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15    업데이트: 24-03-15 14:02

언론.평론.보도

자인장 ‘바소쿠리’...자인장날 풍경과 사람들
아트코리아 | 조회 281



자인장은 나에게 그냥 오래된 시골전통시장이 아니다. 유년의 기억을 되돌려 주는 영화 한 편이 펼쳐지는 곳이다. 그래서 마음이 울적해지거나 어깨에 힘이 빠질 때면 굳이 장을 보러 간다는 이유를 만들어가며 그곳으로 발길이 향한다. TV에서는 아침부터 코로나19 하루 확진자 수가 1천 명을 넘어섰다고 되풀이 방송하고 있다. 시장은 열린 공간이니 대형마트보다 안전할 것 같아서 이른 점심을 먹고 자인장으로 향했다.

계정숲 어귀에 들어서자 벌써 도로변에 주차된 차들이 즐비하다. 70, 80년대 지역에서 생산하는 복숭아, 사과, 포도 등 청과물을 위탁판매하던 청과시장이 기능을 잃고 주차장으로 변했다. 시장 우측 논밭들이 개발지역이 되어 곳곳에 도로가 뚫려있다. 몇 군데 상가가 지어졌지만, 아직은 대부분 빈터로 남아있다. 머지않아 이곳도 상가가 들어설 것이다. 멀찌감치 주차하고 걷기로 했다. 시장 상가 앞 도로변엔 시골 어른들이 들고 온 농산물로 난전이 서고 외지 상인들의 트럭 위에도 배추며 과일이 가득하다. 난전은 옛 청과시장 앞에서 시외버스 정류장까지 길게 이어진다.

 

 

◆자인장 간갈치와 돔배기



 자인장의 명물로 간갈치를 빼놓을 수 없다. 최석윤(48)·정은숙씨(44) 부부가 운영하는 은호수산에는 장이 서는 날이면 간갈치를 사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오늘도 최씨네 가게 앞에는 30여 명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최 씨는 냉동 갈치를 한 움큼 잡히는 대로 도마에 놓고 적당한 길이로 잘랐다. 크기는 작지만 줄잡아 10마리쯤 됨직하다. 굵은 소금을 쳐서 봉지에 담으니 제법 묵직해 보인다. 놀라운 사실은 가격이 겨우 5천 원이란 것. 조금 굵은 것은 1만 원이다.

손님들 가운데 아무도 마릿수를 물어보는 사람이 없다. 주인이 손대중으로 잘라 담고 값을 치른다. 값에 비해 넉넉해 보이기 때문이다. 줄은 줄어들 사이도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가게에는 최씨 부부와 최씨의 어머니 신위숙씨(69) 외에 점원이 2명 더 있다.

대구에서 왔다는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는 “어릴 때 먹던 맛이다. 기름에 튀기듯 바싹 구우면 뼈째 먹을 수 있어 조금 잘다 싶어도 맛이 있어 자주 찾는다”고 했다.



 

자인장에는 어물전이 여럿 있다. 모두 비슷해 보이는 간갈치를 팔고 있지만, 최 씨네 가게에만 줄을 서서 기다린다. 이유를 물었더니 3대째 가업으로 이어오며 자인장에서만 40여 년을 지킨 어물전에 대한 신뢰가 있어서란다. 할아버지에 이어 아버지 고(故) 최종웅 씨가 20대부터 해 오던 가게를 최 씨 부부가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다.

신선한 갈치 한 마리 값도 안 되는 값에 이렇게 많이 주고도 남는 게 있느냐고 물었더니 사실 남는 게 없단다. 최씨는 “간갈치는 아버지가 오랫동안 팔아오던 인기 품목이지만, 손님을 모으기 위한 수단이다. 손님이 와야 다른 생선도 팔 수 있기 때문이다. 주 상품은 돔배기를 비롯한 제수용품”이라며 “하루종일 줄을 서는 가게니 돈을 많이 벌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속이 없다”며 웃는다.

명절이 다가오면 어물전은 더욱 활기를 띤다. 인근 대구, 경산에서도 제사상 돔배기는 자인장에서 사가는 사람이 많다.

 


 
일연과 원효대사, 설총이 태어나기도 한

경산군 자인의 장은 돔베기가 지킨다

바닷바람도 먼데 웬 상어냐

고향 바다 떠나오면서 소금에 절어

씹을수록 쫄깃하고 간간한 갯벌 냄새

 

콤콤비릿한 시장 바닥 냄새

살면서 간 쓸개 다 태워 버린

내 모습, 자화상이라 설레발을 친다

시절 원망하느라 짜고 쓴맛만 남아

아직 씹히는 맛도 없지만

초등학교 시절 장돌뱅이로 돌아다니다가

운 좋게 엄마를 만나서

얻은 유리 브로치에 비친 무지개

 

새파란 바다에 영롱한 햇살

밥그릇 수를 세며 나이 먹는 동안

그 햇살, 그 무지개 다 잃어버렸다

 

누가 빼앗아 갔느냐

굳은살 박이도록 손에 꼭 쥐지 못한

자신을 탓하지 않고 누가 나를

자인장 상어 눈알로 만들었느냐

맘 놓고 화풀이할 수 있는 내 고향

 

그래서 친정집 뒷마당 소나무가

엄마가 백수 다 되도록 그 자리 지키는가

 

<자인장에서 상어 만나다> 전문, 정숙

 

자인이 고향인 시인은 간 쓸개 다 태워 버린 돔배기를 자화상이라고 한다. 씹을수록 쫄깃하고 간간한 사람, 그런 시(詩)를 지향하는 것일까.

 

쫓아가던 무지개 잃어버리고 되돌아와도 고향 어머니는 언제든 편안하게 받아줄 것이다. 어머니가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기에 고향은 상어 눈알이라도 괜찮다. 고향과 어머니, 시까지도 간이 되어 푹 익어야 더 그리운 걸까. 쫄깃하고 간간한 돔배기 맛처럼.


◆ 나이롱 그릇집

 


어물전 옆 제법 넓게 자리 잡은 그릇 점에는 크고 작은 냄비, 접시, 플라스틱 바구니, 무쇠솥 등 갖가지 생활용품이 수북이 쌓여있다. 가업을 이어오는 김총섭 씨(60)가 주인이다. 자인장 ‘나이롱 그릇집’의 원조 김금생 어르신의 셋째 아들이다. 어느덧 반백이 넘은 그의 모습은 어릴 때 보던 아버지를 똑 닮았다. ‘나이롱 그릇집’이라고 적힌 상호를 쳐다보니 20여 년 전 세상 떠난 그의 아버지가 추억 속에서 웃고 있다. 70년대 플라스틱 제품이 시장에서 인기를 끌 무렵 총섭씨의 아버지는 자전거에 알록달록한 플라스틱 바가지와 바구니를 싣고 다니며 팔았고, 쭈그러진 양은 냄비와 바꿔주기도 했다. 나이롱 바가지를 파는 ‘나이롱 김씨’라고 당신을 소개하던 사람 좋은 그 어른은 말재간까지 뛰어나 동네 어른들은 물론 아이들까지 모두 좋아했다. 마을에 초상이 나면 초성 좋은 목소리로 상여를 인도했고, 정초에 집집이 돌며 지신밟기 할 때도 단연 돋보였다. 어느 해는 박제된 꿩을 등에 짊어지고 포수가 되어 곱사춤을 추기도 했고, 어느 해는 한복 치마저고리로 여장을 해 마을 사람들에게 웃음을 던져주던 유쾌한 분이었다. 아들은 아버지가 그릇을 싣고 다니던 수십 년 된 녹슨 자전거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나이롱 그릇집의 산 역사’라며 가게 뒤편에 세워 두고 있다.

 

플라스틱 제품이 한창 나오기 시작하던 때 부친은 쏠쏠한 수입을 올렸는데 요즘은 그릇을 사기 위해 전통시장을 찾는 사람이 많이 줄었단다. 옆에 있었던 그릇점들은 수년 전 문을 닫았고 김씨는 무싯날에 농사를 지으며 ‘나이롱 그릇집’은 명맥만 유지한다.

 

◆ 채소가게와 오순자 할머니

 
 

자인장은 오래된 역사만큼 대를 이어 오는 가게가 많다. 오순자 할머니(83)의 채소가게도 그렇다. 여든을 넘긴 할머니는 자인으로 시집와서 서른한 살부터 채소가게를 했다. 함께 장사하던 영감님은 저세상으로 먼저 떠나고 이제는 둘째 아들과 같이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딸은 건너편에서 따로 가게를 내어 채소를 팔고 있다. 젊은 시절에는 인근 용성장, 동곡장 등 오일장을 돌며 장사를 했지만, 규모가 작은 장들은 문을 닫았다. 무싯날 자인장을 찾는 손님이 있어 요즘은 자인장에서만 장사를 한다고 했다.

 

노점에 채소를 펼쳐놓은 낯익은 할머니도 아직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것저것 나물을 골라 담는데 갈퀴 같은 손이 듬뿍 덤을 얹어준다. 인정에 버무려질 오늘 저녁 식탁은 더 푸짐할 것 같다.

 

 

◆ 삼정식당 콩국수와 자인장 맛집들

 

자인장은 3일과 8일에 오일장이 열리지만, 시장 안 공영주차장은 장날이 아니라도 맛집을 찾는 외지 사람들 차량으로 꽉 찬다. 흑염소와 쇠고기 식당은 손님들의 발길을 끌어온 지 이미 오래다.

 



콩국수 맛집으로 알려진 삼정식당은 5월1일부터 추석 이틀 전까지만 영업한다는 플래카드를 걸어놓고 가게 문은 닫혀있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겨울에 소고기국밥을 팔았지만, 손님이 넘쳐나면서 여름철 콩국수만 팔기로 했다는 주변 상인들의 말이다.

 

이외에도 돼지국밥, 소머리국밥, 수구레국밥집이 눈에 띈다. 용성식당 어탕국수와 대창식당 돼지 볶음, 북삼식당 돼지 찌개가 맛있다고 상인들이 귀띔한다. 북삼식당과 북삼식육식당은 한집처럼 나란히 붙어있다. 동업하던 주인이 장사가 잘되어 따로 각자의 점포를 냈다고 한다.

 

몇 바퀴 돌다 보니 배가 고프다. 수구레국밥집에서 김이 추억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국밥 한 그릇을 마주하고 앉았다. 혀끝에 느껴지는 온기가 목줄기를 타고 넘어가며 언 몸을 녹여준다. 엄마가 짜주던 털목도리처럼 따뜻하다.

 




그 옛날 장터는 우리네 삶의 터전이다. 이웃과 만남의 장소이며 소통의 장소였다. 지은 농산물을 내다 팔고 필요한 물건을 바꾸어 오기도 하고 오랜만에 만난 사람과 국밥이나 국수 한 그릇의 인정이 오가던 곳이다. 시장에서 만나 혼담도 오가고 사돈이 되기도 했다.

 

편리함을 갖춘 대형마트에 밀려 점점 쇠락해 가는 전통시장의 모습이 이제는 꼭 고향 집 같다. 집터만 남아 인근 식당의 주차장으로 사용되는 내 고향 집, 허물어지고 남은 한쪽 담벼락에 줄기만 말라붙은 담쟁이 넝쿨과 가지는 다 잘리고 앙상하게 등걸만 남은 감나무 같다.

 

 

◆ 소전의 추억



자인에 쇠고기를 파는 식육식당과 흑염소 식당이 유명한 것은 우시장이 융성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른들은 ‘소전’이라 불렀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소전 앞 감나무가 있는 집이다. 그 옛날 소를 팔고 사던 소전은 사라졌지만, 가끔 꿈속에도 나타날 만큼 기억이 생생하다. 이른 아침부터 소 울음소리가 들리는 날은 어김없이 장날이었다. 송아지를 데리고 온 어미 소와 황소뿐만 아니라 돼지와 염소, 토끼, 닭, 개 등 몸집이 작은 가축들도 한곳에 모여있었다. 소 주인은 몰고 온 소를 말뚝에 묶어 두었다. 소를 사려는 사람은 한참 장터를 돌고 난 후에 소를 골랐고, 거간꾼이 흥정을 도왔다. 길옆 나무로 얼기설기 엮어 지붕만 얹은 가게에서는 장터 국밥을 팔았다. 흥정을 기다리거나 성사가 이루어진 장꾼들은 국밥으로 빈속을 채웠고, 막걸릿잔도 오갔다. 소전 한쪽 모퉁이 하꼬방집 훈이 엄마도 장날이면 국밥을 팔았다. 일손이 부족해 초등학생이던 훈이와 연년생인 숙이 언니도 장날이면 심부름을 했다. 왁자한 장날이 지나고 나면 빈 소전은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말뚝 사이를 피해 다니며 술래잡기를 하고, 가게 터에 앉아 공기놀이를 했다. 가게 기둥에 의지해 말타기도 하고 말뚝에다 고무줄을 묶어두고 뛰며 놀다가 해가 지고 어둠이 깔려야 집으로 돌아갔다.

 

자인 우시장은 계정숲 북편 북사리로 이전했다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사라졌다. 목장을 하는 한 지인은 요즘 축협이 우시장을 대신해 소를 팔아 주고 인터넷으로 판매되기도 한단다. 소의 이력과 각종 정보를 올리면 경매에 들어간다고 한다.

 

사라진 우시장에 시외버스 정류장이 들어오고 상가와 주유소, 식당과 주택, 마을회관이 지어졌다. 그 옆에 있던 논밭에는 지금 신축 빌라가 서 있다. 옛 모습 그대로가 아니면 어떠랴. 찾아올 고향이 있다는 건 다행이지. 변하지 않는 게 있느냐며 스스로 위로한다. 노점에 벌여놓은 옛날 책들이며 호미, 낫 같은 농기구가 정겹다.

 

“자인장 하면 바소쿠리 아이가 ‘자인장 바소쿠리’라는 말도 모르나. 지게에 얹어서 물건을 나르는 입이 넓은 바소쿠리. 허허허”

 

저기 어디쯤 젊은 내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바소쿠리처럼 입 크게 벌려 한껏 웃는 모습의 사람들로 가득한 자인장을 상상해본다. 이만하면 다시 살아갈 힘이 충전된 듯하다.
덧글 0 개
덧글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