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15    업데이트: 24-03-15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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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 시인의 석학에게 듣는 문화이야기(6)-박주일 시인과 부인사 문경현 박사 편
아트코리아 | 조회 208
정숙 시인의 석학에게 듣는 문화이야기(6)-박주일 시인과 부인사

문경현 박사 편

빛깔 입힌 언어와 무덤 마디를 남기고 떠난 박주일시인과 부인사

글 : 정숙 시인
대담 : 문경현 박사


1.봄밤은 소문만 무성하고

삼월 초순경, 봄은 자신이 곧 나타나리라는 소문만 무성히 퍼뜨려놓고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음지에 선 동백나무 꽃봉오리들은 겨울부터 추위 견디며 기다렸지만 봄을 믿을 수 없다는 걸 미리 알고 있는지 입술 꼬옥 깨물어 견디고 있다.

“문박사님, 쌍지팡이 짚고 서 계시는 모습이 지난해 보다 훨씬 좋아 보입니다. 건강하시지요? ‘慶州의 神話傳說集成경주의 신화전설집성’ 발간을 축하드립니다. 사학자이시고 경북 문화재 위원으로 큰일 하셨어요. 삼국유사를 바탕으로 한 신화 전설 뿐 아니라 민간설화가 들어 아주 노골적으로 성적인 얘기들이 들어 재미있었습니다. 차차 제 글에 소개 좀 해도 괜찮을까요?”

“예, 저보다 제 딸년이 걱정입니다. 아직 미혼인데 혼자된 애비 수발들어주는 녀석인데 고혈압에 당뇨에 지금 감기에 걸려 ‘아빠 나 죽으면 누가 아빠 심부름하지요?’ 자꾸 죽음에 대한 얘길 해서 걱정입니다.”

“죄송합니다. 사모님도 계시지 않아 딱하다는 걸 알면서도 자주 찾아뵙거나 도움이 되지 못해서 자원봉사해주는 분이라도 계셔야 할 텐데”

“아이구! 그런 말 마세요. 장성한 삼남매 아직 아무도 혼사를 정하지 못해 걱정입니다.
착한 며느리가 들어와 집안 정리 좀 해주면 고맙겠지만 요즘 누가 그런 일 하겠습니까?”

“변명 같지만 전 아흔 다섯에도 혼자 생활을 즐기는 친정엄마께도 자주 찾아뵙지 못해 늘 양심에 가책을 느낍니다. 나쁜 딸이지요. 젊었을 땐 시어른 섬긴다는 핑계로 소홀했던 습관이 지금도 바쁘다는 이유를 대며 서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박사님 또 죄송한 일이 있습니다. 저번 호 석학을 찾아서 5에서 시인 두목인데 두보라고 잘못 표기 되었고 영천 출신 인재로 노계 박인로인데 박인호라고 되어 제 무식이 폭로되었습니다. 교수님 명예에 누가 되지 않아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두목의 자가 목지라고도 했다지요?”

“예, 두목은 당나라 말 최고의 미남 시인이어서 지금의 꽃미남이었지요. 그래서 허난설헌이 그리워했고 그가 탄 수레가 지나가면 여성들이 귤을 던져서 귤이 수레 가득 넘쳤다고 했어요.”


2.징잡이 초민 박주일 시인과 미당 서정주 선생

오늘은 봉황의 자태인 팔공산 몸체 부분에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부인사에 얼마 전 세운 비석의 비문을 자랑하시고 송림사 주지스님의 점심 대접을 받기 위해 거의 동쪽 끝인 파동에서 북쪽의 팔공산으로 행차하시는 날이다.

“박사님, 며칠 전 박주일 시인님이 타계하셨습니다.”
“그래요? 연세가 벌써 여든은 훨씬 넘겼지요?”
“대구문학아카데미 대표이사님이셨고 시를 쓰다 보면 모든 사물이 스승입니다만 특히 박주일 시인은 제겐 시를 쓰고 미치게 한 분이시지요. 평생 교사로 시 지도로 징을 치신 징잡이시지요.”

“대구문학 아카데미 대표를 근 20년 지켜 오시면서 150명의 제자들과 60여명의 시인을 배출하셨지요. 그 중 전국적으로 유명한 여류 시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신경림의 ‘갈대’를 낭송하실 때의 그 열정에서 시 한편이 소설보다 더 진한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걸 깨달게 하셨지요. 칠순을 넘기느라 가물가물해진 시력 때문에 대구문학아카데미 10주년을 지나면서 16기부터 필자에게 시창작반을 넘겨주셔서 파도 센 바다에서 시의 길 찾느라 벌써 10년이 되었습니다. 덕분에 전국 60여명의 제자와 인터넷 포엠토피아에서 포엠스쿨 정숙반까지 운영하면서 여러 제자들이 계간지 ‘시안’ ‘시와 시학’ ‘전태일 문학상’ 포엠토피아 신춘문예‘ 등 그 외 여러 문학잡지로 등단하는 많은 성과가 있어 늘 감사드릴 뿐이지요. ”

“박주일 시인은 67년도에 미당 서정주 선생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등단했지요?”

“네 시집으로『노적(鷺荻)』(공저),『미간(眉間)』『모양성(牟陽城)』『신라유물시초(新羅遺物詩抄)』『는개 그리고 달빛』[물빛 그 영원][가솔송아, 꿈결 같구나]등이 있습니다.”

“미당선생님과 호형 호재 할 정도로 가까웠다지요?”

“ 예, 선생님의 시집 ”물빛 그 영원“ 속 [시인의 산문] 중에서
‘미당 형님과의 수많은 대화 가운데 지금도 가슴에 선연히 살아있는 게 하나 있다. ‘내 영원은 물빛’이란 말씀이다. 새로 시집을 꾸미면서 시집명으로 [물빛 , 그 영원]이라고 한 것도 미당 형님과의 추억을 더듬는데서 연유한다. 개구리 수영을 익히던 시절은 갔지만 내 가슴에 자리 잡고 있는 형님의 시 세계와 인연은 영원할 것이다. ’ 라는 산문에서도 잘 나타나 있고 특히 그 댁에서 자주 주무시기도 했다는데 미당선생님의 모자 또는 친필들이 선생님 댁 벽에 몇 편이나 걸려있었지요.”

“처녀 시절 경주 월성중학교 교편 잡고 있을 때 석굴암에서 경주 문인들과 내려오면서 미당선생님 팔을 부축해드린 기억이 납니다. 그 땐 시도 쓰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도 50대 젊으셨는데 왜 혼자 내려오지 못하셨을까 궁금한 적이 종종 있습니다. 시인들은 엄살이 심한 것인가? 그러고 보니 김춘수 시인님도 그 당시 머리도 손도 떨었지요. 강의 때 몹시 불안하기도 했었는데”


3. 김춘수시인과 비밀무덤

“듣기론 연세도 비슷해서 김춘수시인과도 친했다더군요.”

“예, 한 살 후배라고 들었습니다. 같이 계시는 걸 저도 자주 뵈었지요. 특히 김춘수시인님은 제 경북대학교 국문과 시절 스승님이기도 해서 늘 반가웠지만 대접해드릴 줄도 몰랐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죄송하지요. 지난해 박주일 선생님께 진지하게 미당과 김춘수 시인의 여인들에 대한 얘길 듣고 싶어 하니까 그런 건 많이 알지만 절대 말해줄 수 없다며 무덤까지 비밀로 가져가야한다고 하시더군요.”

“허허, 그런 비화는 그 분도 상당히 많다는 소문이던데요.”

“사모님은 몇 년 전 수필로 신라문학 대상을 받은 박 지평님입니다. 남편 뒷바라지에 그 동안 고생도 많이 한 늦깎이지만 글이 아주 신선합니다.”

“박주일시인의 대부분의 시들도 모발로 몇 겹이나 엮어놓은 듯이 섬세하면서 질기게 보이는 것은 신선한 상상력과 감각의 섬세함이 문장의 밀도를 통하여 얻게 된 견고성이라고 김춘수 시인이 [잡초기] 시집 해설에서 말씀하셨지요.”

한줌 뜰귀에서도 짐짓/ 잘려나가는 여름의 그림자,/ 핏줄 또한 안으로 가다듬은/ 풀잎 하나에도/ 벌레 울음은 또한 스민다./ 그 운 오래오래 삭아서/

제스네리아 빛으로,/ 제스네리아 빛으로,/

타고 있는 眉間,/ 때때로 눈 어두워/ 그대 만남이 잔잔한 虛空인/
것을 알리라./

나의 깊은 곳으로/ 아, 풀잎 속살의 제일 아픈/곳으로/다가오는 발자국 소릴/ 이젠 알리라/ 잘린 그림자여./[박주일 시, 제스네리아] 전문


“그는 늘 구체적이고 감각적이다. 술맛에 민감하고 안주 맛에 민감하다. 그는 술과 안주를 다루듯 시를 다룰 뿐이다. 라는 김춘수시인의 말씀처럼 시어 선택에도 아주 신중하셨지요.”

“또한 선생님의 말씀 중엔 ‘궁합이란 게 있기는 있는지 모르겠다. 사람의 세계에서는 흔히 궁합이 맞다, 안 맞다 말을 쓰기도 한다. 하나의 작품 세계에서도 그 작품을 이루고 있는 단어와 단어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에 이 궁합이 맞는 단어들이 모여 있나, 그렇지 않나에 따라서 작품의 성패가 결정된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하시며 시는 감동을 주거나 아니면 재미라도 있어야 한다는 점을 제자들에게 강조하셨지요”

“죄송합니다. 오늘은 제가 말이 많아져서 돌아가신 선생님을 욕되지 않게 해야 하는데”

“처용아내님, 그런 걱정 마시고 명복이나 빌어드립시다.”

" 지난 해 대구 작가회의 특집으로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그 많은 제자 중에서 왜 하필 정 숙에게 시 창작반을 맡꼈느냐 고 제가 여쭤보니 씨익 웃으시며 ‘정 숙은 발이 이뿌지 난 여자 얼굴은 안 봐 손발이 이뻐야 해’ 해서 무안했던 적이 있었지요. 죽으면 썩어질 몸이라고 아끼진 않았는데요. 마구 부려 먹었는데. 진짜라예. ”

“사실은 늘 가까이서 자가용으로 선생님을 정성으로 모시고 다니며 잘 받들어 모신 여성 시인이 있었지요. 정진규시인과도 친하셔서 하늘이 푸른 날에도 전화로 ‘눈이 펄펄 옵니다’ 하면 두 분만이 아는 어떤 암호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곤 하시더군요. 그러나 시집살이로 늘 바빴던 제겐 아주 무서운 회초리였지요. 우쨌기나 처용아내인 절 믿어주셔서 고맙지요. 박주일 시인님의 작품 중 가장 인상 깊은 작품은 ‘마디라는 것은 ’입니다.”


4. 산다는 건 마디 만드는 일

마디라는 것은

나무에는 마디가 있다
쉬었다 간 자리다
혹은 그 흔적이다
달리는 열차의 마디는 역이다
나의 집은 나의 마디다

무덤은
인간이 남기고 가는
마지막 마디다

“ 예, 작품 좋습니다. 선생님이 남기신 시집들도 마디가 될 것이고 산다는 것이 마디 만드는 일인 것 같습니다. 가르치느라 평생 징을 치시다가 결국 무덤이란 마디를 남기고 떠나셨군요.”

“참 복이 많으신 분입니다. 젊은 사모님께서 지극정성으로 모셔서 건강하셨고 그렇게 원하시던 대구문학아카데미 20주년 행사를 1월에 [아르정 탱]에 참석하셔서 ‘제자들을 옛날엔 향기만 맡고도 알았는데 이젠 선생님 누굽니다 라고 해도 잘 못 알아본다’고 하셔서 모두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습니다. 85세를 일기로 돌아가시는 날 아침엔 식사 잘 하시고 ‘봄날은 간다’ 노래까지 정확하게 부르시고 운명하셨다는군요. 선생님을 위해 제가 평생 처음 쓴 조시입니다. 한번 들어 봐 주시렵니까? 교수님 부끄럽습니다.”



弔詩-楚民 박주일 선생님을 애도하며

-정숙-

“갈수 있겠는가
갈수 있겠는가
뜨거운 숨소리 밀치고
뜨거운 가슴으로 훌쩍 떠날 수 있겠는가 ”*

수련이나 겨자씨 보다 작은 피그미 꽃 술 속에서
우주를 찾아내시던
꼿꼿하신 시성(詩聖) 한 분이 뒷짐 진 채
이승을 아주 떠나시려 하나니

잠든 들풀들과 나무들
그들이 세상의 중심이란 걸 깨우치기 위해
평생 징을 치시더니
징도 징채도 내려놓으시어
가벼이 아름다운 세상으로 혼자 길 떠나시려 하나니

남은 이들 신 새벽 벼랑 끝자락에 서서
슬픔 나누며, 안경 너머 형형(炯炯)하신
선생님의 눈빛 그리워합니다

저 정월의 하늘 위로
흩어지는 푸른 징 소리!
평생 징잡이셨던 초민 박주일 선생님을
이승에서 종천(終天)코져 하옵니다

선생님 부디 잘 가소서, 열린 하늘
무지개를 타시고 고이 가소서, 가셔서
우주 속 징소리의 떨림을 담고 다시 오소서

오셔서, 수성 들판 어디쯤 들꽃으로 오소서
선덕여왕과 지귀(志鬼)가 지나쳤을
반월성 둔덕 설유화 꽃그늘로
돌 틈 사이 노루귀 한 쌍으로 오셔서
어리석은 나무들에게 그 징소리 다시 울려 주소서
*박주일의 수련에게에서


송림사 도착이 12시 전인데 미리 정갈한 점심상이 차려져 있어 모처럼 사찰 음식으로 공양하고 다과상에 우전차를 주지 스님이 직접 끓여주신다. 송림사 비문에 대한 의논을 하시고 이상번 시인과 함께 곧 부인사로 향한다.

5.선덕여왕과 부인사 초조대장경(初彫大臧徑)

부인사는 고려 현종 때부터 문종 때까지 도감(都監)을 설치하고, 우리가 세계에 자랑하는 해인사 소장 팔만대장경보다 무려 200년 앞서 각조된 초조대장경(初彫大臧徑)이 봉안되었던 절이라는 사실 외, 그래서 팔만대장경을 再조대장경이라고도 한다는 말씀과 신라 제27대 선덕여왕(?∼647)의 원당이 있는 사찰이고 한때는 2,000여 명의 스님과 39동의 당우를 갖춘 대가람으로 전국에서 유일하게 승시(절에서 필요한 물건을 사고파는)를 열었다는 유서가 깊은 절이라고 말씀하신다. 앞으로 2012년이 되면 초조대장경 조판 천년이 되는 해라고 운흥사 법상스님이 하신 말씀을 떠올린다.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桐華寺)의 말사로, 부인사(符印寺) 또는 부인사(夫人寺)라고도 하지요.”

“창건연대와 창건자는 알지 못하지만 예로부터 사당인 선덕묘(善德廟)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된 절로 짐작할 뿐입니다. 판각은 몽골의 침입으로 대부분 소실되었고, 현존하는 1,715판도 일본 교토[京都] 난젠사[南禪寺]에 보관되어 있어요. 몽골 칩입 이후 중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다시 불탔습니다.
그리고 전국에서 유일하게 정기적인 승가시가 섰다고 전해지는 곳으로, 1930년대 중건된 선덕묘에서는 음력 3월 보름에 선덕제를 지내는데 덕과 미모를 갖춘 여인들을 뽑아 선덕여왕의 어진을 모신 숭모전(崇慕殿)에서 선덕대왕 숭모제를 매년 지내고 있습니다.”

숭모전 문을 삼월 그 행사 때만 공개한다고 묵묵히 닫혀 있다.
“선덕여왕 어진을 유황 화가님이 그리셨다는데 ”

“예, 제 친구이기도 하고 한국화 화가이고 경북대학교 예술대학 교수였지요“

“유황교수님이 시에도 관심이 많으셔서 제 졸시 ‘학은 함부로 울지 않는다’ 시화를 그려주신 고마운 분이라 저도 뵌 적이 있습니다.”

“ 선덕여왕은 삼국유사에도 기록이 되어 있지만 예지력이 뛰어나 모란꽃이 향기가 없다는 걸 또는 여근곡에 백제군이 침입한 것도 미리 알았다고 전해 오지요.”

“여왕으로 아주 현명하고 기개가 뛰어났던 것 같습니다. 고구려와 백제 연합군에 대항해 羅唐연합군을 결성해 그 침략군을 방어했고 첨성대와 황룡사9층탑을 세우기도 했다지요?”

“예, 천문을 관측하고 호국의 성지를 세우고 여왕을 짝사랑한 지귀 이야기도 전해내려 오지요,”

“10년 전 부부 모임에서 여기를 지나 수태골로 등산을 자주 했었는데 그 새 대웅전이 새로 잘 지어졌군요.”

“많이 소실되기도 했지만 문화재로는 신라시대의 당간지주, 쌍탑(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7호), 석등(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6호), 석등대석(石燈臺石), 마애여래좌상, 배례석(拜禮石) 등이 있고 이 밖에도 주춧돌, 화려한 문양의 장대석(長臺石)을 볼 수 있습니다. ”

“경주에서 문인들과 달밤에 선덕묘로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무덤에 가락지를 묻어주는 의식을 행하기도 하고 아름다운 추억인데 그 당시 서영수 이근식 시인님들이 같이 동행하기도 했지요.”

법당에서 박주일 시인님의 명복을 빌고 나오는데 주지 스님이 환히 웃으시며 맞이하신다.
“ 이상번 시인님, 여기 주지 스님이 비구니시군요. 대청소를 하나 봅니다.”

“예, 몸집도 자그마한 분이 큰일을 도맡아 아주 당차면서도 싹싹하십니다. 종교를 떠나 이런 역사적인 곳들이 잘 보존 되어야지요. 그 발자취를 현장을 우리가 밟고 있다는 것이 행복 아닌가요. 후손들에 잘 보존해 물려줘야 할 것입니다.”

새삼 엄숙한 마음으로 옷깃을 바로 잡는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작별을 고하고 있다.
짧은 꿈 한 자락일 뿐인 이 세상 얼마나 더 부지런히 살아야 시간이 엿가락처럼 늘어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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