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15    업데이트: 24-03-15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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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학을 찾아서 2
아트코리아 | 조회 227
석학을 찾아서 2

목이 길어야 관이 향기로운가 [노천명과 김광진 ]
---정 숙 [처용아내]

1. 비슬산[包山]가는 길엔 일연스님이 처용가를 옮겨 집필하시고

“박사님, 자귀나무 연분홍 깃털꽃송이들이 물 없는 계곡을 지키고 있군요.”
“예, 많이 가물었어요. 그래도 저 숲은 싱싱하군요.”
현풍 비슬산 대견산 정상엔 신라시대 절터가 남아있고 그 때의 삼층석탑이 아직도 먼 발 아래 낙동강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그 뒷들판엔 봄마다 참꽃축제가 열리는 곳입니다.
“공룡시대부터 긴 역사를 간직한 비슬산이 핏빛으로 물드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흘러가다가 낙동강에 닿지 못하고 서성이는 암괴류  때문에 온 산천이 핏빛 울음바다 아닐까요? ” 필자의 엉뚱한 생각에 모처럼 크게 웃었습니다.
“ 경주의 전설과 신화 그리고 삼국유사 번역 잘못된 곳 박사님의 수정 작업은 거의 마무리 되어 가고 있는지요?”
“예, 언젠가 처용아내한테는 그 부분도 얘기해드리도록 하지요.”
“정 숙시인, 자신을 처용아내라고 하면 남자들이 오해할 텐데... 아참, 정 시인의 첫 시집 ‘신처용가’가 시극으로 공연되었다니 정말 축하드립니다.” 장난스럽게 씨익 웃으신다.
“네 덕분에 호응이 좋았습니다. 풍자와 해학이라 볼거리와 아픔이 있다고...”
비슬산 오르는 길목 유가사 절에 지난 오월 일연보각국사님과 조오현 선사님의 시비를 세운 이상번 시인이 박재희 시인과 한문학자 이 정 화 박사와 경북대학교 명예교수님이시고 사학자이신 문경현 박사님을 모시고 산봉우리 이름이 잘못 표기된 부분을 조사하고 확인하는 길입니다. 문 박사님은 쌍지팡이로 삼층석탑이 자리한 산 정상까지 그 더위 무릅쓰고 올라가시면서 조오현 스님의 ‘비슬산 가는 길’과 직접 번역하신 일연스님의 포산 관기觀機와 도성道成 두 도인을 칭송하는 한시를 맛깔스레 낭송하십니다.

비슬산 구비 길을 누가 돌아가는 걸까/나무들 세월 벗고 구름 비껴 섰는 골을/
푸드득 하늘 가르며 까투리가 나는 걸까/

거문고 줄 아니어도 밟고 가면 운(韻) 들릴까/ 끊일 듯 이어진 길 이어질 듯 끊인 연(緣)을/ 싸락눈 매운 향기가 옷자락에 지는 걸까/

절은 또 먹물 입고 눈을 감고 앉았을까/ 만(萬)첩첩 두루 적막(寂寞) 비워 둬도 좋을 것을/
지금쯤 멧새 한 마리 깃 떨구고 가는 걸까/   [ 琵瑟山(비슬산)가는 길,무산 (霧山) 조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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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허난설헌은 巖塊流에 앉아 울고 있고

세계 최고로 길이가 길다는 비슬산 [옛날엔 포산이라고 했음] 암괴류, 흘러가는 너럭바위에 앉아 요절한 허난설헌의 남편을 기다리는 시 奇夫江舍讀書  칠언절귀 한 수 외시며 사대부 집안에 갇혀 꼼짝달싹할 수 없었던 여인네의 답답함을 암괴류에 비유해 주십니다.
“몇 억년 한 자리에 머물러 있던 저 바위들이 얼마나 답답했으면 흘러 내려갈 작정을 했겠어요.  저 바위에 귀를 대 보세요.  물 흐르는 철썩철썩 소리 들리지요.”
燕掠斜첨兩兩飛     제비는 쌍쌍이 처마 끝에 나는데
落花요亂撲羅衣     떨어지는 꽃잎은 요란하게 비단옷을 때리는데
洞房極目傷春意     동방에서 기다리는 가슴 찢어지는데        
草綠江南人未歸     꽃 피고 잎 피는 호시절 님은 돌아오지 않네 --[-奇夫江舍讀書 ]

“그 외로움이 주옥같은 한시를 남기게 했으니 역시 시인은 예술가는 고독이 약이지요. 그러나 허난설헌의 한시들이 허균이 옮긴 것들이 대부분인데 표절논란이 있어 안타깝습니다.“
어서 관이 향기로운 시인을 만나고 싶다는 필자의 재촉에 이 상번 시인이 노천명의 ‘사슴’을 읊어주면서 한숨을 쉽니다.
‘목이 길긴 길었는데 세상을 잘못만나 끝까지 친일파였지요.’ ‘평생 연인을 기다리며 홀로 지낸 시인 자신의 자화상이기도 하고’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관(冠)이 향기로운 너는/무척 높은 족속(族屬)이었다 보다./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
어찌할 수 없는 향수(鄕愁)에 /슬픈 모가질 하고/먼 데 산을 바라본다.  -노천명 , 사슴 전문-


3. 그녀의 사랑은 목이 길 수밖에 없었는가

“그렇지요. 남빛 치마와 흰 저고리를 즐겨 입었다는 노천명 시인은 한국시사에서 시적 대상을 시적 화자와 겹쳐 놓음으로써 현대 서정시의 동일성 시학을 선보인 최초의 여성 시인이었지요. 황해도 장연 출생으로 1934년 이화여전 졸업. 재학중(1932) 신동아에 "밤의 찬미"를 발표하며 등단. 모윤숙과 함께 당시로서는 몇 안 되는 여류 시인의 한 사람이었고 점차 명 시인으로 부각 받게 되었어요. 첫째, 자기중심적인 정서 특히 고독에 대한 심도 있는 표현. 둘째, 시인 자신의 농촌 생활로부터 그려낸 향토적인 정경의 객관적 묘사. 셋째, 역사적 국가적 인식의 반영이 바로 그것인데”
“노천명과 김광진의 사이는 불륜이었군요?”
“ 일제 강점기에 보성전문학교 교수인 경제학자 김광진과 연인 사이였지요. 부인 있는 남자와 사귀었지만 나중 이혼을 했으니 불륜은 아니지요. 결혼 날을 두 번이나 잡았는데 그러고 그 사랑 끝까지 지켰으니 그녀의 사랑 숭고하다고 해야겠지요. 노천명과 절친한 작가 최정희가 시인 김동환과 사귄 것과 함께 문단의 화제 중 하나였고, 두 사람의 사랑을 유진오가 소설화하여 묘사한 바 있지요. 김광진은 광복 후 가수 왕수복과 함께 월북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가족을 만나러갔지요. 고향이 평양이었고 돌아와 결혼하려고 했는데 공습이 있어 그 후 김일성에 잡혀 돌아오지 못했다고  알고 있어요. 노천명은 그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평생 혼자 살았으니 ‘사슴’이란 바로 자신의 고독을 표현한 내용이지요. 시를 쓰려니 남들이 이미 좋은 말 다해버려서 못 쓴다던 양주동박사가 노천명시인에 반해 프로포즈를 몇 번 했지만 거절당했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양주동의 선구자란 시 대단하지요.“
“김광진과 만난 뒤인가요?”
“아니요, 그 전이지요. 양주동은 영문학자에 국문학자 시인으로 국보라고 했지요.”

4. 철저한 친일 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태평양 전쟁 중에 쓴 작품 중에는 〈군신송〉등 전쟁을 찬양하고 전사자들을 칭송하는 선동적이고 정치적인 시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고.〈학병〉 〈창공에 빛나는〉 〈흰비둘기를 날려라〉친일 시들이 있습니다. 노천명은 해방되기 직전인 1945년 2월25일 시집 〈창변〉을 출판하고 성대한 출판기념회까지 열었는데 이 시집의 말미에는 9편의 친일시가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출판한 지 얼마 안 되어 해방이 되자 노천명은 이 시집에서 친일 시 부분만을 뜯어내고 그대로 계속 시판하였지요. ” 사학자이며 한학자 식물과 동물까지 박학하신 문경현 박사님은 다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친일시를 낭송하십니다.

남아면 군복에 총을 메고/나라 위해 전장에 나감이 소원이리니/

이 영광의 날/나도 사나이였드면 나도 사나이였드면/
귀한 부르심 입는 것을-/

갑옷 떨쳐입고 머리에 투구 쓰고/
창검을 휘두르며 싸움터로 나감이/남아의 장쾌한 기상이어든-/

이제/아세아의 큰 운명을 걸고/우리의 숙원을 뿜으며/
저 영미를 치는 마당에랴/

영문(營門)으로 들라는 우렁찬 나팔소리-/

오랜만에/이 강산 골짜구니와 마을 구석구석을/
흥분 속에 흔드네-/[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노천명]

5. 노천명이 모윤숙의 위치를 염탐하다
“그녀는 이화여전 동문이며 기자 출신으로서 같은 친일 시인인 모윤숙과는 달리 광복 후에도 우익 정치 운동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요. 1950년 북조선의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피신하지 않고 임화 등 월북한 좌익 작가들이 주도하는 조선 문학가 동맹에 가입하여 문화인 총궐기대회 등의 행사에 참가했다가, 대한민국 국군이 서울을 수복한 뒤 조경희와 함께 부역 죄로 체포, 투옥되었지요. 모윤숙 등 우익 계열 문인들의 위치를 염탐하여 인민군에 알려주고 대중 집회에서 의용군으로 지원할 것을 부추기는 시를 낭송한 혐의로 징역 20년형을 언도 받아 복역했으며, 몇 개월 후에 모윤숙이 연판장을 돌려 사면을 받아 풀려났어요. ”
“아무리 기자로,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만 .......” 얼른 이상번 시인이 “ 다음 이 시도 대단한 친일이지요. 들어보세요” 하며 시 한편 읊는다.



부인근로대 작업장으로/군복을 지으러 나온 여인들/
머리엔 흰 수건 아미 숙이고/바쁘게 나르는 흰 손길은 나비인가/

총알에 맞아 뚫어진 자리/손으로 만지며 기우려 하니/
탄환을 맞던 광경 머리에 떠올라/뜨거운 눈물이 피잉 도네/

한 땀 두 땀 무운을 빌며/바늘을 옮기는 양 든든도 하다/
일본의 명예를 걸고 나간이여/훌륭히 싸워주 공을 세워주/

나라를 생각하는 누나와 어머니의 아름다운 정성은/
오늘도 산만한 군복 위에 꽃으로 피었네/

노천명의 친일 시 [부인 근로대]시낭송에 눈 지그시 감은 문경현 박사님 혀를 차며 다음 말씀을 이어 가신다.

6. 진정한 여성 선각자는 나혜석 화가

“그 시대의 정신과 문화를 이끌어가야 하는 문인으로서 노천명의 국가관엔 애국심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 무엇보다 안타깝습니다. 나약한 여성으로 시대를 잘 못 타고 났다고 동정은 하지만 그보다 정말 관이 향기로운 신여성은 나혜석 화가지요. 정월 나혜석은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일 뿐만 아니라 최초의 여성 소설가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개인전을 연 여성화가, 선각자, 시대를 앞서간 여성 운동가, 독립운동가 등 수많은 수식어가 따라다닙니다. 최린과 이광수의 야비함과 그 당시 동경 유학 간 신여성과의 관계 그리고 그녀에 대한 얘기는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지요.”

7. 삶을 아끼려면
말을 아끼면 생각을 아끼는 것이고 생각을 아끼는 것은 삶을 아끼는 것이라고 또 그 삶을 아끼는 이가 시인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현대시 백주년을 맞아 험난한 시대의 불꽃이었던 신여성들의 삶과 예술 그리고 사상을 더듬으면서 시인으로서의 책임감과 빛나는 생애를 위해 나아가야 할 길을 숙고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진정 삶을 아끼는 시인이 되려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넘어가는 해 아쉬워하며 비슬산계곡에 앉아 하루의 노동을 위로합니다. 유가사 주지스님이 마련하신 저녁상 위 서로 부딪치는 참소주 잔속에 불콰하게 익은 노을이 슬며시 들어와 앉습니다. 참고로 삼국유사에 등장한 포산[비슬산]이 미당의 시엔 소슬산으로 나옵니다. 일연선사의 한시에서 칭송했던 관기와 도성 두 도인의 우정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道人 觀機는 소슬山의 남쪽 봉우리 아래 草幕을 엮어 살고, 道人 道成이는 소슬山의 北녘 모롱 밑 洞窟 속에 계시면서, 서로 친한 친구인지라, 十里쯤 되는 둘 사이를 오락가락 하고 지냈읍니다만, 그 만나는 時間 約束은 某年 某月 某日 某時와 같은 우리들이 쓰는 그런 딱딱한 것이 아니라, 훨씬 더 멋들어진 딴 標準을 썼읍니다.

  즉-너무 거세지도 無力하지도 않은 이뿐 바람이 北에서 南으로 불어 山골 나뭇가지의 나뭇잎들이 두루 南을 향해 기울며 나부낄 때면, 北嶺의 道成이는 그걸 따라 南嶺의 觀機를 찾아 나섰고, 그 바람을 맞이해서 觀機는 또 마중을 나왔어요.

  적당히 좋은 바람이 그와 또 반대로 南에서 北으로 불어 山의 나뭇가지의 나뭇잎들을 모조리 北을 향해 굽히고 있을 때는, 南嶺의 觀機가 北嶺의 道成이를 찾아 나서고, 道成이는 또 그 바람 보고 마중을 나오고……. 어허허허허허허!……. [소슬山 두 道人의 相逢時間,서정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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