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15    업데이트: 24-03-15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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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테이프/ 정숙 - 대구일보
아트코리아 | 조회 313
1// 옷장 서랍을 정리했다. 낡은 카세트테이프 속에서 하얀 면사포를 쓴 나를 만났다. 호수에 던진 돌 파문 지는 새 이십년이 미끄러져 흘렀다. 까마득한 기억 속 결혼행진곡. 묵은 세월이 삐거덕거렸다. 비바람에 무뎌진 가슴살이지만 아직도 봄바람 저만치서 떨고 있는 여린 자신을 꿈꾼다. 주례사는 끊기고, 테이프는 멈추고, 생각에 잠겨 내 속마음을 들여다본다. 박제된 생활에 끼어든 먼지들, 가슴 속 불씨가 꺼져가는 것 같아 남은 재 다독거린다. 실꾸리에 감긴 실 끝이 닳고 닳아서 실낱같은 인연이 끊어질까봐 오마 조마. 내일은 고장 난 테이프를 되살려야지.//2// 빛바랜 흑백 결혼사진을 벽에 걸었다. 거미줄에 묶인 나비처럼 두 사람, 파르르 떨며 얽혀있었다. 파도와 바위 되어 으르고 달래던 세월 속, 거센 폭풍 몰아치면 서로 부수고 할퀴었다. 가슴 밑바닥엔 모래알들이 세월만큼 쌓인 무게, 끝내 지탱하지 못해 사진틀이 떨어져 깨져버렸다. 두 사람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번쩍 든 정신으로, 눈빛으로 깨진 유리조각들을 모아 정성스레 짝 맞추기다.

「수성문학」 (수성문인협회, 2020)

사진첩을 뒤적이다보면 세월 속에 묻힌 추억을 발견한다. 아날로그 세대는 사진첩에서 추억을 찾아내고 디지털 세대는 동영상으로 추억을 재생해낸다. 동영상이라고 다 같지 않고 테이프, CD, USB로 진화해왔다. 옷장에 잠들어있던 결혼식 테이프가 눈에 띈다. 자식들 키운다고 정신없이 살다보니 결혼식 동영상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자식들 다 키우고 적적한 나이가 돼서야 비로소 마음이 동한다.

‘낡은 테이프’가 90년대 초 작품임을 감안하고 봐야 그 맥락이 자연스럽다. 테이프를 재생시킬 VTR은 오래 전에 사라져서 지금은 그 재생에 애로사항이 많다. VTR은 폐기물로 전락돼 쓰레기더미 속으로 버려졌다. 혹시 남아있다면 기능을 의심할 정도로 먼지가 덮인 채 구석에 웅크리고 있을 터다. 테이프를 걸 때만 해도 그 재생은 호기심과 함께 부지런함이 갖춰져야 가능했을 것이지만.

신랑과 신부가 마치 타인처럼 느껴진다. 설렘과 희망으로 가득 찬 신부의 말간 얼굴이 서투른 카메라 샷과 테이프의 열화로 인해 지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버짐처럼 버석거린다. 풋풋한, 덜 여문 신랑은 낯선 분위기에 주눅 든 탓인지 눈길이 어설프고 이따금 알 수 없는 거품과 허세마저 엿보인다. 미래의 눈으로 보는 등장인물들은 새로운 선입견으로 과거와 달리 안 보이던 부분이 새롭게 눈에 띄기도 한다. 혼주 석에 앉아있는 두 분의 눈빛이 무얼 의미하는지 지금에야 비로소 가슴으로 다가온다. ‘호수의 파문이 지는 새 20년이 흘렀다.’

봄바람만 불어와도 아직도 가슴이 벌렁거리지만 찌든 생활 속에서 신혼의 부푼 꿈은 만만찮은 현실이 되고 실낱같은 인연마저 끊어질 지경이다. 흑백 결혼사진은 벌써 빛이 바랬다. 초심의 열정이 식어버리고 무심한 냉기만 썰렁하다. 미운 정마저 다 든 지금에 와서 그 불씨마저 꺼버리는 것도 성가신 걱정거리다. 결혼식 동영상은 두 사람의 초심을 돌아보고 다시 불을 지필 수 있는 불쏘시개다. 묶이고 얽힌 거미줄을 걷어내고 멍들고 할퀸 상처를 어루만지며 세월의 더께로 눌어붙은 응어리를 말끔히 털어버릴 터다. ‘깨진 유리조각들을 모아 정성스레 짝 맞추기다.’ 모자라면 어떻고 못나면 또 어떤가, 그냥 생긴 대로 보고 있는 대로 받아들일 따름이다. 오철환(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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