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7    업데이트: 16-08-22 10:49

김강록의 작품세계

상생과 화해의 변주곡 이영철(화가)
아트코리아 | 조회 1,067

상생과 화해의 변주곡

   

이영철(화가) 

 

내 친구 강록이

김 화백과의 인연은 비슷한 연배의 화단 동료들에 비해 꽤 늦게 시작되었다. 대구라는 지역을 중심으로 작업을 하다 보니 사회 활동과 화단 이력이 자주 겹쳐지기는 했다. 하지만 이 친구는 신체적으로 타고난 아주 우월한 유전인자를 바탕으로 늘 정장차림의 빈틈없는 도회적 이미지가 강했다. 당연히 나처럼 좀 허술하고 두루뭉술한 타입과는 맞지 않을 것이란 선입견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인연이 겹치고 쌓이는 동안 이 친구는 심지가 깊고 심성이 순박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알고 보니 그의 고향 상주 함창 촌놈 그대로였다. 삼한시대 3대 저수지 가운데 하나였던 상주 공검지 근처 함창에서 태어난 그는 그곳에서 자라고 공부를 해서 계명대학교 미술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을 했으니, 소위 말하는 동네 수재 가운데 하나였다.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미감과 열정, 그리고 저수지처럼 깊은 감성이 지금도 굳건하게 붓을 잡게 하는 원동력이다. 게다가 화가로서 작품 활동 이외에 미술교사로 재직하며 몸에 배인 성실한 자기 관리 덕분에 벗들과의 사이에서 궂은 일, 힘든 일은 늘 김 화백이 소리 없이 도맡아 해결해준다.

가끔 김 화백 마음 깊이 들어 있는 아이가 하나 보인다. 한번은 영화와 시, 그림이 함께하는 모임 뒷풀이 끝에 술이 거나하게 오른 내가 그 기특한 아이를 발견하고 안아준 적이 있다. 마침 다른 친구가 이 장면을 기념사진으로 남겼는데, 술은 깨기 마련이고 사진은 늘 진실을 보여준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분명 꼬마 강록이를 격려하느라 흐뭇해 마지않던 기억만 남았는데, 나중에 본 그 사진에는 키가 아주 큰 김 화백에게 마치 매미처럼 매달려 있는 내 모습이 담겨 있었다. 모두들 개그 프로 한 장면을 엿본 듯 뒤집어졌음은 물론이다. 아무튼 김 화백은 이제 서로의 고민을 의논하고, 함께 은사님을 모시고 식사도 나누며 철따라 소풍도 다닌다. 나아가 화단 안팎의 문화에 대해서도 주제 넘는 걱정까지 하는, 그냥 있는 그대로 ‘내 친구 강록’이다.

 

 

 

불이(不二)의 미학(美學)

김강록의 회화는 거친 혼합재료를 바탕질료로 사용한다. 그 투박한 질감 위에 힘 있고 속도감 넘치는 붓질이 화려한 오색과 간색을 실어 나른다. 화면 위에는 색 면과 색 점이 뒤엉켜 서로 충돌하고 혼돈을 불러일으키다가 빠르게 상생과 화해의 통로를 거쳐나가는 과정에서 격렬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따라서 다분히 추상표현주의적인 요소가 강하다. 그러나 좀 더 들여다보면 전형적인 추상표현주의 계열의 작품 군이 지니고 있는 자유롭고 비정형화된 감상의 분출 혹은 범람과는 구별되는 점이 있다. 화면의 중심을 채운 뜨거운 추상적 에너지는 화면 외곽에 배치된 정적이고 이성적인 공간에 의해 어김없이 제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강록의 회화는 이처럼 율려(律呂)라는 이름 아래 기본적으로 열고 나가려는 힘과 닫고 가두려는 기운이 부딪치며 마치 대위법처럼 점, 선, 면 그리고 색채가 상호 반응하는 이중적인 화음을 만들어 낸다.

그의 작품 속에는 생성과 소멸, 이성과 감성, 현전과 부재, 열림과 닫힘, 지상과 우주, 고대와 미래, 자유와 억압, 따뜻함과 차가움 등 우주를 구성하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상대적인 개념이 내재되어 있다. 꿈틀거리는 존재의 근원적인 욕망과 이것을 제어하려는 이성적인 미의식이 거의 모든 화면에서 부딪친다. 그리고 이 두 개념을 분리해 바라보면 막 터져 오르기 직전의, 그러나 결코 터지지 않을 것 같은 화산을 바라보는 마음처럼 불안하고 불편하다. 따지고 보면 사실, 이러한 이중구조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나누어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앞면과 뒷면이 전혀 다르지만 우리는 그것을 ‘동전’이라 부른다. 또한 손바닥과 손등도 전혀 다른 모습과 역할을 하지만 그냥 ‘손’이라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작업에 등장하는 미학적 쌍 개념들도 부분을 보면 대립된 세계이지만, 전체를 보면 모두가 둘이 아닌[不二] 우주적 화합의 세상이다.

김강록 회화의 이성적인 닫힘과 감성적인 열림도 둘이 아니다. 분출하려는 자유의지와 이것을 통제하려는 마음도 둘이 아니다. 김강록의 회화는 인간과 자연, 우주의 근간을 이루는 온갖 갈등과 충돌의 요소들을 상생과 화해의 마음에 담아 부분과 전체를 하나로 아우르며 끊임없이 변주시켜 나가고자 하는 불이(不二)의 미학(美學)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땅, 하늘 그리고 사람

김강록의 회화를 처음 접했을 때 내 마음 속으로 직진해 들어온 이미지는 땅이었다. 특히 투박한 바탕질료와 그 위에 쏟아 부은 듯 칠해진 오방색과 간색의 합창은 길고 긴 겨울, 죽음의 시공간을 가로질러 막 터져 오르기 시작한 봄의 대지를 신의 시점에서 내려다 본 듯 느껴졌다.

소멸과 죽음을 모태로 삼아 생명을 더욱 생생하고 빛나게 하는 지극히 역설적인 상황은 실재로 우리들이 늘 경험하고 있는 자연이고, 세상이다. 생겨난 모든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질서 속에 살아가지만, 막상 따져보면 어느 것 하나 예측 가능하도록 확고하게 구축된 질서 또한 없다. 그래서 지상의 존재는 늘 불완전하고 우주의 본질도 불안정하다. 그래서 김강록의 그림에서 거친 마티에르를 걷어낸 후 색면 자체의 울림을 지켜보면 땅이 곧 하늘이다.

 

새순과 꽃잎들처럼 보이는 색, 점들은 별자리이고, 넓은 들과 언덕처럼 보이는 땅은 태양계, 은하계를 넘어서 천체의 운행질서를 따라 한없이 열려 있다. 우주와 지상도 둘이 아니다. 우주는 빛으로 가득하고 그 빛을 오방 위의 색으로 표현하는 것이 그의 그림이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화가는 땅[地]과 하늘[天]을 통해 궁극적으로 사람[人]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물론 그 물음은 활짝 열려 있지도, 굳게 닫혀 있지도 않다. 그저 하늘과 땅, 질서와 무질서, 삶과 죽음, 웃음과 눈물, 희망과 절망, 시간과 공간 등 우주의 근원으로부터 온 모든 것들이 인간과 인연이 되어 그들을 널리 이롭게 하는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궁금해 한다. 천지가 뒤섞이는 그의 그림 속에는 늘 따뜻한 인간적인 사랑이 스며들어 있다. 김강록은 그림을 통해 우주의 질서와 자연의 이치를 담아내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렇게 담아낸 천지인의 모습을 상생과 조화의 회화세계로 이끌어나가는 여정이 곧 그의 예술세계인 것이다

 

 

 

키가 큰 나무

내 친구 강록이는 키가 크다. 그리고 의식의 심연에는 여전히 함창 시골을 뛰어다니며 노느라 미처 자라지 않은 아이를 품고 있다. 자주 강록이는 넓은 들판에 서 있는 나무 같다는 생각이 든다. 참 괜찮은 인간이자, 화가이고, 존경받는 미술 선생인 그는 미술행정, 영화 등 문화 전반에 대한 관심도 크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고대사에 깊은 조예가 있고, 사회적인 활동까지 왕성하게 하고 있다.

그저 화가로만 살기에는 너무 큰 정신의 키와 긴 팔을 가졌다. 나는 친구니까 나무가 크니 더 멀리 세상을 보나보다, 하늘의 뜻도 큰 만큼 잘 헤아리나보다 하고 여과 없이 기쁘게 받아들인다. 융합이고 통합이 미덕인 시대이니 문화와 교육, 사회 전반에 전문적인 소통이 가능한 내 친구 강록이 같은 예술가도 꼭 필요하다.

너무 넓어서 오히려 좁은 땅에 뿌리를 내리고, 너무 커서 오히려 작은 우주를 머리에 이고 서서 늘 바쁜 이 나무의 행보가 점점 더 궁금해진다. 물론 특별한 인연을 쌓아가는 동료 화가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아이와 좀 더 많이 대화를 하고, 그 아이가 가자고 하는 대로 따라가서 더 깊고 큰 그림을 많이 그렸으면 하는 것이 제일 큰 바람이기는 하다.

律呂 율려 Tune of Universal Regularity I 不二의 美學 Non-dividual Aesthe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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