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15    업데이트: 24-03-15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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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 - 정숙 시집, 『연인, 있어요』를 읽고 ----이구락시인
관리자 | 조회 435

□ 북 리뷰 - 정숙 시집, 『연인, 있어요』를 읽고

 

생의 전략으로서의 시 쓰기

 

 

이구락

 

 

  2020년 새해 벽두에 정숙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 『연인, 있어요』가 나왔다. 초판 발행일이 120일이다. 『건달바』 편집진이 금년도 발행시집 목록에서 빠뜨릴 정도로 눈에 잘 띄지 않는 시기다. 이처럼 연말이나 연초 같은 해바뀜의 어수선한 시기는 문학 서적 출판은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뒤늦게 필자에게 서평 의뢰가 왔고, 정 시인도 뒤늦게 부랴부랴 책을 부쳐왔다. 필자 또한 연말 여러 일거리에 밀리며 뭉그적거리다 원고마감 1주일 남기고 본격적으로 읽어나갔다. 뜻밖에 기대 이상으로 잘 읽혀, 올해 읽은 시집으로는 ‘베스트 10’에 꼽고 싶다. 울퉁불퉁 결이 고르지 못한 시편들이 이번 시집에서는 많이 정제되고 있고, 시인으로서 절정기를 맞이한 원숙미까지 여러 시편에서 느낄 수 있어 시 읽기의 즐거움을 오래 누릴 수 있어 한없이 즐거웠다.

 

1. 생의 전략으로서의 시 쓰기

 

  시집을 끝까지 읽고 난 첫 느낌은 시에 대한 시인의 맹목적인 몰입과 시인으로서의 무한한 자긍심이 이토록 강렬할 줄 몰랐다는 점이다. 이런 정서는 주로 등단 초기 한 10년 정도의 젊은 시인에게서 느껴지는 풋풋한 감정인데, 고희를 넘기고도 시인은 이 설레는 감정이 조금도 빛을 잃지 않고 있어 무척 신기하고도 부러웠다.

  비교적 늦깎이로 등단하였지만, 등단 28년 만에 신작시집 7, 시선집 2, 영상시집, 전자시집 등을 발간하고, 시운동으로는 수많은 시극 연출 및 공연과 여러 곳에서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는 시 강의, 그리고 문학단체의 회장직을 맡는 등 활동반경이 넓고도 다채롭다.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그의 부단한 시 쓰기와 시운동은 가히 폭발적이다. 이러한 열정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라는 의문이 문득 든다. 나름 짐작건대 이는 늦은 등단에 대한 분풀이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평범한 여자로서의 삶을 뿌리치고 시인이 되어 문단에 발을 디디는 순간 휴화산처럼 조용히 속으로만 들끓던 끼가 활화산이 되어 분출되면서 폭발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조용히 한 여성으로서 현모양처의 삶을 살던 정숙이라는 여인이 어느 날 생의 전략으로서 시 쓰기를 선택했다는 뜻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이러한 추진력과 열정은 시에 대한 그의 몰입과 사랑에서 나오는 행동일 것이다. 한 번도 슬럼프를 겪지 않은 부단한 시에 대한 그의 사랑은 아래의 시편들에서도 쉽게 느낄 수 있다.

 

 

) 사랑하는 이들 사이 애증과 / 꽃과 꽃가시 사이 / 해맑은 웃음과 눈물 사이 / 모든 틈새에 벽지를 발라 위장해야 한다며 / 없는 벽, 쌓기도 하는 난 허술하고도 / 시시한 시, 도배장이 (「도배장이」 부분)    

 

) 시인은 / 날개 없이도 날아오를 수 있다는 걸 / 사유라는 날개는 하늘 끝까지 / 아니 그 뒤안길까지 / 하루 몇 번씩이라도 날아갈 수 있다는 걸 / 알면서 또 애써 날개를 펼쳐보는 것이다 (「날치」 부분)     

 

) 시인이란, 반구대 바람내장 안 누드로 숨어 있는 선사시대의 향유고래 축제와 하늘을 찌를 듯한 함성과 사랑의 아우성까지 귀담아 잘 읽어내야 한다. (「울산 반구대 암각을 읽다」 부분)

 

) 이슬 같은 여자, 푼수 같은 여자 / 애교 많은 여자, 가슴 큰 여자, 못 말리는 여자, / 솔직하면서 인색하지 않은 여자 / 눈물 같은 여자, 그러나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여자, /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늘 행복해하는 여자 / 쪼다 같은 여자, 그래서 귀여운 여자 (「밀서와 검은 비닐 봉다리」 부분)  

 

) 옛 향촌거리 녹향에서 처용아내 강의를 하고 / 시낭송을 가르친다니! / 시간은 냉정히 떠나가면서도 내게 기회를 주었다 // ... / 찻집 고우에서 / 북 콘서트를 응원하는 함석지붕 봄비소리 / 창 넘어 경상공원의 / 왕벚 꽃송이들 짙은 분홍빛 가운으로 / 봄밤을 기다리고 있다 (「향촌연화 2」 부분)  

 

  자신을 “시시한 시, 도배장이”로 명명하는 시인은 “내 날개짓은 / 날아오르는 것이 아니라 / 그냥 혼자 악다구니였다는 것을 / 그 힘으로 잠시 튀어 올랐을 뿐이라고 / 빛이라는 덫에 딱 걸리기 좋은 / 바보!(「날치」)라고 인식하지만,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사유라는 날개를 하늘 끝까지 / 아니 그 뒤안길까지 /하루 몇 번씩이라도 날아갈 수 있다는” 시인의 결의를 다지고 있다. 또 “시인이란, 반구대 바람내장 안 누드로 숨어 있는 선사시대의 향유고래 축제와 하늘을 찌를 듯한 함성과 사랑의 아우성까지 귀담아 잘 읽어내야 한다”고 다짐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드러내는 인용시 ⅴ)는 ‘향촌동’이라는 지역의 문화공간을 배경으로 ‘처용아내’(자신에 대한 지칭으로 자주 써온 말)에 대한 강의와 시낭송 그리고 북 콘서트를 하는 소회가 솔직하게 드러나 있다. 또 인용시 ⅳ)에서는 형식적으로는 ‘정수기, 그 여자 시인’에 대한 부러움과 연민을 얘기하고 있지만, 필자에게는 스캔들에 휩싸인 “정수기, 그 여자 시인”이 바로 정숙 시인 자신으로 읽히고 있다. 인용 부분 바로 다음 구절이 “지상에서 가장 죄 없는 여자일까[?]”라는 가치판단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필자 눈에는 정숙 시인이야말로 결례를 무릅쓰고 일컬으면 ‘이슬’ ‘푼수’ ‘애교’ ‘가슴 큰’ ‘못 말리는’ ‘솔직하면서도 인색하지 않은’ ‘눈물’ ‘누구도 가질 수 없는’ ‘불행한’ 그러나 ‘늘 행복해하는’ ‘쪼다’ ‘귀여운’ 이미지로 다가온다. 자기감정을 꾸미지 않고, 내숭 떨지 않고, 당당히 드러내는 여장부 같은 이런 모습이 너무나 인간적이라 더욱 보기 좋다. 문득 괴테가 파우스트의 입을 빌려 말한, “시인이 아니라면 누가 올림포스를 안정시켜 신들을 살게 하겠는가?”라는 말이 떠오른다.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바로 시인의 사명이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시인으로서 정숙은 그걸 또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는 행복한 시인이다.

 

 

 

2. ‘연인 있어요!’와 ‘연인 있어요?’ 사이

 

  열정적인 붉은 표지와 표지보다 더 강렬한 제목이 주는 충격이 너무나 자극적이다. 먼저 이 정도로 붉은색은 어떻게 선택되는지 궁금하여(물론 시인이 아니라 출판사가 선정했겠지만) 구글 검색으로 확인해보니, rose(#E2252B)가 가장 붉고 옆에는 candy(D21502)가 아래에는 red(#D0312D)가 있다. 그러니까 시집 표지색은 현실에서는 재현이 거의 불가능한 로즈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정신이 몽롱해지기까지 하고, 눈의 피로도 또한 가장 높다. 다음으로는 시집을 열어 ‘차례’에서 표제시가 있는 36면으로 직행했다. 그리고는 허겁지겁 전문을 통독했다. 첫 느낌이 시원하게 잘 읽힌다는 점과 역시 정숙 시인답게, 솔직하고 절절해 소리 내어 다시 한번 읊조려 보게 만든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상이요

선물인 그

천사들이 털갈이하는 겨울

깃털들이 얼어 하얗게 나부끼며 내려올 때

단풍잎이 시나브로 지며

시간의 잔해들을 수북이 쌓을 때

이른 봄 청매화 그림자에 밟혀 심연이 흔들리는

그 순간마다 창 아래서 숨죽인 휘파람으로

글루미 선데이를 연주한다

많은 이들을 자살로 이끌었다는 선율로

자두나무 애간장까지 끓이다가, 창을 넘어 들어와

서로의 체온으로 시린 몸을 녹이기도 했으니

숙명이란 탯줄로 꽁꽁 묶인 사이

은밀한 색 밝히려면 귀한 접시를 깨뜨리고

지엄한 닻줄 다 끊어버려야 한다

찬란한 그늘이면서 고질적인

내 색의 골짜기에 숨겨둔 내연남, 그는

담쟁이가 미루나무 등걸에 살며시 발을 걸치는 때

느티나무가 달빛으로 옷 갈아입는 시간

 

또는 초승달이 서해로 안기는 그 순간에도

시시로 찾아와 달콤하거나 쓰리거나

뭔가 속삭여주길 나는 애태운다

그 품엔 늘 투창이 이를 갈고 있지만

 

- 「연인, 있어요」 전문

 

  서걱거리면서도 묘하게 끌리는 이 끌림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를 지그시 눈을 감고 생각해본다. 이내 ‘연인, 있어요?’인 줄 알았더니, ‘연인, 있어요!’라는 깨달음에 이르렀다. 삶의 고비마다 찾아오는 ‘?’가 생의 깨달음의 순간인 ‘!’가 되는 사이, 정숙의 시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싱싱하게 꽃을 피운다. 자신에 대한 무한긍정인 동시에 만천하에 공개하는 자기 자랑이다. 이 당당함이야말로 정숙 시의 큰 특징이고, 앞뒤 재지 않는 이 당당함은 독자에게는 정숙 시가 주는 카타르시스로 자리 잡는다.

  화자의 연인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상이요 / 선물”이면서, 또한 “찬란한 그늘이면서 고질병인 / 내 색의 골짜기에 숨겨둔 내연남”이다. 그래서 그는 “그 품엔 늘 투창이 이를 갈고 있”는 위험한 존재이지만 생의 어느 순간에서도 “시시로 찾아와 달콤하거나 쓰리거나 / 뭔가 속삭여주길 나는 애태운다”고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삶은 절대로 나태하거나 지루할 수 없다. 아니 늘 긴장되고 밀도 높은 만족감을 수반하리라. “창 아래서 숨죽인 휘파람으로 / 글루미 선데이를 연주하”는 연인이 있는 화자의 삶은 이토록 당당하고 행복하다.

  <글루미 선데이>를 인터넷에서 찾아 애잔한 피아노 선율로 들어본다. 악마의 유혹 또는 자살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저주받은 곡이라는 해설을 읽으며, 그럴수록 더욱 빠져드는 치명적인 사랑을 느낀다. 시인으로서, 한 여자로서 정숙이라는 시인의 삶을 관류해온 이 당당한 ‘사랑’이야말로 정숙 시의 정수라는 믿음에 사로잡혀 계속 <글루미 선데이>를 들었다. 오래된 LP판처럼 이 시 또한 모든 것이 제자리에서 빛을 발하며 오래 주위를 맴돈다.

   

“어느 소설가는 자기가 돼지처럼 느껴질 때 / 시를 읽는다고 했다 / 난 돼지가 되기 싫어 시를 쓴다 / 미적지근한 내 안을 더듬어 본다 / 어디를, 무얼 찔러야 하는지 샅샅이 뒤진다 / 더듬다보니 명색이 예술가라며 / 먼 허공 옆구리만 주무르고 있는 그림이 잡힌다”(「까르페디엠」 부분)

 

이러한 각성을 거쳐 이 시집에서 절창으로 꼽고 싶은 「윤필암에서」에 이른다.

 

암자 마당에서 하얀 옷고름 입에 물고

그윽한 눈망울엔 눈물이 방울방울 맺힌

 

수양매화

누굴 기다렸는가?

 

 

햇살의 숨소리와 발자국 소리에 귀 기울이느라

온몸 축축 늘어뜨리면서

 

먼 산 사방불 찾아 올라가니

부처님은 차가운 몸만 남겨두시고, 어디서

 

매향에 취한 솔바람을

쫓아내듯 날려 보내고 계시는구나!

 

- 「윤일암에서」 전문

 

  그렇다. 이러한 각성과 깨달음은 거저 찾아오는 게 아니다. 오랜 세월의 경륜과 삶의 어려운 고비를 헤쳐나온 경험 그리고 사물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발견에서 비로소 찾아온다. 문경 산북면 사불산 대승사의 부속암자 윤필암은 비구니 선원이다. 경내 제일 위쪽에 불상이 없는 사불전이 단정히 앉아 윤필암 여러 당우를 지그시 내려다보기도 하고, 마주보이는 산봉우리 위 사불암(四佛岩)을 올려다보기도 한다. 그 사불전 가파른 돌계단 입구에 수양매 두 그루가 나란히 서서 봄이면 하얀 꽃을 소담하게 피워 꽃공양을 드리고 있다. 부처님께 올리는 6가지 공양물 중 으뜸이 꽃이며, 한 송이 꽃은 인고의 수행을 이겨내는 보살의 모습이기도 하다. 당연히 시인의 눈엔 단순한 매화나무가 아니라 무엇을 상징하는 모습이었으리라. 그래서 시인은 애써 땀 흘리며 맞은편 사불산 정상에 올라 사면석불을 친견한다. 그리고는 오랜 세월에 마모가 심해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모습에서 오히려 큰 깨달음을 얻는다.

  일반 신도들처럼 사불전에서 창밖으로 사면불을 쳐다보며 예배만 올렸더라면, 오랜 인고의 세월을 겪으며 눈길을 깊게 다듬지 않았더라면, 절대 이르지 못했을 이 깨달음이 참으로 귀하게 다가온다. “부처님은 차가운 몸만 남겨두시고, 어디서 // 매향에 취한 솔바람을 / 쫓아내듯 날려 보내고 계시는구나!”라는 이 시의 마무리는 독자에게도 큰 깨달음으로 다가온다. 시인이 수양매화와 사방불을 재해석해서 ‘부처님이 매향을 흩뿌리느라 출타한 것’이라고 짐짓 우리에게 일러주고 나니, 비로소 윤필암과 얼굴이 지워진 부처님이 있는 이 신비로운 불교적 공간은 새롭게 살아나고 있지 않은가. 이처럼 시인의 붓이 필력을 얻어 신바람을 내고 있다. 시인 정숙의 시 쓰기의 즐거움이 여기에 이르렀고, 독자들도 새로운 인식을 일깨워주는 시 읽기의 즐거움에 흠뻑 젖어들 수 있어 행복하다.  

 

 

3. 사탕 맛 빛깔 또는 눈시울 빛의 석양

 

  이제 시인으로서 정숙류의 개성적인 어법이 느껴지는 대목을 짚어본다. ~한 것을 이제 알겠다”는 말투가 빈번히 눈에 띄는 점이다. 이 구문적 특징이 자칫 상투어구로 굳어질까 염려되기도 하지만, 그만큼 한 시인으로서 자기만의 스타일을 가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석양이 붉을 수밖에 없는 이유, 이제 알겠다

강산이 한 일곱 번 바뀌고 나니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하루가 한평생인 해도 지친 것이다

얼마나 지쳤으면 술 몇 모금 닿지 않아도

취해서 말없이 사라지고 싶은 것이다

 

- 「석양이 붉은 이유」 부분

 

  “석양이 붉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놀랍게도 “하루가 한평생인 해도 지친 것”이기 때문이요, “얼마나 지쳤으면 술 몇 모금 닿지 않아도 / 취해서 말없이 사라지고 싶은 것”이라는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을까. 자연과 인간의 삶을 꿰뚫는 이 놀라운 깨달음은 당연히 오랜 고난을 겪으면서 사려 깊게 축적해온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더 직접적인 이유는 인간인 화자도 자연인 해도 더 버텨낼 수 없을 정도로 지쳤기 때문이다. “강산이 일곱 번 바뀌고 나니” 비로소 이걸 깨달을 수 있다고 고백하지 않는가. 이전까지의 삶의 쓰라린 경험들은 남들도 다 하는 것이라서, 아니면 뼈아프게 느낄 여유조차 없는 신산한 여자로서의 삶에 너무 휘둘러왔기 때문이라는 것인가.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시인이 되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미학적 깨달음은 찾아오지 않았을 것임은 분명하다는 점이다. 시인으로서 정숙이라는 한 여인이 “강산이 한 일곱 번 바뀌고 나니” 찾아든 이 깨달음이 이토록 소중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슬픔을 오래 견딘 자만이 발견할 수 있는 이 깨달음은 가물가물 익어, 마지막에는  “호스피스 병동으로 떠나는 이의 입에 물려주는 / 마지막 사탕 맛 빛깔 아닐까 / 마약으로, 가는 길 황홀해지기를 원하는 / 가족의 마지막 배려 뒤 / 휘휘한 고독, 그 눈시울 빛”이 된다. “노을 붉게 잔치 벌이면서 꽹과리 치면서 / 저 붉게 타오르는 석양”은 어머니의 등가물이 되어, 죽음이 마지막 생의 축제로 승화되는 극적 장면을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사탕 맛 빛깔’과 ‘휘휘한 고독, 그 눈시울 빛’이라는 황홀하고 오묘한 깨달음의 빛깔은 독자에게도 황홀한 경험으로 남는다. 시인 정숙이 창조해낸 ‘사탕 맛 빛깔’ ‘눈시울 빛’만으로도 우리는 『연인, 있어요』를 오래 기억해야 한다.

 

파전, 배추 전을 차례로 부치면서

조상님께 투덜거리듯

왜 이렇게 일을 복잡하게 만들었을까?

, 혀를 찬다

 

쪽파들은 콧대를 세우며 일어선다

몸이 뜨거울수록 지, ,

 

날 욕하는지 더욱 소란스럽다

밀가루 한 국자 끼얹는다

더 새파래지는 자존심 꾹, 누른다

그 순간 탁, 무릎을 친다

 

밀가루와 파 그리고 불과 기름이 어울리는 것처럼

서먹한 동서 간 서로 뜨겁게 스며들면서

정이 깊어지라고

그렇게 깊은 뜻이 있었던가

결혼 근 사십 년 지나 이제

맛깔스런 우리네 한 생을 느긋하게 바라본다

 

- 「전을 부치는 이유」 전문

 

  제목까지 닮아있는 이 시를 「석양이 붉은 이유」 옆에 나란히 놓아본다. 건강한 생활이 길어 올린 이 시는 별로 덧붙일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잘 읽히며 감동을 준다. “탁, 무릎을 친다” “그렇게 깊은 뜻이 있었던가” 등 시가 될 것 같지 않은 구절까지도 잘 녹아들고 있다.

  연장선상에서 3부의 꽃을 다룬 시편들에서도 사물의 형상화와 선 굵은 주제의 설득력이 한껏 무르익은 솜씨로 유감없이 펼쳐져 있다. 갈대(「풍장」, 꽃무릇(「비포장도로에서」, 연꽃(「연꽃」), 달구비슬꽃(「닭 벼슬 꽃 수다」), 자라풀(「자라풀」), 봉선화(「봉선화 꽃탑」), 홍매(「흑매 1, 수양매화(「윤필암에서」) 등을 통해 사물에 대한 남다른 관찰력과 개성적 안목의 걸출함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4. 맺으면서

 

  플라톤에 의하면 모든 예술적 창조는 미메시스의 형태이다. '이데아의 세계'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신이 창조한 형태이며, 인간이 자신의 생활 안에서 지각하는 구체적인 사물들은 이 이상적인 형태가 그림자와 같이 어렴풋이 재현된 것이다.(다음백과) 그리고 깨달음은 무엇을 구하거나 얻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진정한 자기가 되는 것이라는 덕일 스님의 법문(『발로 생각하지 말고 머리로 걷지 마라』, 작은숲, 2012)이 문득 떠오른다. 절정기의 한 여류시인이 빚어낸 이 아름다운 시편들은 이데아의 세계에 대한 ‘어렴풋한 재현물’이며, ‘진정한 자기’의 꽃피움이다. 그러므로 이번 시집 『연인, 있어요』는 정숙 시인이 구가하는 행복한 화양연화의 시절을 담고 있다.

 

놀라워라!

 

넌 오늘도 내 생의 하늘을 밀어 올리고

 

 

허공을 번쩍 들어

 

세상을 열어 볼 수 있도록 하는구나

 

- 「눈꺼풀」 전문

 

 

한여름 대낮에

 

관능경을 펼치고 있는

 

, 환희불

 

- 「연꽃 6」 전문

 

 

갈대는 가을이 되면 누구에게, 왜 유언하는가

 

껍질뿐인 한 생애였다며

해껏 지치고 젖은 마음의 흰 뼈

 

늦가을 까치놀에 바싹거리도록 말려달라고

 

바람은 갈대들의 서걱거리는 소리로

 

새들도 읽을 수 있는 한 편의 소네트를 완성하여

강가에 내건다

 

이처럼 삶은 깨끗하게 말려 비우는 거라며

 

- 「풍장」 전문

 

 

 조각가가 돌을 다듬어 생명을 불어넣듯 삶의 깨달음을 ‘시’라는 장르에 새겨넣는 이러한 골똘한 절차탁마 중에 우연히 또는 불쑥 튀어나온 절창들을 축하의 의미로 마지막에 배치하며 이 글을 끝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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