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숙 시인에게
청매화 다투어 피는 달밤
거울을 보며 머리카락 비비 꼬다가
젊은 날 그렸던 그림을
다시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고작 A4 용지 두 장 크기 한지에
이리도 많은 꿈을 그려 넣었었구나
흰 물감으로 연꽃과 연밥들을 지우다 보면
그때 그 욕심들이 양심에 걸린다
새와 나비들도 먹물로 지워 버린다
흉한 상처의 얼룩들만 남는 세월,
그 무게에 짓눌린 나의 한지는
달빛도 스러진 봄밤을 하얗게 지새운다
그래도 다 못 지워 슬픈 눈빛으로
입술 달싹거리는 나부상,
노랑나비와 청승맞은 달빛을
바라봐야만 하는 봄밤
-「청매화 그림자에 밟히다」전문
가장 검고 어두운 매화나무 둥치에 가장 희고 밝은 꽃이 핀다는 건 (자연의/생의) 비밀입니다. 흰그늘입니다.
청초하고 고결하기로는 어디 매화만한 게 있을까요?
그 비밀은 숱한 이름들(홍매화, 백매화, 설중매, 청매화, 옥매화, 황매화, 물매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韓紙’야말로 서정시의 비밀이라면, 그것은 A4 용지로는 비견될 수 없는 깊이가, 스며듦이 있습니다.
그 비쳐들고 스며드는 정서의 깊이가 이번 시집『청매화〜 』의 비밀이라면 비밀.
이런 "청매화(가) 다투어 피는 달밤". 시인의 꿈은, 상처와 얼룩은, 흔적으로만 남아있지만 그 자취가 퍽도 아름답습니다.
자취는 부재의 현존이니까요. 슬픈 눈빛도 아름답습니다. 슬픈 눈빛도 빛이니까요.
"봄밤을 하얗게 지새"우고, 그래도 못 다 지우는 꿈은 여전히 화폭속에 드러나 있거나 감춰져 있습니다. 그 은현(隱現)의 틈이,
봄과 밤의 사이(차이)가『청매화〜 』의 비밀입니다. 이런 때는 裸婦의 요염한 입술도, 노랑나비도, 청승의 달빛도 그다지 싫지 않습니다.
축하합니다. 김상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