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3    업데이트: 22-12-30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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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원의 그릇 알레고리 - 정재된 기억 _ 글|서영옥 (미술학 박사)
아트코리아 | 조회 497
장개원의 그릇 알레고리 - 정재된 기억
글|서영옥 (미술학 박사)

조선시대 왕실에는 그릇 만드는 사기장이 있었다. 사기장은 재능과 실력을 두루 갖춘 장인(匠人)이다. 사기장의 존재만으로도 그릇의 가치를 매겨볼 수 있다. 우리는 가끔 사람의 자질이나 역량, 근기 등을 그릇에 빗대곤 한다. ‘대기만성(大器晩成,) ’‘큰 그릇이 될 사람’ 또는 ‘그릇이 작은 사람’이란 말도 같은 맥락이다. 집안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기물인 그릇은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그 용도가 달라지고, 쓰임에 따라서 다양한 크기와 형태가 요구되기도 한다. 음식을 담아 준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도 각각 다른 추억을 남기는 것이 그릇이다. 장개원 작가에게는 이러한 그릇이 작업의 주요 모티브다.

작가 장개원은 오래전부터 그릇을 그렸다. 그릇에 집을 담기 시작한 것은 7년 전부터다. 상식적으로 집은 그릇에 담을 수 없다. 집의 크기가 그릇에 담을 수 있는 범위 밖이기 때문이다. 하여 그릇 속에 담긴 집은 모순이자 반전이며 역설이다. 도발이 될 수도 있다. 반전이 도전받지 않고 정당성을 획득할 때가 있다. 더 큰 설득력을 얻기도 한다. 바로 ‘그림’의 매력이 아닐까 한다. 장개원 작
가는 집을 요리하여 그릇에 담는 시도를 함으로써 자신의 예술을 역설한다. 바로 장개원 작가의 작업 의도가 읽히는 지점이다.

그릇 하나가 작은 우주를 형성했다. 타임캡슐과 같은 그 그릇이 속 깊은 이야기에 파동을 일으킨다. 장개원 작가가 그릇에 담은 집은 매우 낯익다. 모두 한국의 시골 정취가 듬뿍 묻어나는 집들이다. 기억 한편에 간직했던 과거의 퍼즐 한 조각을 떼어놓은 것 같은 이 집에서 우리의 익숙한 일상을 보게 된다. 현실의 집이란 뜻이다. 현실적인 집에 몽환과 환상이 포개어지는 이유는 과감한 시도 즉, 모순과 반전을 실천한 결과이다. 중력을 거부한 그릇이 부유하고 그 그릇 속에 집이 담겨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장개원 작가는 자신이 불필요하다고 판단한 부분 묘사를 생략했다. 중후한 멋에 기대지 않을뿐더러 두꺼운 마티에르도 밀어낸다. 물감의 번짐과 스며듦을 적절하게 이용할 줄 아는 작가는 아르쉬지와 수성재료간의 궁합을 꾀고 있는 듯하다. 기교와 묘사력을 두루 갖추었을 때 가능한 표현들이 포착된다. 치열한 고민과 최선을 다하는 작가의 노력이 뛰어난 테크닉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원치 않는 색은 팔레트에서 걸러낸다. 장개원이 선택한 색들은 자신의 내면에 침잠한 감성코드일 가능성이 크다. 작가의 차별화된 감성을 실어 담은 선과 색이 조화를 이루며 바쁜 농부의 하루를 한가롭게 풀어놓는다. 그것이 따뜻한 감성을 자극하는 까닭은 유년기의 좋은 기억만 남겼기 때문이라는 것이 장개원 작가의 고백이다.

이러한 장개원의 집 풍경은 비현실경이다. 낯선 듯 낯설지 않은 풍경이 우리의 고정관념을 넘어선다. 초현실주의 작가 달리의 그림이 포개어졌다가 애드벌룬이 오버랩 되기도 한다. 일본 만화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처럼 다리는 없지만 공중에 떠 있는 집이 우리의 심층 깊은 곳에 가라앉았던 자유의지까지 끌어올린다. 그럼에도 장개원이 사발 속에 담은 집은 하나같이 안정감을 유지한다. 동양화에서는 기암절벽 같은 웅장함을 고원법이나 심원법에 기대곤 한다. 서양미술사에서는 틴토레토의 ‘최후의 만찬’과 같은 극적인 장면 연출을 위해 파격과 왜곡을 허용한다. 장개원 작가는 이와 같은 파격과 충격적인 장면을 배제하는 대신 안정감을 유하는 평원법의 눈높이를 고수한다. 안정감은 고요로 이어져 사색의 진입로로 안성맞춤이다.

이런 집 풍경 어디에도 사람은 없지만 빈집은 아닌 듯하다. 자세히 보면 작가의 가슴속에 묻어 둔 아련한 추억을 소환한 지점들이 화면 곳곳에 숨어 있다. 마당과 마루, 닫혀있는 방문에서조차 느껴지는 인기척을 우리는 외면할 수 없다. 부엌문 빗장을 풀면 하얀 앞치마를 두른 아낙이 마당으로 걸어 나올 것만 같다. 작가의 유년기를 푸근하게 채워준 어머니가 그림의 중심축이라고 한것을 상기한다면 그려볼 만한 장면이다. 어머니는 향수와 고향의 대명사다. 보금자리이자 안식처이며 사랑의 표상이다. 유채꽃이 활짝 피어나 주위를 밝히는 꽃등불이 되었다. 장개원 작가에게 유채꽃은 봄 그 자체이자 삼동초로 나물반찬을 해 주시던 어머니이다. 먹기만 했던 꽃이 정원을 일군 것을 본 환희를 장개원은 일찌감치 경험했던 것이다. 작가는 이렇듯 정감 어린 지난날의 시·공간이 점점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예술로 노래한다. 일종의 상호 텍스트성이다.

마당에는 어김없이 나무가 우뚝 서서 집을 지킨다. 나무는 화면 전체의 균형감을 잡아주는 매개체로 유효하다. 색채조화는 물론 상생을 도모하는 소재로도 요긴하다. 집이 어머니라면 나무는 아버지일까. 자식이나 가족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복사꽃이 만개한 마당에는 봄기운이 완연하다. 시작을 알리는 계절인 봄은 긴장과 동시에 설렘을 동반한다. 초록색 잎이 무성한 나무에는 싱그러운 여름날의 열기가 한가득이다. 노란 단풍은 수확의 계절을 알린다. 앙상한 겨울 가지는 휴식이다. 고양된 사유의 모범적인 자태라 해도 손색은 없다. 사계절을 품고 있는 나무는 생장과 소멸을 반복한다. 피고 지는 것에는 생명력이 담보됐다. 모두 자연의 순환원리와 맞물린다. 정지가 죽음이라면 흐르는 시간은 그 반대편이다. 하여 나무로 표현된 사계절의 순환은 정지가 아닌 지속되 는 우리 삶으로 봄이 옳다. 바로 장개원 작가의 바람과 성정이 머무는 지점이다.

서양의 풍경화는 근경과 중경, 원경 배치에 치밀하다. 원근법은 현실적인 느낌을 자아내기 위한 일종의 눈속임이다. 서양화를 전공한 장개원은 과감하게 중경을 버렸다. 대신 근경에 집중한다. 그럼에도 삼차원의 공간감은 살아난다. 실재하는 것 같은 삼차원의 공간감과 미적 지각은 일종의 객관적인 지각이다. 사실 우리가 그림에서 보는 것은 실제의 공간이 아니라 그것의 이미지다. 이때 미적 지각은 주관적 상상이 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예술(작품)이 진리 혹은 지식의 개념에 가깝다면 후자의 경우는 즐거움의 개념(감정)과 결부된다. 장개원의 그림은 전자를 바탕으로 후자를 노래한다고 할 수 있다. 그 노래가 한편의 서정시를 읽는 느낌을 준다.

마음의 뜰에 한 자락 생명의 꽃을 피우는 장개원의 그림은 초점을 과거에 맞춘 과거 시점이다. 장개원 작가에게 집은 어머니의 숨결이면서 메모리 공간이기 때문이다. 집은 그릇에 따뜻한 음식을 담아주시던 어머니와 동일시된다. 집은 곧 그릇이고 그릇은 어머니라는 등식을 세워볼 수 있다. 이렇게 얼개를 짜고 나니 현재의 집은 장개원 작가에게 어떤 의미인지도 궁금하다. 작가에게 삶은 전체가 작업의 자양분이다. 다만 어디에 주목하느냐가 관건이다. 예술은 현실의 눈이 되기도 한다. 현실을 질문하고 치열하게 그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작가가 있는 이유이다. 정재된 기억을 느림의 보폭으로 풀어내는 작가 장개원이 지나간 현실에 주목하는 이유는 부유하는 말과 기억이 의미 없이 흘러가지 않도록 붙잡아 우리의 감성을 촉촉하게 적셔주기 위함일 것이다. 관객으로서 우리가 누리는 최고의 호사는 작가의 기억에 담긴 것들이 재창조되는 과정과 그 결과물을 오롯이 감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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