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15    업데이트: 24-03-15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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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인 [정 숙]을 주목한다 [김재홍] 1995년 시와 시학
정숙 | 조회 829

이 시인을 주목한다[김재홍 1996. 시와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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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와 평등


--金載弘


문학평론가 경희대교수

1
오늘날 이땅에서 가장 긴절한 문제의 하나는 정의로운 부의 형성과 함께 정당한 평등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 분단 이래 줄기찬 민주화 투쟁으로 인해 이땅에서 자유의 실천은 어느 정도 수준에까지 도달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도 평등의 실현은 만족할 만한 단계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분단이라는 상황 자체가 그러한 평등의 올바른 실천을 저해하는 중요한 요소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실상 평등을 노하는 자체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에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점도 한 이유가 된다.
원론적인 면에서 평등은 인종적, 민족적, 지역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 신체적, 性적인 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편차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가운데서 性적인 평등과 지역적 평등의 문제는 오늘날 이땅에서 보다 진지하게 논의해 볼 필요성과 의미를 지니다. 우리 사회가 80년대 접어들면서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다시 산업화 사회에서 정보화사회로 급격히 변환되는 것과 함께 가치관의 일대 전환이 일어났지 때문이다. 가부장제 중심의 전통사회가 급격히 무너지고 핵가족화되면서 새로이 남녀평등의 문제가 대두된 것은 性적 평등의 문제를 야기하였으며, 급격한 전파매체시대의 도래로 인하여 전국이 동시생활권에 접어들면서 지역간의 평등문제가 핵심문제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특히 90년대 들어서 지방자치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것은 이러한 지역적 평등이 오늘 이 시대의 한 중심명제로 떠올랐음을 웅변해 주는 한 예증이 된다.
이러한 전환기 문단에서 우리는 지역에 거주하면서 개성적인 각도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있는 한 여성시인을 만날 수 있어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대구지역에서 늦깎이로 등단하여 활동하고 있는 정숙 시인이 바로 그 한 예에 해당한다.
정숙 시인은 40대의 비교적 늦은 나이로 시단에 등장한 신인이다. 근년에 들어 이러한 늦깎이 여성시인이 급격히 늘고 있는 것은 긍정적인 현상이면서도 부정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저 그렇게 시인이라는 명찰만 달고 행세하는 함량 미달의 모양이 부정적이 한 모습이지만, 그 중에는 생명의 필연성 또는 목숨의 인과율로서 시를 쓰는, 쓰지 않으면 못 배기는 진짜 시인들도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진짜 시인들은 삶의 많은 굴곡과 명암을 겪어온 터이기에 시 속에 삶의 무게와 깊이를 확보하고 있어서 20대의 신진들이 지니기 쉬운 가벼움이나 현기벽을 일정 부분 극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상 이 점에서 늦깎이 여성시인들에 대한 선입견이나 편견은 시정돼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시작품의 질이나 가치는 작품 자체의 완성도나 깊이로 평가돼야지 시인의 지명도나 남녀노소 여부로 따져서는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정숙의 시는 충분히 개성적이면서도 문제 제기적인 것으로 판단된다. 먼저 그의 시는 인간해방이라는 관점에서 남녀평등의 문제를 접근하고 있어서 관심을 환기한다. 삶 앞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하며, 평등해야 한다는 명제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 현실에서 남녀 또는 부부관계에서 불평등현상은 엄연히 실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정숙의 시는 바로 이 점에 착목하여 남녀 불평등의 문제를 날카롭고 섬세하게 제기한다. 연작시 <신처용가>의 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이 연작시들은 처용의 아내를 시적 주체 또는 시의 화자로 하여 오늘날 이땅에서 아내의 심리 또는 여성의 입장을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남성 위주의 현실을 비판하는 것과 함께 진정한 인간해방의 길을 모색하고 있어 주목에 값한다.

2
먼저 이 연작시에는 남성중심사회에 대한 풍자와 야유를 통해 그 모순과 폭력성을 날카롭고 섬세하게 비판한다.

참말로 죄송하데예./친구들캉 갈비를 뜯다보이/사방이 다/여편네들 시상이라예/ 찬 점시 잡숫고 기실 서방님을 생각했심더./싸납게 뜯던 갈비가 고마 목구명에 걸리가/안넘어갈라카데예. 참말이라예. 근데예/서방님은예./방석집에 핀 꽃들에겐 그렇게 인심이 좋다데예?/애자시고 번 돈 마구 뗀지준다카이 참말이라예?/얄궂어라!/집에서는 고렇게 인색하신 양반네들이....../붉힌 얼굴로 큰소리 쳐 실쩍 넘어갈라 카지 마이소./구렁이 담장 넘어가다 웃고 있심더./지도 고집이 씨다카믄 씬 여자라예.
--<얄궂어라>(처용아내 7 - 갈비집에서) 전문

서방님은예, 집에 드러오시믄 '밥 묵자, 자자'/고 소리빠께 몬합니꺼? 사근사근 웃으믄/뭐 큰 탈납니꺼? 입 꾹 다물고 껴안으신 테레비가/반갑게 사랑해줍디꺼? 입수부리 새빨가이 바리고/박하향 요염시리 살랑살랑거리도 눈도 안 깜짝하시이/정말로 신경질 나겠심니꺼? 안나겠심니꺼?
--<밥 묵자>(처용아내 23 - 천근무게) 부분

이 연작시집에는 여성들의 섬세한 본성이나 심리는 전혀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살아가는 남성들의 무관심함 또는 폭력성에 대한 야유와 비판이 도처에서 제기된다. 남성위주 사회의 편견과 부당성에 대한 날카로운 고발이 담겨져 있다는 뜻이다. 인용시들에서도 이러한 면이 드러난다. 시<얄궂어라>에서는 아내의 진정어린 사랑의 마음에도 불구하고 밖으로만 기울어져 인생을 탕진하는 남편의 모습을 통해 남성들의 이중심리 또는 모순된 생활상을 고발한다. 또한 시<밥 묵자>에서는 타성과 의무로 전락해버린 남편의 일방통행식 생활태도로 인해 무시당하고 소외당하는 여성의 울분 또는 욕구 불만을 표출한다.
실상<제비캉,꽃뱀캉> <달님이 체조하능기예><바가지 긁는다꼬예?><자갈마당이 어뎅공?> 등 수많은 시편들에는 이러한 남성 위주 사회의 모순과 불합리성을 야유하고 풍자함으로써 편견과 불신, 일방통행적인 폭력성 등이 지배히고 있는 오늘날의 사회 모순을 고발하고 비판하고 있음을 본다. 전통사회의 가부장제 하에서의 인습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이어져 내려와 잔존하고 있음을 신랄히 야유함으로써 그러한 봉견유제로서 남녀 불평등 현상을 극복해 보고자 하는 안간힘을 펼쳐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상대적으로 여성들의 잠재된 본성 또는 억압된 욕망이 분출하는 것은 자연스런 이치이다.

(1)보이소예,/지는예 서답도 가심도 다 죽은/사화산/인 줄 아시지예? 이 가슴속엔예/안직도 용암이 펄펄 끓고 있어예./언제 폭발할지 지도 몰라예./울타리 밖의 꽃만 꽃인가예?/...중략.../벚꽃 꽃잎이 나풀! 나풀! 한숨지미/떨어지고 있지예. 혼자 지샐라 카이/너무 적막강산이라예./봄밤이라예. 안 그래예?
--<휴화산이라예>(처용아내 2 - 벼량끝의 꽃) 부분

(2)가라히 네히라꼬예?/생사람 잡지 마이소예./달이 휘영청 청승떨고 있지예/밤이 '어서! 어서!' 다구치미 깊어가지예./임카 마시려던 동동주 홀짝홀짝/술삥이 혼자 다 비았지예./용광로 부글부글 끓는데 임이 안오시지예./긴 밤 지쳐 살풋 든 잠, 찔레꽃 꺾어 든/귀공자를 잠시 반긴 거 뿐인데예./웬 생트집예?/셔블 밝은 달 아래서/밤 깊도록 기집 끼고 노닥거린 취기,/의처증 된기라예?/사철 봄바람인 싸나아는 간음 아이고/외로움에 속 골빙 든 여편네/꿈 한번 살짝 꾼 기 죈가예? 예?
--<웬 생트집?>(처용아내 1 - 신처용가) 전문

(3)예? 질투가 사랑하는 기 아이라꼬예?/샘낸다고 지를 쫓가낸다꼬예?/여자는 질투 빼뿌믄 푹 꺼꾸러지는 거 아이라예?/서방님, 지는 부처가 아이라예. 인간이라예.
--<질투 아이라예?>(처용아내 54 - 칠거지악 타령) 부분

(4)앵앵거린다, 시끄럽다, 카지마고 쫌 들어보이소./여름밤 저 쏘내기는 지 맴을 쪼매 아는기라./와 남정네는 풍류남아라야 되능교?/인내들은 와 효부, 열부, 끝내는 망부석카는/돌삐가 돼야 되능교?
--<돌삐가 되야 되능교?>(처용아내 20 - 아쟁소리) 부분

(5)소문 몬들었어예?/인자 남정네들이 다부로 뚜디리맞고/눈티가/반티된다 카는 말 말이라예.
--<눈 마찼다꼬예?>(처용아내 68 - 미운정 고운정) 부분

장딱만 믿고 잠자던 암딱들이/칼 대신에 손톱 끝 기게, 날카롭게 갈민서/마카 꼬꼬댁! 꼬!꼬!거리야 잘 사는/시상이, 시상이 진짜 왔단 말이라예.
--<치맛바람>(처용아내 86 - 암딱소리) 부분

이 시편들에는 이러한 여성들의 본성 또는 욕구가 지속적으로 분출되고 있어 관심을 환기한다. 먼저 시 (1)에는 똑같은 인간으로서 여성의 억눌린 본성 또는 욕구가 들끓고 있음이 제시된다. 性 앞에서, 인가 본능 앞에서 남녀가 평등함에도 불구하고 여성이기에 일방적으로 참고 견뎌야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묘파돼 있는 것이다. 또한 시 (2)에서는 신라 처용가를 현대적으로 변용하여 억압된 여성의 본성 해방을 주창하고 있어 주목된다. 벽사진경의 역신 모티프를 오히려 여성해방의 한 매개고리 또는 촉매로 전환시킴으로써<처용가>의 새로운 해석은 물론 여성 욕망의 분출을 통한 인간해방의 차원으로 상승시키려 한 시도가 주목에 값하기 때문이다. 남성 위주의 생활관습 또는 사회구조 하에서 온갖 금기 속에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여성들의 해방 심리를 날카로이 묘파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사철 봄바람인 싸나아는 간음 아이고,/외로움에 속골빙 든 여편네/꿈 한번 살짝 꾼 기 죈가예? 예?"라는 구절 속에는 이러한 여성해방의 심리적 방어기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고 하겠다.
시 (3)에는 전통적인 인습으로서 칠거지악에 빗대어 性앞에 남녀가, 모든 인간이 평등하며 평등해야 한다는 일종의 인간선어니 제시돼 있다. "서방님, 지는 부처가 아이라예. 인간이라예"라는 구절 속에는 바로 이러한 여성해방으로서 인간선언이 담겨져 있는 것으로 풀이되기 때문이다.
(4)에서 "와 남정네는 풍류남아라야 되능교?/인내들은 와 효부, 열부, 끝내는 망부석카는/돌삐가 돼야 되능교?"라는 구절은 이러한 남녀 불평등에 대한 직접적인 항의를 제기하는 가운데 여성해방으로서 인가해방을 강력히 주창한다. 시 (5)에는 이러한 여성해방이 자칫 또 다른 의미의 불평등을 야기할지도 모른다고 하ㅡㄴ데 대한 하나의 우려 또는 경고가 담겨져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여성과 남성이 인격적으로 대등하게 대접받고 서로 존중하는 단계를 넘어서 이제는 오히려 남성이 여성에게 구타당하여 "남정네들이 다부로 뚜디리맞고/눈티가/반티된다 카는"처럼 전되된 가치관의 세계로 급격히 전화해 가는데 대한 또 다른 우려가 제시돼 있는 것으로 풀이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연작시들은 <처용가>를 현대적으로 변용하면서 남녀 평등 문제에 있어서 잘못된 인습을 야유하고 비판하면서 여성해방을 통해 진정한 인간해방을 갈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잠재된 여성의 본성과 억압된 욕구의 해방을 통해 性의 불균형을 시정하고 진정한 인간평등의 실현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는 갈망과 의지가 처용아내의 변을 통해 애달프고 섬세하게 분출되고 있다는 뜻이다.

3
이러한 여성해방을 통한 인가해방의 갈망이 단지 남녀평등 문제에만 국한된다면 이 시집이 지니는 울림은 대폭 축소될 수밖에 없음이 자명하다. 어쩌면 이러한 여성 해방문제의 제기는 다분히 진부한 주제일 뿐더러 그것이 단지 남녀 평등 문제로만 국한된다면 다분히 불평 불만의 표출 또는 억압심리의 분출이라는 개인사적 차원으로 떨어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이 연작시들이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지니고 있는 온갖 모순과 부조리를 응시하고 그것을 야유하고 비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당위적인 일이기까지 하다. 개인적, 심리적, 실존적 차원에서의 여성 해방이 사회적, 현실적, 역사적 차원의 인간해방으로 그 지평을 확대해 갈 때 비로소 그 시정신이 건강해지고 탄력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1)오렌지족은 머고, 낑깡족은 멍게?/진짜 맛있는 우리 제주도 귤은 울리고/와 카능게./남정네들 삐삐에 핸드폰 카는 거까지/차고 댕기민서 해논 일/고작 고깅게?/너무 나라 참깨조차 다 사들라/우쨀라 카능게?/우리 몸엔 우리끼 좋은기 안 맞능게>/새빠지게 농사짓는 사램 우예란 말인게./꺼실었다꼬 깔보는깅게 멍게?/자가용 타는 사램만 잘난 기 아이고/리아까 타는 사램도 어시기 잘난 기라예//아능게? 모리능게?/촌구석 압구정에는 아이 고 못땐/한명회의 억씬 바람이 불고 있능게?/야?
--<와 카능게?>(처용아내 73 - 압구정동에서) 전문

(2)누는 무시 묵고 누구는 인삼 뿌리 묵니꺼? 야?/지도 방맹이 한분 뚜디리불라꼬 증권회사에/안갔디꺼? 이기 오릴라 카디 내리가고, 내리갔다꼬/사뿌믄 또 내리가고./....중략.....큰 손디 큰 돈 버는 기 맞디더. 피래미는 그저/밥 애이니꺼. 서방님, 지도 큰 소리 좀/쳐볼라 켔디 헛기시더. 에고, 속 씨리니더!
--<빈덕쟁이>(처용아내 52 - 증권) 부분

(3)비 내립니더. 가뭄끝에 단비 내립니더./생각나시니껴. 그 옛날 우산없이 비 맞이미/돌아댕깄던 그 시절이./빗물을 받아먹기도 했잖니껴?/우리 아아들이 불쌍찮니꺼?/비도, 눈도 살인魔라 카이./인간이 천사 겉은 악마, 괴물 겉은 괴뭉 아이니껴?
--<진짜 부끄럽니더>(처용아내 59 - 산성비) 부분

(4)캄캄한 밤입니더./막막한 밤입니더./안들리능기예?/피 토하미 울어쌌는 저 깨구리 소리!/집 나간 깨구리 머심아들,/어무이들 울음 소리 것잖능기예?/생각 안나는 기예?
--<구신 달래가 쫌 물어보이소>(처용아내 62 - 개구리 소년) 부분

(5)시상이 좋아질수록 불안코 무서버이/구신 쫓아달라는 사람이 자꾸 늘어날 끼라예./두고 보이소예./휴거 카민서 하늘에 올라갈라꼬/기다리는 사람들 봤지예./ 어리석어 자빠진 얼매나 약한 인간들입니꺼.
--<우얀 일입니꺼, 무서버예>(처용아내 63 - 휴거소동) 부분

인용시들에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미만해 있는 온갖 모순과 부조리 현상들에 대한 풍자와 비판이 담겨져 있음을 본다.
먼저 시 (1)은 일부 부유층들의 빗나간 생활태도와 함께 U R 문제 등을 비판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삶 앞에서 평등하며, 평등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풍자적으로 제시한다. "자가용 타는 사램만 잘난 기 아이고/리아까 타는 사램도 어시기 잘난 기라예."라는 구절 속에는 날로 심화돼 가는 사회적 불평등현상에 대한 우려가 담겨 있다고 하겠다.
시 (2)도 약육강식의 자본주의 세태에 대한 풍자를 통해서 인가 평등 문제ㅡㄹ 제기한다. 증권가에서의 '큰손' 상징으로써 사회적 소외와 불평등을 암시하면서, "누는 무시묵고 누구는 인삼뿌리 묵니꺼? 야?라고 하여 삶 앞에서 평등한 이치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시 (3)은 공해와 오염문제를 통해 과학문명의 폐해를 비판하다. 인류를 위해 만들어낸 온간 기계문명이 마침내 그 과도한 남용과 무분별한 경쟁으로 인해 지구를 병들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산성비로 풍자하고 있다.
시 (4)에서는 나날이 메말라가는 사람들의 비정함과 무관심한 세태가, 또한 시 (5)에서는 갈수록 창궐하는 사이비 종교들의 폐해가 비판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날 우리 사회의 온갖 모순과 부조리가 제시되면서 그러한 불평등과 소외를 극복함으로써 마침내 인간 회복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상 <T K 아잉게?><하늘을 봐야><몬묵는 기 없어예><제비캉, 꽃뱀캉><은장도 내삐리까예?>등의 많은 시편들에는 이러한 사회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풍자와 비판을 통해 인간 회복을 강조하는 뜻이 담겨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이러한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문제는 이땅이 처해 있는 근원적 불평등으로써 시적 보편성을 획득하게 된다.

(1)맨날 전쟁난다 난다/구쿠이께네 구쿠지 앤구쿠믄 구쿠니꺼?/지가 노푸다 노푸다케사도 지 눈엔/다 얼라가치 비능기라./어징가이도 철딱서니 없이 퍼뜩카믄 싸울라카이/무서버서 몬살겠능기라./내를 먼저 돌아보고 니 잘잘못을 따지야지/앤 그러니꺼? 높은 자리에 기실수록/더 너그럽게 이해해야지./그 길밖에 없다쿠이까네 와 자꾸 구쿠니꺼?/우쨌기나 욕 디기디기 보시능기라./아지러요./형제간에 싸우믄 집안 우새다 쿠는 거./죄없는 삼팔선이 와 자꾸 키가 더 커가는지?/그 가슴팍이 와 자꾸 더 뚜꺼버지는지?/그라면서 언제 째질지 모리게 얇은 종잇장겉은/삼팔선아, 말 쫌 해바라, 어요?
--<삼팔선아 말 쫌 해바라>(처용아내 28 - 집안싸움) 전문

(2)싸나아들 하는 일 지가 뭐 알게심니꺼만도예/그지예, 햇마늘을 까이까네 옷 안빗길라고/바둥거리디예 알몸띠가 돼뿌이까네 서로/우짤 수 없이 가민을 벗데예. 참말이라예. 지/잘났다고 까불어싸도 다 허끼라예.//한통속 같은 껍질에 갇히 살민서예 서로/찌지고 뽂고 싸우이까네 우예 통일이 되겠ㅁ니꺼./그라이까네 매년 한분씩예 두만강 아이믄/낙동강에서 누푼 양반들이 모이서예 뺄가벗고/목간을 하문 어떨까 싶어예. 물장구치미 서로 등띠도/밀어주고예, 고 새까만 속맴을 씻어뿌믄 금세/통일이 될꺼 겉은데예, 어때예? 우기지 마라꼬예?
--<햇마늘을 까다가>(처용아내 27 - 통일이여 오라) 전문

이 두 편의 시는 개인사 또는 가족사를 사회사 및 역사로 상승시켜 형상화를 이룩해낸 한 성취라고 하겠다. 그만큼 비유와 상징이 주제의식과 잘 어우러져 내용과 표현에 있어서 조화와 탄력을 이루고 있다는 뜻이다.
시 (1)에서는 같은 민족끼리 화해하고 깊이 이해함으로써 공존의 논리를 통해서 분단을 극복해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삼팔선'으로 상징되는 분단의 장벽이 오히려 공고화해 가는 현실에서 상호 이해와 평등의 법칙을 존중함으로써 삼팔선이 무너지고 통일이 다가올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아울러 시 (2)는 "한통속 같은 껍질"에 갇혀 사는 민족의 공동체로서의 운명성을 강조하면서, 그러기에 진정한 상호 이해와 공존의 논리를 통해 통일의 길로 나아가자고 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두 편의 시가 '집안싸움'과 '햇마늘을 까다가'라고 하는 두 가지 비유와 상징으로써 분단 극복과 통일의 길을 제시한 것은 그것이 비록 심정적인 차원의 논리라고 해도 강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던져준다. 모든 역사는 개인사가 사회사로, 사회사가 다시 역사로 발전하고 확대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섣부른 구호나 주의 주장보다도 평범한 생활 속의 발견을 통해서 진정한 인간 이해와 상호 존중만이 모든 인류사회의 불신과 분쟁을 극복해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며 지름길이라는 점을 제시한 것은 값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실상 이 점에서 性의 평등이라는 실존적 문제가 남녀평등이라는 사회적 문제로 나아가고, 이것이 다시 민조평등과 인류평등이라는 범민족적, 범인류적 대의로 나아갈 수 있는 소이연이 됨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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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이러한 '개인사 - 사회사 - 역사'론의 관심이행과 시야 확대만이 꼭 바람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삶의 궁극적인 문제는, 인간해방의 이념적인 모습은 자기의 올바른 발견과 실천을 통해서 보다 완성된 모습을 지닐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연작시집에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성찰도 제기되어 관심을 환기한다.

나는 어데 갔을까?
진짜로 민경 속 나는 내 아이네.
어마이도, 밥쟁이도,
미느리도 있는데 인간인 내가 없어졌어.
내가 사라진 건 언제부터였을까.
민경 닦고, 돋뵈기 써 보까?
현모양처란 말 싸나아들
속임수였제? 맞제?
울고 있으믄 더 추한 꼬라지라,
혼자서 우뚝 안 일라서믄 안돼!
늦다 생각칼 때가 젤 빠른 때라 켔제.
일가뿐 날 찾아야겠어.
내 민경이 웃고 있을 때까지.
내 꿈이 눈 빤짝 뜰 때까지.
꼭 생각해 보고 말끼라.
--<속임수였제?>(처용아내 13 - 민경 속에서) 전문

민경, 즉 거울이란 무엇이던가. 그것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비쳐보고, 남을 비춰줄 수 있는 도구가 아니던가. 그러기에 거울은 자아 발견의 상징이 되며 자의식의 한 표상이 되기도 한다. 말하자면 거울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는 것과 함께 자신의 보다 깊은 내면으로, 본질적인 세계로 다가가게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에서 거울은 자아 발견에서 시작되어 자기 극복과 자아실현을 거쳐 마침내 자기 구원에 이르는 삶의 궁극적이 모습을 총체적으로 상징한다. 그만큼 시적 자아가 자기 자신의 삶의 정체성을 잃고 살아왔으며, 오늘도 여전히 그러한 번민에 사로잡혀 있음을 제시한 것이 된다. 이 점에서 "나는 어데 갔을까?/일가뿐 날 찾아야겠어"라는 자성과 자기 다짐 속에서 새로운 자아 발견과 자기 실현을 이루어 내고자 하는 의지와 결의가 담겨져 있다고 하겠다.
실상 그러기에 연작시편들에 끊임없이 자유에 대한 갈망과 염원이 제기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도 훨훨 날아갈 끼라예. 후회마이소, 예?/서방님이 꼭꼭 숨기둔 지 날개옥 있잖아예./맞지예? 꼬옥! 찾을끼라. 찾고 말끼라예.
--<요리픽! 조리피식!>(처용아내 35 - 흙 묻은 진주) 부분

얼매나 허전하문 이 요란 떨겠습니꺼?/이기 다 홀로서기 몸부림 아입니꺼?/시덥잖은 일에도 질질 눈물 흘리는/얼라 된기지예./지가 까불어싸도/바람 앞에 호롱불 인간 아이던기예.
--<호롱불 인간>(처용아내 16 - 홀로서기, 몸부림) 부분

인용시편들에 보이는 것은 자유에 대한 갈망과 그의 실체화로서 자아 실현 및 자기 구원에의 의지라 할 수 있다. 시집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새 또는 날개옷의 이미지는 바로 이러한 삶의 한 본질로서 자유에 대한 지향성과 갈망을 상징한 것이 분명하다. 아울러 이러한 자유에의 갈망과 의지는 바로 자아 발견에서 시작되어 자아 극복과 자기 실천을 통해 자기 구원에 이르려는 홀로 서기의 몸부림이며 그 안간힘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가 까불어싸도/바람 앞에 호롱불 인간 아이던기예."라는 구절 속에서 유한자로서의 인간, 숙명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의 운명성에 대한 보편적 인식이 제시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삶 앞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하며, 또 죽음 앞에서 평등할 수밖에 없다는 인간의 보편적인 운명성의 자각이야말로 이 연작시가 지속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인간해방을 통한 인간회복이라는 명제를 보편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만들어 주는 근본동력이 된다. 한 여성의 푸념 섞인 투정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 발견의 몸부림이 처용아내의 변을 통해 제시됨으로써 설득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연작시에는 자아 확립과 실천의 근본으로서 믿음과 사랑에의 확신과 갈망이 제시된다.

(1)맷돌만 자꾸 돌리라 카지 마이소. 지를/몬찾아 케샀는 인생 안 불쌍합니꺼. 모리겠심더. / 지 좀 찾아주이소.
--<돌리라 카지 마이소>(처용아내 47 - 맷돌우화) 부분

얼매 남지 않은 백지 우째 다/채우지예?/호작질하기엔 너무 소중한 백지라예./인자 지 손으로/ 지 마음대로 한분 기리볼끼라예./바우틈에 핀/난초 고 해맑게 웃는 눈빛을 꼬옥/기리보고 싶어예.
--<거물 뗀지놓고 있으믄>(처용아내 85 - 행복찾기) 부분

(2)서로 믿어/아름다분 시상,/말가이 다 비칬어예./지 색깔/자연시럽게 바로 쫌 보고 사입시더. 예?
--<쌔기쌔기 벗어예>(처용아내 9 - 믿음시더) 부분

믿어주이소, 예? 지 낭게꽃 바다 겉은/이 맴을예.
--<불씨 안 꺼줄라꼬>(처용아내 42 - 낭게꽃)부분

(3)서방님예, 살아보이꺼네 진짜 필요한 기/사랑이지예? 그지예?/쏜 화살보다 더 빠린 저 시간,/저래 짜린데,/사랑해얄끼 우린 천지삐까리 아입디꺼,
--<천지삐까리 아입니꺼>(처용아내 15 - 유월, 戀風)부분

사실 그렇지 않은가? 인간 삶의 궁극적 목표는 어디에 있겠는가? 한마디로 그것을 자아 실현이며 자기 구원이라고 말해 볼 수는 없을 것인가. 바로 이 점에서 인용한 시구들은 이러한 명제들을 삶의 소중한 덕목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먼저 시 (1)은 삶의 발견이란 바로 진정한 자아의 발견이며 그 실현이란 바로 자아의 올바른 실천이고 자기 구원을 통한 인간 구원의 명제로 연결될 있음을 말해 준다. 시 (2)와 (3)은 이러한 삶에 있어서 제일 소중한 덕목이 바로 믿음의 확립과 사랑의 실천에 놓여짐을 제시해 준다. 결국 이 시들은 자기를 올바로 실현하고 또 다른 자기로서 남을 바르게 이해하고 존중하며 믿고 사랑함으로써 비로소 바람직한 인간해방에 도달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다양한 제재와 소재로 펼쳐보여 준다고 하겠다.

5
이렇게 본다면 <신처용가>는 여성을 중심으로 하여 오늘의 삶, 오늘의 풍속도를 처용과 그 아내로 비춰봄으로써 진정한 여성해방, 인간회복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오늘날 온갖 타락과 부패한 사랑이 범람하는 시대에 여성 자신의 위치를 지키면서도 그냥 수동적으로 체념하지 않고 남성 중심 사회의 각양각색의 모순과 부조리를 풍자하고 비판함으로써 인간해방의 길로 나아가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이 시집이 처음부터 일관되게 처용 아내라는 여성 화자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 나아가는 것도 그렇지만 문체와 어조를 경상방언으로 이끌어가는 점이 특색이라고 하겠다 우리는 현대시사에서 방언을 활용하는 경우를 적지 않게 보아왔다. 소월과 백석의 평안방언 활용이 그렇고 영랑과 미당의 전라방언 취택, 그리고 목월의 경상방언, 그리고 김광협의 제주방언 활용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경상방언의 경우 목월이 <경상도의 가랑잎> 등에서 적극 활용하였지만 이번 정숙 시인의 경우와는 사뭇 다른 내용에 해당한다. 정숙 시인의 경우는 그야말로 능동적, 의도적으로 경상방언을 활용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방언 활용은 무슨 시적 의미를 갖을 것인가? 한마디로 그것은 주변부의 중심부화를 겨냥한 것이고 지역적 평등의 보다 적극적인 실천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보다 생생한 생활감각과 민중정감에 구체적으로 다가가기 위한 안간힘이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어떤 지역의 삶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다른 지역의 삶과 서로 대등한 것과 마찬가지로 한 지역의 언어는 다른 지역의 언어와 평등한 의미를 지닌다. 바로 이 점에서 정숙 시인이 경상 방언을 의도적, 적극적으로 활용한 의미가 드러난다고 하겠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어를 시 속에서 갈고 닦음으로써 민족어 완성을 지향하고, 아울러 자신의 삶을 보다 중심부에 놓기 위한 의도적, 능동적인 배려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이 연작시가 지니고 있는 결함도 적지 않다. 우선 전체적으로 보아 청승떠는 모습이 그러하며, 여성 주체로서 보다 능동적인 현실 타개 의지의 실천력이 부족한 것이 보다 큰 결함이다. 여성해방의 욕구에 따른 능동적인 실천의지가 현저히 거세됨으로써 시가 욕구 불만의 차원내지 소박한 순응주의로 굴절돼 가는 듯한 아쉬움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이 적극 보완돼서 명실상부하게 여성 주체의 확립과 능동적인 현실 타개 의지가 펼쳐져 간다면 이 시대에 여성해방 시의 한 전범이 될 수도 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집은 여성해방이 단지 운동을 위한 운동의 차원으로 도식화되지 않고 사랑과 믿음, 이해와 상호 존중의 노력을 통해 진정한 인간 회복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데 대한 조용한 자각을 보였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점에서 <신처용가> 연작은 오늘날 불연속의 시대, 불확정성의 시대에 인간회복을 위한 여성해방의 한 각서이며 하나의 인간선언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시인의 정진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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