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1    업데이트: 23-07-04 09:58

언론 평론

강문숙 시인의 나의 살던 고향은 풍기
강문숙 | 조회 947

강문숙 시인의

나의 살던 고향은 풍기

 


어릴 땐 소풍으로, 이제는 순례지처럼 드나드는 소수서원. 고향 인근에서 교편생활을 하는 막내동생과 함께 다시 찾았다. 지금도 여전히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노송들. 어디선가 들리는 듯한 글 읽는 소리…. 따스한 햇살이 잠시 머문 일신재에 기대어 아련한 기억을 추억한다. 마음의 고향이 있어 난 참 행복하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문학적 영혼의 출발점이 된 풍기읍 기찻길.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것 중의 하나가 기차를 타고 눈 쌓인 러시아의 대지를 달려보는 일이다.

풍기읍 서부 2동 기찻길 옆 고향집. 아버지가 자연적인 소재로 쌓은 돌담이 어릴 적 모습 그대로 정겹다.
나는 기찻길 옆 아이였다.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서부2동 150번지. 일본식 관사의 측백나무 울타리 너머, 하루에 두 번 청량리행 중앙선 완행열차는 철커덕거리며 검은 김다발 같은 객차를 달고 천천히 달린다. 창문마다 하얗게 성에가 끼어서 희미하게 보이는 승객들은 주로 잠을 자거나, 삶은 달걀을 먹는 게 열차 안의 풍경이었다.

 

호기심을 참지 못한 아이들이 단풍잎 같은 손으로 얼음꽃을 쓱쓱 문지르며 차창 밖을 내다보기도 했는데, 나와 내 동무들은 꼭 손을 흔들어주며 기차의 꼬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참을 그렇게 서 있곤 했다. 그런 밤이면 어김없이 기차를 타고 떠나는 꿈을 꾸곤 했다.

어떤 날은 알 수 없는 처연함에 젖어 가슴이 시릴 때도 있었다. 하얀 증기가 안개처럼 순식간에 플랫폼을 집어삼키던 엄동설한이었다. 완행열차 칸칸이 빡빡머리의 모습들이 빼곡했다. 야간 징집열차. 박자가 아주 거친 노래에 맞춰 구령을 외쳐대는 결연한 표정의 청년들. 내 가슴에는 정체 모를 슬픔이 차올랐다.

지금 생각하니 그 모습들은 내가 어른이 되어서 결혼하고 첫 아이가 태어났을 무렵에 만난 데모군중 속의 대학생들과 닮아 있었다. 그땐 모두가 가슴이 답답하던 시절이었다.

어쩌면 나의 문학적 영혼의 목마름은 아마도 그 평행선의 철길을 따라 달리던 기차를 보며 시작된 건 아닐까. 지금도 기차를 보면 난 발걸음을 멈춘다. 기차여행을 첫손으로 꼽는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것 중의 하나가 기차를 타고 눈 쌓인 러시아의 대지를 달려보는 일이다.

내가 태어난 곳은 안동이지만, 아주 어릴 적에 아버지의 근무지인 풍기로 이사를 했다. 아흔을 눈앞에 두신 아버지는 지금도 그 고향을 못 잊어 하시지만, 불행히도 내가 기억할 만한 일은 거의 없다. 학교에 다니면서 명절이나 방학 때 할아버지 댁에 다녀온 단편적인 추억만으로는 ‘나의 살던…’이라는 제목의 글을 쓰기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내 유년의 시절을 보낸 곳을 찾아가기로 했다.

풍기는 바람과 돌과 여자가 많은 곳이었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소리 같지 않은가? 내륙의 제주도라 불렸던 기억이 난다.

풍요로운 땅 풍기(豊基)인데, 사람들은 바람 풍(風)자인 줄로 착각할 정도이다. 한 십여 리만 벗어나도 잠잠한 날씨였으니 말이다. 바람이 많으니 흙은 쓸려가고 길에도 밭에도 돌들이 많이 남아 돌담을 쌓기도 했다. 지금도 그 운치가 좋아 친정집에는 흙돌담 그대로다.

풍기 인견이 유명한 것은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골목마다 직조공장이 아주 많았다. 공장 주변 집들은 방 한두 칸씩은 외지의 처녀들에게 세를 주었다. 강원도 충청도뿐 아니라 전라도 처녀들도 몰려들었다. 우리 집에도 순천에서 온 처녀 세 명이 살고 있었는데, 신앙심이 깊으신 어머니는 방세를 받지 않는 대신 교회에 나가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하는 그네들은 물론 대환영이었다. 덕분에 그 후로도 오랫동안 우리 집에는 고향으로 돌아간 처녀들에게서 소박하지만 선물꾸러미가 날아들기도 했다.

빳빳하게 풀 먹인 하얀 칼라 까만 치마의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갈 때마다 괜스레 미안한 맘에, 나는 그네들의 방문 앞을 지날 땐 발뒤꿈치를 들고 걸었다.

그때를 마음에 담고 쓴 시 '겨울삽화'는 첫 시집에 실려 있다.

'죽령 산마루에서 불어오는 삭풍/ 덜컹거리는 창문 아래/ 자주 선잠 깨던 시절./ 학교 갔다 돌아오는 길/ 반쯤 기울어진 토담 모퉁이에는/ 이른 봄날의 햇살처럼/ 아이들의 박수소리처럼/ 직조공장 여공들의 재잘거림./ 노란 꿈들은 탱자나무에 열리고/ 탱자나무 가시에 찔려/ 추락하는 낮별들./ 어쩌다 내 가슴에 떨어진 낮별 하나/ 이제는 재가 되었는지,/ 生絲처럼 펄럭이는 그 겨울바람.'

내 정신의 허기를 다독여 준 곳은 소수서원이다. 그곳으로 소풍도 자주 갔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곳은 나의 순례지가 되었다. 잘 알다시피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데, 1542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관내 순흥 백운동에 세웠다.

가끔 거나하게 술에 취한 아버지는 꽤나 똘똘하면서도 울기 잘하는 딸을 골려주는 일로 농을 삼으셨다.

‘둘째, 야는 아무래도 순흥 청다리 밑에서 주워왔지 싶네~.’

훌쩍거리며 이불 속에서 울다가 너무나 속이 상해서 하루는 마음먹고 그 청다리를 찾아가 보았다. 소수서원 옆길에 정말 보잘것없는 작은 다리가 하나 있었다. 다리 아래는 야윈 물줄기가 흐를 뿐. 그렇게 나를 서럽게 했던 ‘청다리’의 전설(?)을 알고 나니 기분이 더 묘해졌다.

나는 덜컹거리는 신작로를 따라 흔들리는 시골버스에 실려 자주 서원을 찾게 되었다. 오래된 노송은 여전히 그때나 지금이나 의젓한 모습으로 하늘을 떠받치고 있고, 박물관이나 부대 시설들이 별로 맘에 들진 않지만, 서원의 뜰을 천천히 걸으면 오래된 책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어디선가 낭랑하게 글 읽는 선비의 목소리가 들려와 내 가슴을 설레게 하기도 한다. 내가 거기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이제는 선비촌이 새로 조성되어서 보여주는 곳이 되어버릴까 염려도 되지만, 그 또한 나쁘지 않다. 우리 정신의 고향을 지키려는데 얼마나 마음 뿌듯한 일인가.

다만, 모든 것이 너무 빨리 흐르는 것 같아 아쉬울 따름이다. 천천히 걷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서원 맞은편에 붉은 글씨의 경(敬)자 바위가 있다. 유학에서 강조되는 개념으로 ‘마음을 고요하게 간직하는 것’인데, 유생들의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 새긴 글이라 하니 가끔 내 마음도 얹어 보는 은밀한 즐거움 또한 놓치고 싶지 않다.

어릴 적 살던 집 마당에서 올려다보면, 3월에도 소백산 봉우리마다 눈이 쌓여 은빛으로 빛난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 일본에 노벨문학상을 최초로 안겨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雪國)의 첫 장면이 생각났다. 문학소녀 시절 그 구절에 꽂혀서 소설가가 되리라 작심했었는데…. 눈 덮인 소백산 아래, 기차와 쌉싸름한 인삼냄새와 카랑카랑한 겨울바람 맛이 있는 곳.

정감록에 ‘조선에는 보신(保身)할 땅 열이 있으니 그 첫째가 풍기’라고 기록되어 있고, 옛날 평안북도의 박천, 영변 지역에는 ‘풍기로 가야 산다’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선지 이북에서 내려온 피란민들이 많다. 얼마간 비극적인 배경의 소읍 풍기는 쓸쓸하고 외롭지만 곧은 정신의 깃을 세우고 있는 곳이다. 김삿갓이 스쳐간 발자국이나 단종의 슬픈 이야기가 어느 골짜기에서나 흘러나올 것 같은 그곳은, 경북의 최북단에 위치하면서 우듬지엔 강원도와 충북의 접경지역인 죽령을 이고 있는 인구 일만 이천의 소읍. 소소한 나의 기억으로 더듬어보기엔 너무나도 벅찬 내 유년의 고향이다. 나는 그곳이 늘 그립다.


강문숙 시인

 


덧글 0 개
덧글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