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5    업데이트: 19-05-20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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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동네 시인선 038_정하해 시집 『젖은 잎들을 내다버리는 시간』
아트코리아 | 조회 1,365

[책 소개]

낯선 음역으로 떠나는 서정의 노래

시인동네 시인선038. 2003시안으로 등단한 정하해 시인의 신작 시집. 정하해 시인의 시는 외부에 놓인 시적 지향점에 도달하기 위한 여정이다. 시인은 자신이 자리한 이곳으로부터 도달하고 싶은 저곳을 향해 끊임없는 탐색을 도모한다. 그것은 기존의 익숙함을 적극적으로 극복함으로써 이 낯익음의 세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시적 의지다. 그의 시는 일반적으로 기대하게 되는 서정성의 세계를 번번이 배신함으로써 고유한 정서를 획득하는 한편 서정의 보편적인 원리를 배반함으로써 자기만의 시적 개성을 확보한다. 보편적 세계를 기반으로 언어화한 듯싶지만 결코 일반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시적 세계와 동일한 층위를 이루고 있지 않은 정하해의 시는 변주와 왜곡을 통해 낯선 세계를 파악하고 제시하고자 하는 시인의 사투이자 기록이다.

[책 속으로]

어디서든 아우라지

고통은 여물었다, 송두리째 내가 빠져나갔다

열매 속의 저 유순한 결, 우리가 취하고

나누었던 바람의 길

말을 걸면 단물이 곧 터질 것 같다

청춘이 저렇게 눈물겹게 왔다 간 길이었겠다

너를 벗겨내면 여름을 질러온 활주로 같은 서슬이 있어

그것이 마침내 징검돌 씨앗으로

단단히 박혔을 때

그러나 당기면 끌려 나오는 그 시고 떫은 것

누구나 홀로 여무는 이맘 때

뼈에 매어둔 길이, 돌아보면 다 제각각 고통인 것들

손잡아 주지 못했다

너라는 외상(外傷)

막 쑤어놓은 죽처럼 고루 퍼졌다

낙이 없는 일보다 더 무서운 건 없는 거여서

죽은 조개를 뒤적이다 누군가의 죽은

영혼이 열리는 것 같아

무명씨를 생각한다

그 기웃거림 뒤로 종종거리는 노을은 과속으로 오고

너라는 것

뻘에 내버려두었다

울음이 병처럼 또 한 울음 만드는 갯벌 안으로

사는 게 아니라 견디는

너는, 헐었다

[시인의 말]

인질이라는 말을 생각한다.

몇 년 동안 잡혀 산다는 것 끔찍한 일이지만

아무것도 고백할 게 없다는 게 더 슬플 뿐이다.

나를 던져주어도 가져가지 않는다는

이 익숙한 것들의 전범, 밤낮없이

거래하던 내 정신의 인질, 이제

가거라!

[출판사 서평]

낯설음과 낯익음, 그리하여 이율배반

정하해 시의 감각과 공간은 서정성에 많은 부분 빚을 지고 있다는 점에서 낯익은 것이지만, 그곳은 매순간 낯선 미지의 영역으로 바뀌어버리곤 한다는 점에서 낯설다. 그리고 그 이유는 시적 국면을 대하는 시인의 태도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정하해의 시는 우리에게 익숙한 대상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거나 폐기하지는 않지만, 기존의 익숙함에 전적으로 매몰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정하해의 시는 기존의 익숙함을 적극적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시적 의지를 통해 낯익음의 세계를 벗어나고자 한다.

정하해 시의 발성이나 국면이 낯익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는, 시적 대상과 정황을 변주하고 왜곡하고자 하는 시인의 의지가 명백하기 때문이다. 물론 정하해의 시적 변주와 왜곡은 환상이나 전위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당연히 아니다. 그의 시는 기존의 시적 질서를 폐기하기보다는 오히려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하해의 시가 낯선 감각을 수용하고 제시하게 되는 것은 시적 대상을 응시하는 시인의 시선과 태도가 기존의 그것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의 시에 등장하는 시인의 음성은 무엇을, 어떻게 말하고자 하는가. 기존의 시적 언어나 감각과 같은 듯 다른 이율배반. 정하해의 시를 읽을 때면 우리는 언제나 이와 같은 이율배반의 감정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녀를 실은 바람은 파도를 놓기 시작한다 파도가 해시시 곤두박질치는 동안 그녀가 오므려 발부터 씻는다 불길하게 따라왔을 발목이 붉다 맨손으로 제 안에 것 샅샅이 문지르는 일, 뜨물이 된 물은 서해로 흘러 쌓였을 때 이승은 화창하고 경쾌해야 했다 그녀가 다 씻김으로 흔적은 절정 중이어서 하얗게 여문 소금을 모으는 한 남자가 있다 뜨겁고 매끄러운 살을 혀로 감탄하는 어느 염부의 뻘밭 같은 생애가 드디어 달처럼 올라

—「소금을 치다전문

소금을 치다에 나오는 바람과 파도는 보편적인 자연물의 정서로 전이되지 않는다. 바람과 파도의 해변에 있는 그녀는 손이 아닌 발을 씻고, “불길하게 따라왔을 발목은 붉은색으로 번져 있다. 그리하여 이 시의 이승은 살아 있음을 표상하지 않고 씻김으로절정 중인 흔적과 연결되기에 이른다. 이 시에서처럼 정하해의 시는 일반적으로 기대하게 되는 서정성의 세계를 번번이 배신함으로써 고유한 정서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점은 다음에 제시한 선유도역시 마찬가지이다.

여인의 가랑이에서 우는 바다를 보았다/목격한 순간이 죄였다 그런 고통으로 하여/남모르는 억장을 가졌다//보름날의 피눈물을/여인은 그러모아 서쪽에 널어놓고/시름시름 앓았다/병이 굳어 몇몇 섬이 생겨나고//바다는 죽은 여인을 업고 다니다/말세처럼 보풀이 일었다//여인이 걸어간 방향을 걸었다/거기는 여인이 만들다 만 아이 머리가 떠 있었다/새파랗게 질린/,/나는 몸으로 아이 머리를 감싸 안았다//아이의 팔다리가 나를 거쳐 바다를 건너갔다/천지간 피가 튀었다

—「선유도전문

정하해는 도시적 상상력이 아닌, 자연을 기반으로 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시를 쓴다. 그런데 그가 자연을 대하는 태도는 일반적으로 자연을 접했을 때의 그것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정하해의 자연은 단순한 비애의 감각을 드러내는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선유도에서 시인은 여인의 가랑이에서 우는 바다만들다 만 아이 머리등을 감각한다. 이러한 정서는 일반적으로 자연이나 서정의 영역 밖에 없는 것이라 여겼던 것들이다. 그런데 정하해는 선유도를 통해 이와 같은 고통과 죽음을 적극적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정하해의 시적 세계는 대개 이런 식으로 변주된 정황을 전개하는데, 그러한 부분을 통해 정하해의 시적 성취는 빛을 발하게 된다. 이처럼 정하해의 시는 보편적 세계를 기반으로 언어화한 듯싶지만 결코 일반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시적 세계와 동일한 층위를 이루고 있지 않다. 그리하여 정하해의 시는 변주와 왜곡을 통해 낯선 세계를 파악하고 제시하고자 하는 시인의 사투이자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의 산문]

동일성이 아니라 늘 홀로 헤매는 일이 나의 상상계다. 주제와 밀착이 어렵다는 사실을 고백하건대 무한과 유한의 경계성에서 나는 참혹함 그 자체일 뿐이다. 시의 노동이 언젠가는 한 몸으로 올 것을 희망하지만, 그 무시무시한 감성은 비어져 있다. 울음이 왜 없는가를, 수많은 사물에 휘말려 들면서도 절대라는 말을 지금껏 써보질 못했다. 바로 내가 혼돈이기 때문이다. 시를 울리지 않는 건 쉬웠다. 어쩌면 비정상적인 내가 나를 둘러메고 벼랑을 타는 일 그것은 아슬아슬한 외침이었다. 나로부터의 탈출 그러나 불러 세우지는 않을 것이다. 죄스러운 건 독자들의 몫을 건드리지 않고 떠나왔다는 것이다. 시의 바깥을 돌다 보면 서로가 스며드는 그런 날 있지 않겠는가.

[저자 소개]

정하해

경북 포항에서 태어나 2003시안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살꽃이 피다』 『깜빡등이 있다.

[차례]

시인의 말

1

다만 내연의 일로

독감 바이러스

균열

어떤 저녁의 풍경

한 다발 달을 죽이기 위해

해바라기

젖은 잎들을 내다버리는 시간

날마다 만찬

어디서든 아우라지

너라는 외상(外傷)

블루로드 위의 납자(衲子)

어느 날 그대가 딱정벌레처럼

누 떼를 보았다

사랑을 받아쓰기하다

2

너도바람꽃

메밀이라는 식구

무심코 지나는 것들

나비를 경험하다

어둠의 아이들

빈손

지느러미가 향하는 곳은

아베마리아 후손들

판화 한 점

꽃백정

샐비어 내력

소금을 치다

입술

시인의 폭우

3

너와의 논쟁

팔만대장경 그 가계

무서운 타관

최남단에서 쓰는 편지

식은 밥의 유래

운흥사 벚나무

석가의 낮잠

그 절에 이무기 한 마리

새벽 네 시, 혹은

밀양아리랑

싯다르타를 찾아

물 위의 불영사

서암정사

접시꽃

4

상강(霜降)

선유도

흑백, 62번지

화첩기행

붓질을 당하다

()

모아이

엉겅퀴

누군가의 산책

밀양과 밀항 사이

고기 굽는 저녁

헌신적인 오독

동인동 찜갈비

그 남자의 수제비를 먹은 다음날

회전하는 얼굴

해설 북방의 철로를 따라가는 어느 저녁 / 조동범(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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