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15    업데이트: 24-03-15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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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 시인의] 석학에게 듣는 문화 이야기(1)
아트코리아 | 조회 276
[정숙 시인의] 석학에게 듣는 문화 이야기(1)
문경현 박사 편 - 모윤숙과 이승만, 이광수와 미당


-정숙 시인과 문경현 박사 대담(1)-
시인은 시에 순정만 바치면 다 되는가?
-모윤숙과 이승만, 이광수와 미당-


1.봄밤이라예!


오월은 계절을 중모리에서 점점 중중모리장단으로 몰아붙이며 솔향 터트립니다. 우포늪은 자운영 꽃무늬 치맛자락 펼치며 ‘봄밤이라예’ ‘참말로 봄밤이라예’ 중얼중얼 뜨거워지는 몸 감당하지 못해 파문을 일으키고 있겠지요. 해마다 그 파문이 ‘최남선 주요한’ 등 시인들 가슴에 너울져 이어온 지 어언 1세기, 늙은 느티나무 굵은 가지들이 새삼 우러러 보입니다. 세상 제 것인 냥 팔 흔들어대는 잔가지 틈에 가려 그늘져 보이지만 현대 시문학을 지탱해온 대들보들입니다. 그 분들 중에서도 일제강점기와 전쟁의 와중에서 소위 그 시대 신여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궁금해지는 걸 보면 필자도 마음의 여유 이제 좀 생긴 것인가요? 의문부호가 책장으로 인터넷 검색으로 훌륭한 학자를 찾아 발걸음이 빨라집니다.(정숙 시인)


2.문 경현 박사님을 찾아서

시라는 밑도 끝도 없는 짝사랑 이십년이 필자에게 선물한 것은 많은 시인들과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즐거움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시인은 아니지만 시인보다 더 시를 알고 아끼는 학자 한 분을 최근 봄밤에 만난 일입니다. 지금 경북대 명예교수 문경현 [文暻鉉] 문학박사님, 한국사학계의 태두로 ‘신라사연구, 고려사 연구’등 수많은 저서와 학술활동으로 역사 바로 세우기에 평생을 헌신한 대석학이라고 이상번 시인이 귀띔을 해주었습니다. 일흔 넷의 연세에 교통사고로 쌍지팡이를 짚고 계시면서도 경주 신화와 전설 모음집을 엮고 계시는데 우연히 식사를 같이 하게 되어 그 분의 문학 사학 철학 유교 불교 영문학 한문학 등 넓은 지식에 탄복했을 뿐 아니라 그런 예기를 듣는 사람이 흥겨워 ‘얼시구!! 무릎을 칠 정도로 재담가여서 그 분의 말씀을 토대로 잠시 신여성을 그리워하는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특히 한시 두추낭 [杜秋娘] 해석은 그야말로 처용아내가 “봄밤이라예, 안그래예”를 내뱉는 느낌이었습니다.

杜秋娘

勸君莫惜金縷衣
勸君惜取少年時
花開勘折直須折
莫持無花空折枝

님에게 권하노니/ 금으로 수놓은 비단옷 아끼지 마소서/
님에게 권하노니/ 청춘을 아끼소서/
꽃 피었을 때 꺾고 싶으면/ 지금 바로 꺾어소서/
꽃 지고 빈가지만 꺾게 될/ 때를 기다리지 마소서/


추적추적 초여름 비 내리는 저녁 제 몸에 핀 꽃 떨어져 빈가지 꺾지 말고 빨리 꺾어달라는 그 말에 공감하면서 이야기는 월북시인 이용악의 시집 ‘오랑캐꽃’으로 넘어갑니다.
그의 ‘소원’이란 시 한편 읊으며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습니다. “나라여 어서 서라/ 우리 큰 놈이 보고픈 아저씨/ 柳呈이도 나와서/ 토장국 마시게 /나라여 어서 서라 /꿈치가 드러난 채 /휘정휘정 다니다가도 /밤마다 잠자리발 /가없는 가난한 시인 山雲이도 맘놓고 좋은 글 쓸 수 있게 /나라여 어서 서라 /그리운 이들 너무 많구나 /옥이랑 껴안고 /한번이나 울어도 보게 /좋은 나라여 어서 서라./”그를 진정한 민족 시인이라며 자연스레 이광수로 넘어갑니다. 친일을 하고 반성 없이 자기합리화 시킨 작가라며 ‘일제 강점기 젊은이들에게 전쟁에 나가라고 부추기자 주위에서 못마땅해 하니까 ’어허 이 사람들 이렇게 시국관이 없어 어쩌나?‘ 한 그의 말이 유명하다며 그의 사생활을 소상히 얘기해 주십니다.

3.“모윤숙처럼 잘 난 여자는 처음 봤어”

“ 소설가 이광수가 동경유학 시절 늑막염과 폐결핵을 앓던 중 본 부인 백혜순을 두고 나중 의사가 된 제 2부인 허영숙을 만났고 신채호 밑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친일로 돌아섰지. 휴양 차 간 금강산 장안사 ‘산방약수’에서 모윤숙을 만나 嶺雲이란 호도 지어주었고 안호상 박사를 소개해 아이까지 있는 남자와 결혼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지. 나중 그 아이 계모[모윤숙]가 구박한다는 얘기도 한다고 했지. 나중 이혼을 했지만. 납북 후 이광수에 대한 사랑을 쓴 일기체의 감상적인 장편 산문시집 《렌의 애가》(1937)가 스테디셀러가 되면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시인이 되었지, 한국 문단 최초로 시집 '렌의 애가'가(1959) 유네스코 추천작품으로 선정도기도 했지 .사십대의 모윤숙을 직접 만났었는데 태어나고 그렇게 인물 좋은 여자는 처음이었어. 정 숙 시인처럼 한 송이 모란꽃이라 할까? 대단한 미인이었지. 그러나 1950년 후반 청구대학에서 문학의 밤 이어령, 모윤숙, 이무영[농민소설가]가 참여해서 모윤숙이 ‘나보기가 역겨워’ 소월 시 낭송 해설을 할 때 70대 모습에서 많이 실망했어. 품위 있게 늙어가는 사람도 많은데 뚱뚱하기도 하지만 세월에 풍화된 모습이 아주 추하게 느껴졌어.

4.친일을 할 수 밖에 없었던가?

“함경남도 원산 출생에 개성의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와 서울의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졸업했고 이후 교사로 근무하는 동안 〈피로 색인 당신의 얼골을〉(1931)을 《동광》에 발표하면서 등단한 뒤 교사, 기자이자 시인으로 활동했어. 그런데 아쉬운 것은 태평양 전쟁 중 각종 친일 단체에 가입하여 강연 및 저술 활동으로 전쟁에 협력한 일이지. 조선문인협회에 간사로 가담해 친일 강연을 했고 임전대책협의회(1941), 조선교화단체연합회(1941), 조선임전보국단(1942), 국민의용대(1945)에 가담하여 《매일신보》등에 친일 논설을 기고했다는 사실이지. 특히 일본 제국주의의 대동아공영권 논리를 형상화한 〈동방의 여인들〉(1942)을 친일 잡지 《신시대》에 기고하고 《매일신보》에는 〈호산나 소남도〉(1942)라는 전쟁 찬양시를 발표하였으며, 지원병으로 참전할 것을 독려하는 시 〈어린 날개 - 히로오카(廣岡) 소년 학도병에게〉(1943), 〈아가야 너는 - 해군 기념일을 맞아〉(1943), 〈내 어머니 한 말씀에〉(1943) 등을 연달아 발표하는 등 강요에 의한 것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했다는 점이지. 따라서 그는 이 시기에 비슷한 주제의 시들을 창작한 노천명과 함께 여류 문인 중 가장 노골적인 친일파로 분류되고 있어 안타까워요. ”

5. 조선민족의 딸'이기보다 '동방의 딸'이기를 강조

“특히 '조선민족의 딸'이기보다 '동방의 딸'이기를 강조한 친일파였지만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한 몫을 단단히 했어요. 이혼 후 모윤숙은 이승만의 비서로 일하면서 건국 일등공신이 되었어. 이승만이 그녀에게 인도대표인 메놈박사가 이승만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도록 잘 녹여보라 부탁하자 그녀는 영문학에 도통한 춘원과 함께 영시 짓기도 하면서 결국 메놈이 사랑하는 미쓰 모를 위해 그렇게 하겠다는 허락을 얻어냈다는 일화는 유명하지요. '
“친일한 그녀가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를 비롯한 수많은 전선시를 써내며 한국전쟁을 '숭고한 반공전쟁'으로 미화하는데 크게 공헌했다는 건 아이러니지. 죽음의 공포에 떨며 죽어갔던 어린 병사에게 울림 있는 시로 '조국의 품'을 부여한 것도 그녀였으니. 하지만 정작 그 병사가 목숨 바쳤던 조국을 불명예스럽게 했던 장본인들이 모윤숙을 비롯한 '친일파'들이었다는 사실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묻혀 졌으니 정의감에 불타는 어린 병사가 살아남았다면 모윤숙의 헌정시를 받아들이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엄청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할 수 있지만 그 변명을 또 무시할 수 없어 혼란스럽기도 하니 쯧쯧... 그 때 죽은 어린 국군들이 늦게 그 사실을 알고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겠는가? 그 후 본인이 원하는 대로 유엔대사로 임명받을 정도로 대통령의 신임을 얻어 프란체스카 여사가 질투할 정도였다는 얘기가 있어요. 또한 이광수와 모윤숙의 관계가 얼마나 돈독했던지 친일로 잡혀간 춘원을 위해 반민특위까지 해체 시켰다고 하니 사랑의 힘이라고 해야 할지 권력의 힘이 막강했다고 해야 할지...“

6.예술가는 생애가 빛나야 한다.

대구시내 파동 약간 비탈진 곳에 자리 잡은 교수님의 정원 4백년 묵은 향나무들이 꼿꼿이 고개를 들고 서 있는데 비에 젖어 더욱 짙은 초록빛입니다. 백 여 년 된 백모란이 져버린 꽃잎을 아쉬워하고 있는지 깊은 침묵입니다. 박사님은 반백의 머리카락 슬어 넘기며 두어 시간이 지났는데도 자세 한 번 흐트러짐 없습니다. 그 시대 친일에 대해 어떻게 정리해야 할 지 혼란스럽다는 필자의 말에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모윤숙이나 노천명 등 몇 명은 시대를 잘 못타고 난 죄이니 그래도 용서한다고 하더라도
이광수와 최린 미당은 절대 용서할 수 없지. 예술가는 생애가 빛나야 한다 는 말이 있는데 그들은 끝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고 자기 합리화만 했어. 특히 미당은 각 정권마다 아부해 일신의 영달을 꾀했으니 기가 막히는 일이지... 물론 우리 민족어를 갈고 닦아 주권을 세운 건 인정하지 그러나 그런 것도 정지용이 이미 닦아 놓은 길 아닌가“ ”맞습니다.“ 덩달아 대구 작가회의 이사인 이상번 시인도 맞장구를 칩니다.

7.마무리

기억력이 어찌 저렇게 좋을 수 있는지 최린과 나혜석 노천명 이미륵과 전혜린 이야기까지 한시와 괴테의 시 한편 원어로 줄줄 읊으시니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그제서야 배가 고프다며 밤 8시 넘어 갈치 정식 집으로 나섰습니다. 나중 나혜석과 최린 노천명과 양주동 박사의 얘기도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기꺼이 시간을 내어주신 사학자 문경현 박사님께 감사드리고 조언을 아끼지 않으신 이상번 시인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글, 대담 정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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