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서양화가 전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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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16    업데이트: 13-09-12 22:20

언론 평론

4인의 원로작가를 만나다
아트코리아 | 조회 1,139


(왼쪽에서부터 강우문, 서창환, 신석필, 전선택)

 

 

4인의 원로작가를 만나다

주름진 손.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그 손으로 붓을 잡는다. 움직임은 요란하지 않다. 구태여 힘을 주지도 않는다. 천천히 오가는 붓 아래 어느새 짙은 향의 그림이 피어난다. 그들의 연륜은 예술이 되고 역사가 된다.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창작혼을 불태우는 화가들이 있다. 신석필(90), 전선택(88), 강우문(88), 서창환(87). 이들은 말한다. 미술 활동에 정년은 없다. 몸이 조금 불편해졌을 뿐, 예술의 혼은 더욱 깊고 짙어졌다. 식을 줄 모르는 열정으로 전시회 준비에 한창인 이들의 작업실을 찾았다.


국적 있는 그림을 그리겠다-강우문 화백

거동이 힘들어 보였다.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표정은 밝다. 미소는 따뜻했다.
방안으로 들어서자 한 켠에 자리잡고 있는 이젤이 보였다. 그 위에는 방금 작업을 마친 듯한 그림이 올려져있다. 삼베옷을 입은 농민들이 환호를 지르고 있는 모습이다. 온화하다.
“이 작품의 제목은 ‘백의의 함성’이야. 마을에 잔치를 열며 함께 기뻐하는 농민들을 묘사한 거지. 이번 전시회에 선보일 계획이야.”
강화백은 한국의 전통미를 화폭에 담아왔다. 
20여 년 전, 프랑스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는 굳은 결심을 했다. 국적 있는 그림을 그리겠다고. 서양화 속에 가장 동양적인 것을 담겠다는 것이다. 프랑스 루브르 미술관을 둘러본 그는 서양화의 기법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겠다고 느꼈던 것이다.
“원래 나는 풍경과 정물, 누드 등을 그렸어. 헌데 외국에 나가보니깐 내 그림이 너무 볼품없어 보이더라구. 재료와 기술이 너무 차이가 난 거지. 이럴 바에는 색다르게 가장 한국적인 것을 그려보자 싶었어.”
시대에 따라 소재는 조금씩 달라졌다. 1980년대에는 탈춤, 농악 등을, 1990년대 중반부터는 삶의 희로애락이 담긴 서민의 춤을 그렸다. 토속적인 익살과 해학, 변형의 기법으로 역동적인 화면을 구성했다.
색감에도 사치를 부리지 않았다. 흰색과 회색을 주로 사용하면서 백의 민족의 특징을 살렸다.
“난 리얼리즘을 강조해.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그것만큼 좋은 요소는 없지. 서민의 애환을 쫓는 시대적 증인이고 싶어”

 

색채와 내면세계에 대한 탐구로 일관-전선택 화백
낮은 채도의 차분한 화폭. 새들이 한가롭게 노닌다. 그 옆에 서 있는 나무에는 노란색 꽃이 만발했다. 평온하다.
그림의 제목은 ‘낙원’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 평소에 동경했던 그곳을 그림으로 풀어냈다.
전화백의 작품에는 때묻지 않은 순수함이 녹아있다. 성품에서 비롯된 것이다. 젊은 시절 전화백은 이중섭과 가까이 지내며 그의 뜨거운 창작열과 검소한 생활방식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화려한 것을 추구하지 않아. 한국의 정신과 색채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지. 반세기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 형태와 색채에 대한 탐구에 집중하며, 내면세계를 표출하는 작업을 지속해왔어.”
일본 가와바다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그는 1946년 월남 후 대구에 자리를 잡았다. 대구국제비엔날레와 한국신구상회 창립위원을 역임하면서 그동안 30여회 개인전을 여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전 화백의 작품은 단순한 구도를 취한다. 부드러운 색채는 풍경과 인물을 도드라지게 한다. 엄마, 소년, 소녀, 친구, 어부의 아내 등 친숙하고 정감 있는 대상에서 푸근함을 이끌어낸다.
“구상이든 추상이든 구애받지 않아. 경험과 현실에서 소재를 취하는데 어디까지나 대상에 대한 관조에서 나온 것이지.”
그가 문득 작은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아이를 품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50년전 한 여인을 보고 스케치를 해 놓을 것이다. 그는 그때그때 생각나는 형상을 간략하게 그려 뒀다가 작품으로 옮긴다. 그림에 대한 열정이다.
“내가 기억력이 썩 좋지 않아. 그래서 주머니에 항상 연필과 종이를 가지고 다니면서 스케치를 해두지. 이번 전시회는 내가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들로 구성했어. 온갖 불순물들이 정화된 예술의 혼을 느낄 수 있을꺼야.”

 

시대의 어둠을 넘어 화려한 원색으로-신석필 화백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어떤 유파와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독자적인 세계를 일군다. 그림 속에는 고향에 대한 항수와 추억, 어린 시절 체험한 정서들이 녹아있다.
“옛날에는 사실적 인물로 어두운 시대의 그늘과 이별을 표현했어. 하지만 요즘에는 원색과 보색의 화려한 결합을 강조하지.”
그는 평양 국립미술학교 조교수였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남다른 소질을 보였다. 초등학교 때 미술선생님이 그의 재능을 알아봤고 체계적인 그림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당시 북한에 미술을 배우는 사람은 열 명도 채 안 됐다.
하지만 북한에서의 화가 생활은 답답했다. 마음대로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사회주의라는 제약이 따랐다. 주제도 색감도 항상 정해져 있었다. 남한을 동경하기 시작했다. 좀 더 자유로운 환경에서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개척하고 싶었다.
그러던 중 6.25사변이 일어났고,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남쪽으로 내려왔다.
“1953년 부산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열었지. 북한에 있었다면 상상도 못했을 거야. 이후 이중섭, 박항섭 등 12명과 함께 ‘월남화가단’을 창단했지.”
신 작가는 수많은 작품 중 ‘얼굴’이라는 그림에 유독 애착이 간다고 했다. 험악한 모습과 순수한 마음이 함께 담긴 그림이다.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요즘 세태를 풍자했다. 이번 전시회에 출품된다.
“화가의 길을 참 잘 택한 것 같아.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보통 50살이 지나면 하기 힘든데 그림은 죽을 때까지 그릴 수 있잖아. 나이가 들수록 더 좋은 작품이 나오는 것 같아.” 그는 제 50회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다.

 

남색조의 나무는 나의 신앙고백-서창환 화백
어느 해 이른 봄날 팔공산에 올랐다. 산에는 야윈 나무들이 가득했다. 문득 아사 상태의 나무들이 인간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는 겨울에 죽음을 맛봤다가 날이 따뜻해지면 꽃이 피면서 다시 소생한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힘든 고통의 시간을 참고 견디면 행복이 찾아온다.
그때부터 나무에 천착하기 시작했다. 올해로 40년째. 한결같이 남색조의 나무숲만을 그린다. 나무가 사람들에게 주는 여러 가지 의미를 화폭에 담는다.
이제 나무는 작가에게 종교적 의미로 다가온다. 하늘로 솟아오른 나뭇가지들은 오는 절대자와의 소통을 위한 매개체 역할을 한다.
“내 그림은 인간 삶의 의미를 나무에 의탁하고자 하는 나의 신앙고백이야.”
서 작가는 미술계에서 교육자로도 유명하다.
1940년 일본 유학을 통해 서양화를 배운 그는 해방 후 경북 영주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한다. 1959년에는 경북중학교로 부임하면서 대구와의 평생 인연을 맺었다. 이후 60여년간 중등학교 교사와 미술대학 교수로서 후학을 양성했다.
“지역 미술계에 수많은 미술인들을 배출했지. 사회 지도층 인사들도 학창시절 나의 가르침을 통해 인성을 완성했어. 후배를 양성하는 것은 선구자들이 당연히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해.”
그는 욕심이 많다. 수십만장의 그림을 그렸어도 아직까지 만족스러운 작품이 없다고 한다. 20호짜리 그림 하나에도 몇 달씩 매달리기도 한다. “살아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 그래서 나무결 하나도 섬세하게 살리려고 노력하지. 요즘에는 화법에 변화를 줬어. 갈색을 한번씩 사용하기도 하고, 나뭇잎도 조금씩 그려 넣기도 해.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한 방법이지.”

장정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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