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15    업데이트: 24-03-15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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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겨울호, 시인정신 포에세이 [모자와 횡설수설, 정 숙]
관리자 | 조회 595
모자와 횡설수설
 
 
1. 가을, 비 내린다.
 
무작정 걸어가는 바바리맨의 발자국 소리 하염없다. 난 가을 빗소리로 실을 꿰어 바느질 한다. 낡은 싱가미싱 돌린다. 갑사 천 빨강 치마와 양쪽 가슴에 희망과 사랑을 박음질한 노란 저고리, 단풍나무 위에 걸친다.
 
그래, 미련 없이 보내줘야 한다. 참 오랜 시간 붙들어 두었다. 아니 천년동안의 외사랑이라며 찾아오는데 너무 긴 시간이 걸렸다며 나도 모르게 그는 내 가슴 속으로 두더지처럼 파고 들었다. 붉은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면서, 핵으로 구우면서, 흡혈귀처럼 피를 빨아먹다가 찌르면서, 칼춤을 추기도 했다.
 
네가 허기진 먹물이라면
나는 목 타는 한지
 
우리 서로 만나 하나로 어우러져
샘물 솟아내야만
붓꽃 몇 송이 피어나리니
 
하늘 열쇠 간직한
꽃과 열매를 틔우고 맺으리니
 
-졸시 ‘연서戀書’ 전문
 
이런 연서戀書 한 장 없이 막무가내 가슴을 파고드는 역신을 이길 수 없는 처용아내는 끝내 암 전문 요양병원을 찾았다. 이제까지 병원을 멀리한 죄 값을 치르는 것인가. 진작 처용이 칼춤을 추며 처용가를 부르지 않았기 때문인가. 실없는 농담이나 허세를 부릴 때가 아닌데 이렇게라도 자위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2.어찌 이런 세상이 존재하고 있었단 말인가.
 
모자가 자존심인 사람들, 머리카락 빡빡 밀어버리지 않을 수 없었던 여인들, 유대인 수용소 같은 곳, 자면서도 모자를 써야하는 그들은 속눈썹과 코털까지 다 뽑아버리는 역신과 잘 놀아나는 법 익히면서 차라리 당당하다. 그를 멀리하려고 집안의 평안과 안녕을 위해 그렇게 몸부림치면서 처용무 추며 열심히 살았는데 하느님 부처님 모두 무심하시지. 막상 저리도 냉정 하시다. 그나마 난 일찍 알려준 조상님께 감사드려야겠다. 머리카락도 자존심도 버리지 않아도 되니. 그러나 서른 번의 방사선으로 굽고, 열 네 번의 항암주사로 온 세상이 울렁거리며 내장이 울릉도 트위스트를 춘다.
 
‘사랑은 저 바람결 같은 것’이라며 한사코 뿌리쳤는데, 도망치면서 ‘가라히 네히라고예’ ‘봄밤이라예’ 온갖 설레발치며 춤을 추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단풍나무, 상수리나무 심지어 꽃송이 잔뜩 달고 있는 장미들도 춤을 추고 있었다. 평소 그냥 장단 맞추느라 흥겨워보였던 춤이 기도로 보이기 시작하고, 그것을 한지에 옮기느라 먹물과 붓에 기대어 내가 또 한숨 섞은 덩더꿍 춤을 추고 있었다. 그래도 유방은 수월한 곳이었다. 난소암, 직장암, 췌장암, 담도암 등등 전이가 쉬운 곳, 너무 심해서 항암주사도 수술도 못하는 환자들
 
그 환우들끼리 단단한 결속도 자랑하지만 그 중엔 자기 말 듣지 않는다고 같은 환자를 왕따 시키고, 자신은 상피암 등 약한 병이라고 자랑하듯 유세하는 사람, 보험이 되는 사람의 자신만만과 보험이 되지 않는 사람의 위축감, 그 많은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어 맘 편히 치료 못하는 사람들 그 여러 가지 수용소 통증 속에서 근 8개월을 견뎌 보았다.
 
“ 역신疫神님, 그 독약 같은 사랑 뿌리치려고 당신의 얼굴을 그림으로 그려 달래도 보고 달빛과 달맞이꽃이 간통이냐, 외간이냐, 화간이냐 염탐하기도 했습니다. 전 한 번도 당신께 애원하거나 눈길 돌린 적 없으니 우리 사인 분명 당신의 외간이지요? ”
 
3.천년의 외사랑
 
“ 거의 철없이 외롭다 며 ‘봄밤이라예’ ‘꽃이라예’ ‘작막강산이라예’를 나불대고 있었으니 전적으로 내게 책임이 있다고요? 어쨌거나 제발 물러나소서! 식칼을 집어 던지며 객귀 물리는 분노의 눈길 보이지 않나요? 예부터 찾아온 손님을 잘 모셔야한다기에, 맵차게 쫓아내지 말고 춤추며 노래로 잘 달래어 보내야한다기에. 쉿, 사실은 그냥 깊숙이 숨겨두고 그 달콤을 녹여먹고 싶었지요. 꼭 그렇게 숨 막히며 아프도록 몸속에 칼끝 길을 내야 했나요? 아직도 모르겠어요. 역신오빠는 횡설수설로 입에 거품을 무네요.”
 
“사탕 하나 물고 호스피스 병동 가서 생의 마지막을 기다리다 보면 하얀 국화 꽃잎 밟으며 웃으며 떠나는 이들이 보인단다. 손짓하는 검은 저승사자는 옛말이지, 넌 꽃길 걸을 자격이 있어. 두려워하지 마!”
 
4.간잽이, 삶의 현장
 
난 외출시엔 늘 모자를 썼다. 사치나 멋을 부리려는 게 아니고 단지 머리 손질하는 게 서툴고 미장원도 자주 가야하는 일이 쉬운 일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평소 머리 손질을 잘하지 않았다. 부스스해도 모자만 쓰면 멋쟁이 소리를 들었으니, 이제 요양병원에 와서 특히 여자에겐 머리카락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또 자신이 얼마나 무심하고 게을렀는지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다. 민머리 보여주지 않으려고 밤에도 불 켜는 걸 싫어하는 이유와 밤에 자지 않으면서도 필사적으로 모자를 쓰고 누워있는 저 자존심의 고충을 누가 알겠는가.
 
간간하게 간이 절여지도록 간잽이, 삶의 현장에서 아무리 치열하게 발버둥 치며 살아도 결국 남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가족에게 또는 누구에게 뭔가가 되기 위해 허덕이다가 제 자리 하나 바르게 찾지 못하고 떠나야만 하는 길, 줄기차게 끌어당기던 생의 끈 언제라도 놓아버릴 각오가 되니, 하늘도 나무도 바람도 참 씁쓸한 입맛 다시며 고요해진다.
 
의자 하나 끌고 가려다
의자에 끌려 다닌다
 
엉덩이 하나 제대로 걸칠 수 없는
작은 의자
 
평생 마음 편히 앉아보지 못한 채
내가 끌려가는
 
이 의자
 
-졸시 ‘인생’ 전문
 
5. 사주팔자 따라
 
몇 년 전 팝핀 현준의 춤을 보며 눈물 흘리다가 쓴 인생이란 졸시가 새삼 읽혀진다. 부끄러운 줄 모르고 처용아내라며, 처용아내는 정 숙한 부인인데 처용이 바람피운다며 잔소리하고 나섰던 자신이 이제사 조금 부끄러워진다. 거기다 승무를 처용무라며 그림 같지 않은 호작질까지 하면서 모든 건 숙명, 제 사주팔자 따라 움직인 거라고 종종 자위를 해본다.
 
천 년 전 역신이 ‘처용아내의 유방에 찾아들기 까지 얼마나 긴 그리움이었던가’춤추며 지금도 귓가에서 중얼중얼거린다. 이렇게 쫓겨나기는 억울하다며 제발 같이 있게 해달라고. 난 징글징글하다며 식칼을 사방으로 던지며 객귀 물리는 굿을 한다. 칼 든 여자가 간절한 표정이다가 무섭게 째려보는 기도 춤을 펼쳐 보인다. 그림이, 호작질이 광기를 앞세워 오방색 칠한 깃발을 내건다. 대나무가 흔들린다. 호통을 친다. ‘얼 쑤! 물렀거라!’
 
6. 마무리
 
여자에게 모자는 절대 사치가 아니다. 자존심이다. 암세포란 머리털 뿐 아니라 속눈썹, 코털, 등 몸에 있는 털이란 털은 다 뽑아 가버린다.
 
 
남의 수치스러운 부분을 감싸 안고
바람의 장난에도 절대 떨어지지 않으려는
 
암 세포에 죽을힘으로 항거하며
발 버둥거리다가
머리카락, 속눈썹까지 다 빼앗기고
끝내 줄줄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민둥산, 맨 머리 한사코 감춰 주려하며
 
괜찮다 좀 더 참아라, 참아라
밥숟갈 들고 기다려 머리카락 길러주는
그 눈물 나는 우정
 
참다운 벗의 모습
 
 
--졸시 [모자]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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