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서양화가 전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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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평론

- 2010년 09월 21일 - 매일신문 - [대구근대미술의 향기] 전선택 '운명'
아트코리아 | 조회 905

[대구근대미술의 향기] 전선택 '운명'


뛰어난 상상력으로 재구성한 한자의 형태미

 

1954년 경상중학교에 미술교사로 부임하면서 대구에 정착한 작가는 거리 풍경을 담기 위해 틈틈이 동인로터리 부근으로 나가 흔히
 만나는 말 달구지를 스케치하곤 했다고 한다. 그러다 5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양식의 변화가 일어나는데 재현적인 자연주의 화풍에서 벗어나 점차 대상의 단순화를 추구하며 추상화도 시도하게 된다. 마치 정물화의 소재들을 놓고 평면적인 형식으로 재배치한 것 같은 이 작품은 작가의 뛰어난 상상력이 엿보이는 의외의 작품으로서, 구성을 한자의 글자에서 착안해 고안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사각형의 화면을 탁자와 배경의 경계선으로 구획한 뒤에 그 위에 밝은 백자색의 큰 사발과 둥근 대접 모양의 윤곽으로 공간을 가득 채우 듯 겹쳐놓았다. 가운데는 네 마리의 생선과 도마와 칼을 그렸는데 용기의 큰 윤곽선 내에 포함되게 하였다. 정물화라고 하기에는 조형적으로 단순화한 형태와 구성의 질서가 현대적인 추상의 감각에 접근해 있다. 귀엽고 재미있게 생긴 생선의 어른거리는 비늘무늬, 벼린 칼날의 광택 등의 묘사는 매우 감각적이어서 차분한 분위기의 색채와 함께 작가의 섬세한 감수성을 전한다. 특히 구성에 신경을 써 좌우, 상하의 균형을 맞추며 배치의 조화를 꾀했으나 구도를 지배한 숨은 상징이 따로 있어 이채롭다.

 

작품의 모티프는 제기를 가지고 소꿉놀이를 하면서 예를 배웠다는 공자의 어릴 때 일화를 대하고 ‘조(俎)’자의 형상을 그림으로 재구성해보게 된 것이라고 한다. 조(俎)는 본래 且(조)로서, 제사 때 고기를 담아 받치는 그릇 모양을 본뜬 자인데 다시 왼편에 고기 살의 단면을 상징하는 네 획을 더해 지금의 조리하는 도마의 뜻으로도 사용하게 되었다 한다. 좌변의 사람 인자 둘은 생선 그림으로 대체하고, 우변은 도마와 그 아래 칼을 놓아 자획의 모양을 완성했다.

 

‘운명’이란 제목은 곧 도마 위에 오를 생선의 처지를 두고 붙였을 법한데, 작가의 유머에서 나온 재치 있는 표현이지만 주제의 의미를 여기에 한정시킬 필요는 없겠다. 작가의 의도와 관계없이 운명이란 단어는 도마와 부엌칼과 생선과 그릇들의 소재로 떠올릴 수 있는 각자의 연상으로 이어나가 확대될 수 있다. 달빛의 색깔, 추석의 음식, 어머니에 대한 생각 등으로.

김영동(미술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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