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15    업데이트: 24-03-15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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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숙의 처용여자 [이상번의 시 읽기]
관리자 | 조회 662

처용여자

 

             정 숙

 

파도 잠재운다는 핑계로 오히려 더 거세게 허허바다

출렁이며 바위에 깨지다가 방파제에 부딪혀 피를 쏟는

 

제 몸 추스르지 못해 몸부림치다가 끝내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마는

 

속곳 바람 저 미친 불길의 여자

 

                < 2009, 시집 바람다비제(祭) 중에서 >

 

//정숙 시인; 1948년 경산 자인 출생/경북대국문과 졸업/1991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시집, 신처용가. 위기의 꽃. 불의 눈 빛. 바람 다비제 등/현재 현대불교문인협 대구경북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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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로틱하게도 보이는 이 시를 감상하기 전에 먼저 처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처용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처용랑망해사(處容郞望海寺)조에 나오는 처용가에서 유래한 것이다.

 

헌강왕이 개운포(開雲浦) 바닷가로 놀이를 갔다 돌아가는 길에 물가에서 쉬고 있는데 동해 용왕이 풍랑이 일게 하자 왕이 용을 위해 절을 지으라고 명하자 조화를 멈춘 용은 왕 앞에 나와 인사했다. 동해 용의 일곱 아들 중 1명을 왕이 대려와 정사를 보게 했는데 그의 이름이 바로 처용이다. 왕은 그의 마음을 잡아두기 위해 미녀를 아내로 맺어주고 급간(級干)이란 벼슬을 주었다.

 

처용의 아내는 매우 아름다워 역신(疫神)이 사모했다. 역신은 사람으로 변해 처용이 없는 밤에 그의 아내와 동침했다. 처용이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와 보니 자기 아내의 잠자리에 두 사람이 누워 있었다. 이에 "동경 밝은 달에/밤드리 노닐다가/들어와 자리 보니/다리가 넷이어라/둘은 내 것이런만/둘은 뉘 것인고/본디 내 것이다만/빼앗긴 걸 어찌하릿고." 라는 처용가를 지어 부르며 춤을 추면서 그 자리를 물러나왔다.

 

처용이 물러나자 역신은 처용 앞에 모습을 드러내 무릎을 꿇고 "제가 공의 아내를 사모해 오늘 밤 공의 아내를 범했습니다. 그런데도 공은 성난 기색을 보이지 않으니 참으로 감복했습니다. 맹세하건대 이후로는 공의 모습을 그린 화상(畵像)만 보아도 그 문 안에는 들어가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성에 아주 관대하고 개방적인 시대의 신라인들은 문간에 처용의 얼굴을 그려 붙여 아내의 바람기를 잠재우고 사귀(邪鬼)를 물리치고 집안의 경복(慶福)을 희원(希願)했을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처용은 간통 당하고 있는 아내를 조금도 원망치 않고 또한 간통 현장에서 현대사회의 법적으로 말한다면 현장보존적인행위는 하지 않고 요즘으로 치자면 머저리 같은 좀 모자라는 남자라고 하겠지만, 친한 벗이 오면 밤에 아내를 사랑채에 넣어 준 신라시대에서는 처용이 아내를 조금도 탓하지 않고 또한 간통자도 조금도 미워하지 않고 노래와 춤으로 아내를 범한 자를 절복 시키는 극적인 장면은 당시 불교사회의 불교적인 중생제도적인 의미로 보아야할지 신라예술의 극치라 해야 할지 모를 일이다.

 

 정숙 시인의 시를 대하면서 어느 누구도 처용아내에게 정숙하지 못한 여자라고 한 적이 없는데 정숙 시인만이 스스로 처용아내를 변호하는 시인이 되었으니 같은 여자로서 뭐...“죄인이 제 발 저린다”는 자격지심에서 쓴 시가 아니냐? 라고 농담 삼아 힐난하는 사람이 있으면 파안대소 할 것이다.

 

 위 시의 제목이 왜 하필이면 처용과 여자라는 것으로 정했을까? 이 시의 답은 바로 여기에 함축되어 있다. 우리 한국 여인들에 대한 역사적인 질곡을 피상적으로나마 살펴본다면 처용이 등장한 신라사회는 모성중심의 사회라고 할 정도로 여성이 남성 못지않게 존중되고 신성시 된 사화였다. 어떤 역사학자가 주장하는 프리색스 시대는 아니더라도 성적인 부분에서 대단히 개방적이고 관대한 사회였던 것은 사실이다. 고려 때에도 나라 이름만 고려로 바뀌었다 뿐이지 풍습은 신라 때와 크게 다를 바 없이 심지어 사람 이름을 짓는데 여성의 성을 따를 정도로 여성이 무시되지 않는 사회였으며, 조선시대에 넘어 오면서 유교 적인 남존여비 사상으로 철저히 여성들 옥죄는 사회가 되었고 피폐한 조선 말기와 구한말 일제식민시대와  6.25 사변과 근대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여성의 고난과 함께 여성들의 신분에 대한 사회적인 억압이 이어지다가 오늘날 남녀평등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그동안 묶여 있던 여인들의 해방감에 대한 선언적인 행위의 시가 정숙의 시라고 단정하고 싶다.

 

 그동안 시집 신처용가(1996) 위기의 꽃(2002) 불의 눈 빛(2003)에서 바람다비제(2009)까지를 살펴보면 여성을 주제로 한 시가 많다. 이러한 것을 볼 때 정숙 시인 또한 그러한 시대를 겪어 온 장본인이었기 때문에 여성에 대한(처용아내에 관한) 시를 쓴다기보다 아주 쏟아내었다고 함이 옳을 것이다. 1948 년 생(원효가 태어난 경산 자인 출생)에다가 잘나가던 일류대학을 나와 국어교사도 버려야만 했던 그야말로 층층시하 명문대가의 종부로서 그의 가슴에서 스스로 처용아내를 위로 해 주고 싶은 여인에서 신라시대부터 면면히 흐르는 신라적인 여인의 유전적 혈통이 오늘의 처용아내 정숙 시인으로 탄생하게 했을 것이다.

 

                       //글쓴 이; 이상번(시인, 전 현대불교문협 대구.경북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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