향토적인 느낌을 준다. 하나하나 선을 파내기도 하고 쌓아가기도 하면서 작품을 완성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이런 종류의 작품은 작가의 노력이 엿보인다.왼쪽의 동그란 원은 달 같기도 하다. 내게 옆의 형체들은 인어로 보인다. 인어들이 바다를 헤엄치고 그 옆에서 물결이 흐르고 산호들이 휘날리는 그런 모습 말이다.

이 작품은 앞의 두 작품보다 크기가 커서 웅장한 느낌이 컸다. 그리고 석고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듯했다. 크게 새겨넣은 물감의 바탕들이 굵직했다. 무엇을 나타내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작품을 보는 사람들에 따라 무엇을 발견하는지는 다르겠지만 말이다.

이 작품의 첫인상은 시멘트와 콘크리트였다. 회색도시의 산업과 공장이 생각났다. 가운데 부분부터 일어난 균열이 인상적이다. 마치 암세포가 퍼지는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그 균열이 어딘가 모르게 또 안정감이 있었다. 참 모순적이게도 균열이 안정감을 주고 있었다. 폭죽이 터지는 듯한 느낌에 어수선함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배경의 회색과 흰색의 그라데이션이 편안해서 그런지 나는 포근함을 느꼈다.

동글동글한 쇠구슬 같은 것들이 한데 모여 다시 둥글둥글한 원 모양을 그렸다. 외계인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곡물 밭에 나타나는 원인 불명의 원형 무늬인 ‘크롭 서클(crop circle)’이 떠올랐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저 입체적인 구가 사람 머리 같았다. 그래서 어쩌면 위에서 내려다본 사람들의 정수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서로를 잡으러 뛰어다니는 것이다. 조금 큰 머리는 어른, 작은 머리는 아이.

<작품 61>을 보고 ‘이 작가는 항상 성장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림 기법이나 화풍도 다양해 보였는데 사용하는 재료마저 범위를 넓혀나가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이 은박지를 활용한 작품은 정말 신선했다.

처음에는 이 작품이 다른 수채화 작품들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였는데 사용 재료를 알고 나니 색달라 보였다. 저기 일렬로 줄 세워진 원들이 단추였던 것이다. 저런 재료를 하나하나 엄선해서 골랐다고 가정한다면, 정말 작품 하나하나에 뜻깊은 의미가 있음에 틀림없었다.

이 작품들을 시작으로 유리를 재료로 사용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느낀 감정을 단순하게 표현한다면, 정말 아름다웠다. 세로로 긴 형태를 선택한 것도 신의 한 수였다. 유리의 색깔이 어떻게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하지만 막상 우리 주변을 되돌아보면 우리의 얼굴을 비추는 거울부터 지나치는 유리창, 갖가지 유리병들 모두 다 다른 색깔이 있다. 유리는 장미와 같다. 아름다운 장미에게는 가시가 있듯이, 햇빛에 반사되어 유난히도 빛나는 유리 조각에 손을 잘못 가져갔다가는 손을 베이기 십상이다. 전시되어 있는 저 유리들은 작가에게 보석보다 더 사랑받았을 것이다.

이 유리 조각을 보고 현대적이라고 생각했다. 앞의 유리 조각들은 원석과 같은 형태로 자연스러웠는데, 이 유리 조각들은 가공되어 정사각형으로 완벽하게 다듬어진 모습이었다. 에메랄드 색깔과 투명함이 잘 어울렸다. 뒤의 유리가 갈라져 나온 듯한 형태를 취하는 건 다 뜻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작품 63A>가 재미있었던 이유는 작품과 동시에 작품을 보는 나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마치 평소처럼 거울을 보는 것과 같다. 하지만 저 작품이 가지는 분위기 때문인지 평소에 마주하는 나의 모습과 달랐다.

유리는 쉽게 깨지므로 살살 다뤄야 한다. 그런 재료를 가지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의 작품을 만들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특히 저 균열들 힘 조절을 잘못했다가는 유리는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그 조각이 살에 박힐 수도 있다. 저만큼 얇은 두께의 유리를 이용하려면 무척이나 집중해야 할 것이다. 저 작품들을 보고 깨진 휴대폰 화면을 생각했다. 그리고 제일 예쁘다고 생각한 점은 첫 번째 작품의 그림자이다. 그림자와 작품이 데칼코마니를 이루는 것이 아름다웠다.

첫 번째 작품의 제목은 <샘>이다. 옆의 한자를 읽을 줄 몰라서 샘하다의 그 샘인지 아니면 물이 나오는 샘인지 분간을 하지 못하겠다. 물이 나오는 샘이라면 저 가운데의 구멍이 물이 솟아오르는 입구가 될 것인데, 샘하다의 샘이라면 작품을 보는 시각이 더 모호해질 것이다. 두 번째 작품의 제목은 <무제>라서 점점 더 미궁에 빠지고 만다. 저 동그란 쇠붙이의 형태가 단추 같기도 하고 나사 같기도 하다. 저 동그라미를 전체 작품에서 떼어낸다면 정말 썰렁하게 구멍이 뚫려있는 형태일 것 같다.

<작품 67>은 참 기묘하다. 네모의 바탕에 네모의 테두리에 결국은 네모가, 그리고 그 안에는 네모가 자리 잡고 있다. 마치 문을 열고 열고 열어도 문이 있는 것 같고, 상자를 열고 열고 열어도 상자가 있는 것 같다. 마트로시카 인형이 생각나기도 한다. 마지막 빨간색 네모를 향해서 열려있는 것이 창문 같기도 하다.

이 세 작품은 사진으로 보기보다 훨씬 더 거대하다. 곽인식 작가가 정말로 다양한 작품에 도전했음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저 작품들을 우리의 마음과 감정에 투영시켜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구겨진 마음, 일그러진 마음, 그리고 상처 입고 흉터가 남은 마음. 이렇게 생각해보면 괜한 연민마저 느껴진다.

흑과 백은 선과 악처럼 쉽게 대조되는 대상이다. 이 두 작품이 사이에 가상의 대칭축을 두고 비교되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검은색 바탕의 원과 하얀색 바탕의 원 형태가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탕색만 다른 작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확연한 색의 차이로 두 작품의 선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는 점은 사실이다. 저 하얀 선으로 그려진 원을 보자니 ‘왜 액자는 대부분 네모날까’ 라는 알 수 없는 의문이 생겨났다.

이 그림들을 보고 조금 무서운 감정을 느꼈다. 한 달 전에 영화 ‘버드박스’를 봤는데 그곳에는 악마 같은 존재가 등장한다. 눈을 뜨고 그 존재를 보게 되면 충동적으로 자살을 하게 된다.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눈을 뜨고 돌아다닐 수 있는 사람은 정신병자뿐이다. 영화 속 정신병자들 중 한 인물이 눈을 뜨고 종이에 악마를 스케치하기 시작하는데 그 그림이 딱 저 작품과 유사하다. 검은색의 저 탁한 느낌이 정말 비슷하다. 정말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 네 작품은 작가의 감정 상태를 드러내는 듯하다. 어릴 적 유치원에서 해본 활동 놀이가 생각 났다. 음악을 듣고 느낀 감정을 종이에 아무렇게 표현하기. 그런 종류의 작품 같다. 처음 작품은 멀리서 보면 심장 박동을 그린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수풀을 표현한 것 같다. 두 번째는 정말 혼란스러운 그림이다. 보고 있으니 내 마음도 요동치는 느낌이다. 모든 것이 엉망인 듯한 느낌. 세 번째는 현미경으로 관찰한 식물의 단면이 생각난다. 하나하나의 알갱이들이 공간을 꽉 채우고 있는데 그 모습이 과하지는 않은 듯하다. 마지막 작품은 먹구름에서 비가 내리는 것 같다. 수직하강 하는 저 검은 줄기들이 무척 우울해 보인다.

전시실을 이동하면서 감상하니 이 작가는 서예에도 재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냥 흘긋 보고는 그냥 한자라고 생각하고 지나칠 뻔했다. 하지만 작품 제목을 보고 다시 한번 보니 숨겨져 있는 작은 그림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방식의 그림들을 마주하는 건 언제나 재밌는 일이다. 정말 색다른 아이디어를 얻고 가는 것 같다. 첫 번째 <버드나무>에서 저 한자 같은 형태가 커다란 버드나무를 상징하고 있었던 것이다. 높게 올라간 나무 기둥부터 그늘을 만드는 풍성한 잎까지. 두 번째 <물내음>에서 저 형태는 폭포를 상징하는 것 같고, 물이 흐르는 모습이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어져 있다. 그리고 한 육지에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마지막 <옛향기>에서는 커다란 산과 함께 자리 잡은 고향의 모습이 보인다. 산 아래에 가족으로 보이는 듯한 형태가 있는데 부모와 아이들인 것 같다.

상큼하고 귀여운 젤리 같은 작품이다. 실제로 저 타원형이 젤리빈처럼 보인다. 젤리 광고를 촬영하기 위해 테이블 위에다 젤리를 우수수 쏟아버린 것 같다. 밀도가 가운데부터 밖으로 가면서 감소하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색깔의 조화가 좋아서 눈이 편안했던 작품이다.

앞의 작품과 비슷한 느낌의 작품이었다. 세 가지 패턴을 하나로 이어 붙이니 젤리보다는 건강검진이 생각났다. 색맹 테스트를 하기 위해서 저런 패턴 위에 숫자를 새기고 읽게 하는 검사 말이다. 특정 색을 배합하여 저렇게 찍어내니 입체감이 돋보이는 것 같다. 상자 안에 꽃잎을 잔뜩 넣은 것 같기도 하다.

작가의 작품을 다 감상하고 나서 자화상을 맞이하니 경이로운 감정이 느껴졌다. 앞에서 보다 환하고 알록달록한 작품을 보다가 흑백을 마주하니 더 집중하게 된 걸지도 모른다. 단순하게 먹으로 자신을 그렸는데 그 형태와 이목구비는 선명해서 알아보기가 쉬웠다. 자화상은 나름대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작가가 자신의 모습을 일대일로 대면하여 그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가장 새롭다고도 볼 수 있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거나 다른 사물을 그릴 때와는 전혀 다른 관점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으로 만난 이 자화상이 신비하게 느껴졌다.

남홍 작가의 전시실 입구에서부터 범상치 않음을 느꼈다. 독보적이게 화려한 컬러가 눈에 들어왔다. 강렬한 원색을 사용하는 것이 이 작가의 특징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 재료들을 작품에 활용한다는 점. 그리고 다른 작가들과 다르다고 느낀점은 제목이다. 보통 작가들은 <무제>인 경우가 많은데, 이 작가는 A는 A다. B는 B다. 라고 확실히 제목을 붙이는 편이었다.

이 작품의 제목은 <삶>이다. 정말 간단명료하지 않은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려주고자 하는 타입이었다. 이것은 제목 그대로다. 이것이 작가가 생각하는 삶이다. 이 작가의 작품을 하나하나 볼 때마다 입체감에 놀라곤 했는데, 정말 어떤 방식으로 이것을 제작했는지 그 과정이 궁금할 정도였다.

정말로 타오르는 듯한 빨간색 해에 잡아먹힐 것만 같다. 작가의 정열적인 마음이 잘 반영된 것 같다. 이 해는 정말로 뜨거워 보이는데 이 뜨거움을 작가는 많이 사랑하는 것 같다. 표면에 두껍게 모양을 낸 하트 같기도 한 형체는 나비가 아닐까 싶다. 새빨간 태양을 배경으로 나비 떼가 날아오르는 장면을 떠올리신 것 같다.

<찬란한 비상>. 유난히 이 전시가 흥미진진했던 이유는 앞에서 말했듯이 제목의 명확성이다. 제목이 없음에 스스로 추리해 나가는 과정도 좋지만, 정확한 제목을 알고 작품을 보면 작가의 의도가 드러나니 더 좋은 것 같다. 어쩌면 이때까지의 묵묵부답에 내가 지쳐있던 걸지도 모르겠다. 빨간 해는 어김없이 떠올라 있고 그 주위를 아래에서부터 위로 나비들이 비행하고 있다. 몽환적인 배경색에 세밀한 빛줄기와 함께 표현된 나비들의 날갯짓이 인상적이다. 저렇게 그리니 천국의 구원 장면이 생각난다.

이 작품은 방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공간이 모두 이 작품을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조명 아래 반짝이는 화분들과 날아다니는 공중의 나비들 천장에 매달린 적색 구름. 정말 신묘한 풍경이었다. 이 공간의 끝에 빨간 해는 어김없이 떠올라 있어서 이제는 아예 신성해 보였다. 그리고 이 공간의 한 벽에 붙은 <학>은 여유로워 보였고, 빽빽한 색깔들 사이에서 하얀색의 공백을 보니 정말 순수해 보였다.

형형색색의 산의 모습은 이상세계를 나타내는 것처럼 보였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다른 나라의 이런 색깔을 지닌 산들이 생각나서 현실감이 있어 보였다. 눈으로 저런 자연경관을 볼 수 있다면 정말 정신이 사로잡히지 않을까 싶다. 작가 특유의 색깔 배열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특유의 입체감 덕분인지 산의 나뭇결이 생생했다.

둘 다 산을 그린 것인데 분위기는 확연히 다르다. 위의 산은 화사해 보이면서도 긍정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밝게 통통 뛰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하지만 밑의 산은 위의 산에 비해 조금은 어둡고 진지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고 터프한 인상을 주고 있다. 작가가 직접 산의 풍경을 보고 그린 것인지 아니면 상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위의 산은 가을의 단풍을 아래의 산은 여름의 청록색을 상기시킨다.

유독 빨간색을 많이 사용하는 작가에게서 보이는 파란색이 보기 좋았다. 파란색을 보니 시원했고, 빨간색의 압박에서 벗어난 듯한 느낌이었다. 파란색 바탕에 입체적인 재료를 사용해서 작품을 만들었는데 하나하나 재료를 붙이려면 어마어마한 작업 시간이 걸렸을 것으로 예상한다. 작품 제목은 <산>이지만 선선한 파란색 때문인지 심해가 생각났다.

작가의 <자화상> 또한 확고한 본인의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어서 놀라웠다. 어김없이 등장한 강렬한 빨간색. 이 자화상을 감상한 후 전시실을 이동하면 작가 인터뷰 영상이 나오는데 정말 자화상과 똑같이 생기셨다. 자기 자신을 잘 아시는 듯이 보였고, 자신의 작품에 자부심을 가지고 계신 것 같았다. 영상 속 작가의 말과 옷차림 등 모든 것이 작품의 분위기와 비슷했다.

색깔의 편견에 갇혀서 첫 번째는 봄, 두 번째는 여름이라고 생각했던 내 자신이 바보 같아 보였다. 결국은 둘 다 봄인데 말이다. 다채로운 봄꽃들이 만개한 것처럼 아른거리고 그 주위를 감싸 안은 나비들. 빨간색 계열과 파란색 계열로 하나의 봄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 재미있었다. 작가에게 봄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는 모양이다.

이 두 작품 또한 주제가 같다. <나비>. 정말 커다란 나비의 모습이다. 색깔이 많고 프릴 장식처럼 표현되어 있어서 생일파티라도 하는 기분이다. 실제로 곤충 나비를 가까이서 관찰하면 털이 보이는데 작품의 질감과 유사하다. 나비들이 너무 화려한 나머지 공작새들을 날아다니는 것만 같다.

은색과 금색의 끈을 둥글게 말아 붙인 모습은 정말 둥지 그 자체다. <둥지>라는 같은 제목을 단 이 두 작품은 상반되는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한쪽은 뜨거운 느낌이고 새의 깃털로 보이는 것들이 날아다닌다. 하지만 한쪽은 우울한 분위기이고 얼음이 언 듯이 차가운 느낌이다. 겨울이 와서 모든 것이 정지한 느낌이다. 한쪽은 따뜻한 바람이 불 거 같은데 한쪽은 냉랭한 바람이 불 거 같다.

어쩌면 이 전시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사이즈도 컸을 뿐 아니라 커다랗게 물감을 흩뿌린 듯한 모습이 창의적이었기 때문이다. 흔히 생각하는 데칼코마니의 나비가 아니라 자유분방하면서도 형식을 지키고 있는 나비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나도 모르게 ‘와, 이건 진짜 아이디어 좋다.’라고 생각한 작품이다.

작가의 정신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었던 작품이다. <세월의 구름>. 제목을 보니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당연히 적색 하늘에 떠 있는 딸기우유 색깔의 구름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듯한 색감의 구름은 신비롭다. 저 구름이 계속 떠다니면서 이동해도 저 풍경은 바뀌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전시실을 나가기 전에 이 작품을 놓칠 뻔했다. 벽 장식인 줄 알고 그냥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작가의 나비에 대한 애정을 알기에 혹시 하고 다시 돌아왔더니 역시나 이것도 그녀의 작품이었다. 네모난 작품 속에 갇혀있던 나비들이 이렇게 나와 있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자유를 찾아서 훨훨 날아가면 좋겠다.
전시를 다 보고 나서 평소보다 더 감상한 게 많다고 느꼈다. 미술관 티켓을 가지고 있으면 미술관 내 카페에서 천원을 할인받을 수 있었다. 정말 일석이조인 셈이다. 주문한 자몽 에이드가 바닥을 드러내고 이번 미술관 방문도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