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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나의 삶 나의 예술_그림은 자신의 의식세계를 표현하는 것 / 서양화가 김일환 / 대구문화 2018 12월호
아트코리아 | 조회 743
나의 삶 나의 예술_

사고 난 자동차(1982) 작품

나는 1966년부터 고등학교에서 미술부로 활동하면서 미술의 여러 장르를 실습으로 습득했고, 대학에 진학해서는 서양화를 전공하게 되면서 전문적인 화가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화가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자신의 의식세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철학을 바탕으로 한 자기만의 독특한 조형 원리를 체득해 전개해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조형언어는 시대적인 흐름과 환경적인 여건이 어우러져 행위자의 역량이 의식세계에 접목되어 나타나는데, 나의 경우는 대개 10년 단위로 그 변화의 과정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1960년대에는 사물의 구체적인 형상을 재현하기 위해 소묘에 충실했다. 이어 1970년대에는 대학 생활을 통해 느껴지는 것들을 나타내기 위해 자유분방한 필치로 자연주의적인 낭만과 빛의 흐름을 좇아 인상파적인 그림을 주로 그렸다.

한편, 1980년대 초에는 미국 팝아트 형식의 다소 극사실적인 표현을 통해 소외되고 버려진 어떤 부분을 어필하는 형식으로 시대적인 아픔을 고발하고 공유하는 메시지를 그림으로 나타냈다. 예를 들어 버려진 상점의 덧문이나 산사태로 허물어진 흙더미에 드러난 나무뿌리, 거기에 구겨진 채로 버려진 빈 담뱃갑, 그리고 현대 문명과 편리함의 상징인 자동차가 죽음의 현상으로 나타나는 사고 현장과 그들의 무덤인 폐차장의 모습 등을 통해 하이퍼리얼리즘이 가지는 시대적 메시지를 담아내고자 했다.


우리의 것에 심취해 있던 시기
 

이후 1980년대 초중반부터 나는 미니멀리즘적인 담뱃불 작업과 일상의 생활공간에서 접할 수 있는 정물을 초현실적인 상황으로 생략하고 단순화해 표현하는 등 다양한 매체를 이용하게 됐다. 또한 우리 역사 속에 나타나는 민속품들을 신표현주의적인 이미지로 차용해 화면 구성을 극대화하기도 했다.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우리의 전통과 민속을 주제로 대상을 단순화해 표현하는 등 우리의 유적과 유물들을 화면에 끌어들임으로써 민족의식의 고취는 물론, 우리의 의식이 먼 조상으로부터 내려온다는 칼 융의 무의식론에 답하고자 했던 것 같다. 나는 이러한 여러 행위들을 1988년도 전시를 통해 개념적으로 정리하고자 했는데, 당시 전시에 관해 썼던 내 생각을 지면으로 다시 한 번 소개하고자 한다.


 “예술에 있어 창조는 늘 가슴 떨리는 즐거움과 함께 찾아온다. 이 즐거움 자체가 순수요, 아름다움이다. 
그린다는 것은 삼라만상을 통해 보고 생각하고 느낀 감동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행위일진대 이 즐거움을 위해 나는 나 자신에게 늘 솔직하고 싶다. 내 자신이 몸담고 있는 이 땅과 내 피 속에 흐르는 이 민족성, 내 영혼에 잠자는 관습과 전통성, 이 모든 것이 어떤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올까? 

이러한 생각은 우리의 것, 나의 것이 무엇일까라는 의구심과 본능적인 욕구에 의한 나의 의무이며, 과제이기에 역사적인 사실에 믿음을 갖고 싶다. 이러한 믿음이 곧 나의 신앙이다. 또한 나는 우리의 태극사상, 유불선사상, 도가사상 등의 민속 사상을 믿고 혼합주의적인 우리의 무속을 사랑한다.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한 나의 애착은 우리 민족의 오랜 역사 속에 침전되어 온 나의 내면적 끄나풀이며, 이것을 한 가닥 한가닥 풀어 펼쳐 보임으로써 나 자신을 확인하고자 한다. 그래서 우리의 관습에 의한 유무형의 전통성을 존중하며, 역사적인 맥락에서 우리의 것, 나의 것을 표현하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 나는 모든 작업 과정에서 역사적인 진실성과 민족적인 본질성, 인식론적인 전통성에 접근해 새로운 시각으로 구조적이며 형상주의적인 견해를 가지고 화면을 분해, 조합, 재구성해 표현했다. 또 이를 위해 다양한 매체와 기법을 사용하게 됐다. 캔버스와 천에 염료, 아크릴, 오일, 접착제, 스텐실 등을 이용해 한국화적인 염색이나 번짐, 겹침 등으로 표현하고 작업을 위한 노작보다 그 과정을 중요시 하고자 했다. 

어떤 행위가 목적을 위한 수단과 결과론적인 성취감에 만족될 수 없듯이 이러한 나의 표현은 노작으로서 보다 행위 자체에 가치를 두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 행위 과정에서의 심리적 갈등과 고뇌, 그리고 시간적인 연속성과 반복에 의한 사고적인 느낌의 표출이 곧 자기 해소의 한 방법으로 형상화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이 자기 의지에 의한 계획된 인위적 표현으로서가 아니라, 자기 미적 감수성에 의한 우연성이 새로운 체험으로 자기의 가슴에 와 닿아 참신한 의미로 남아있을 때 이것이 순수성이고, 아름다움이며, 비로소 자기 나름대로의 정착화 된 작품으로 승화된다고 나는 믿는다.”

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이즈음 나는 우리의 것에 많이 심취해 있었다. 1989년 아주연맹전을 계기로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를 돌아보면서도 가는 곳마다 이색적인 풍물을 통해 그들의 고유한 민족적 특색을 강하게 느꼈다. 그런데 그처럼 진한 냄새를 맡을수록 나의 것, 우리의 것에 대한 자긍심과 애달픔이 겹쳐졌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나무를 소재로 한 최근 작품 ‘아리랑을 품다’(2018)


음향오행에서 삭힘과 절임으로 

이후 1990년 일본 평론가 야마기시 선생이 운영하는 도쿄의 전촌화랑에서 우리의 무속을 주제로 해외 첫 개인전을 열게 되었다. 무속에는 그 민족의 정서와 애환, 혼이 담겨 있었다. 그로인해 1990년대에는 추상적인 여러 표현을 시도했고, 그러한 시도를 통해 사고의 자유로움과 다양한 선과 색의 어울림을 기대했던 것 같다. 나아가 우리의 무속과 더불어 음양오행사상까지도 형상화하려고 노력했다.
   
음양오행사상은 동양우주론의 근본 원리로 모든 만물은 음과 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오행으로 순환된다는 논리다. 그래서 우주를 상징하는 해, 달, 별, 기, 바람, 구름, 조상 등의 상형문자를 화면으로 불러들여 함께 노닐며 즐기자는 ‘자연유희’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 작업은 이후 물에서 노니는 고니, 오리, 연, 억새 등에서부터 꽃, 새, 나비, 곤충 등과도 노닐게 되었다. 
   
한편, 1996년 서울 인사동에 있는 단성갤러리 초대전을 계기로 나의 그림에 대한 의식의 전개는 가장 토속적인 은유의 미학으로
‘삭힘’과 ‘절임’을 외치고 있었다. 말하자면 당시는 ‘삭힘’이 없이는 ‘절임’을 할 수 없다는 진리를 통해 나의 내공을 쌓아가는 시기였던 것 같다.

“삭힘이란 싱싱한 생명체에서 주검으로 이르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검은 새로움으로 탄생된다. 이것은 기존의 틀을 깨는 것으
로 신선함을 그 특징으로 갖고 있다. 결국 삭힘을 통해 완전함에 이른다. 예술에서 아름다움이란 삶을 영위하면서 생각하고 느낀 것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즉 행위자가 자기의 본질성을 거짓이나 꾸밈이 없는 상태에서 순수하게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예술의 본질은 순수성이자, 아름다움이다. 그리고 이러한 순수성은 완전함을 지향하게 된다. 왜냐하면 완전함이란 실제로 없는 것이며, 모든 것을 비운 상태에서 자신을 삭힘으로써 새로움이 이룩되기 때문이다. 삭힘에는 촉매제와 그릇이 필요하며, 좋은 환경과 많은 시간을 요구한다. 그리고 손맛이 깃들여야 한다. 맛은 지고한 멋에서 만들어진다.”

실타래 풀려가듯 자연스럽게 표현된 자연유희

2000년대에 들어 대구미협 회장과 대구예총 부회장, 그리고 여러 축제 등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다 보니 시간에 쫓겼다. 그래도
틈만 나면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캔버스 앞에 앉아 붓질을 하다 보니 물의 번짐, 흐름, 어림 등이 절로 나타났고, 갈대나 연줄기 사이에 오리, 고니 등을 노닐게 하는 그림들로 두 번이나 전시회를 열었다. 또한 갤판에 얼룩진 색의 흔적을 좇아 꽃을 그리고, 구름과 새, 곤충 등을 그려 여러 번 전시를 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자연유희’라는 맥락에서 순리에 순응하는 삶의 형식을 표현한 그림들을 그리게 됐다고 본다. 한편으로 오랜 산중생활에서 묻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노자의 무위자연사상과 ‘그러한 까닭으로 마땅히 그렇게 된다.’는 자연의 법칙을 존중하게 됐다. 그러자 자연 속에서 함께 노닐고 희롱하면서 즐긴다는 차원에서 ‘자연유희’의 이미지가 실타래 풀려가듯 자연스럽게 표현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2010년에는 수성아트피아 초대전을 통해 나의 40년 그림 인생을 되짚어 보기도 했다. 나는 또한 민간 외교 차원에서 해외 교류전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6년 전에는 대구국제네트워크전을 기획하고 6개국 작가들을 초청해 수성아트피아에서 전시를 열기도 했다. 그 후속으로 이어진 몽골과의 교류전은 올해로 5년째를 맞고 있다.
지난 10월 아양아트센터에서 열린 개인전 전경


나무로 한을 표현하기까지

그리고 최근 아양아트센터에서 초대전을 선보였다. ‘아리랑을 품다’라는 이번 전시는 우리 민족의 한을 주제로, 큰 틀에서 ‘아리랑’에 그 의미를 두고자 했다. 나는 한이 곧 어떤 바람이고, 이 바람이라는 희망의 끈을 맺힘이 아닌 화해로 용해하고 응어리를 풀어나가는 한 방법으로 ‘나무’를 선택했다. 

오늘날에도 마을 어귀나 뒷산에 자리하고 있는 당산나무는 아주 먼 선조 때부터 후대에 이르기까지 마을을 지켜보며 마을의 안위를 보살펴 왔던 수호신이었다. 우리는 농경민족의 후예로 자연의 섭리를 존중하며, 자연과 더불어 공존하는 경천애인사상을 통해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왔다. 나는 ‘오늘날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이며, 그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을 우리의 오랜 정서 속에 녹아있는 한에서 찾고자 했다. 한은 밝음이고 깨달음이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한을 얻고자 수행과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고, 어디서나 한을 노래했으며, 한을 찾아 인고의 세월을 견뎌왔다. 견뎌온 세월만큼 또 한이 쌓이고 맺혀서 한 많은 세월을 살아왔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전시를 통해 나의 마음에 자리하고 있는 한을 나무의 모습으로 표현해 보고자 했다. 그리하여 나무가 갖고 있는 여러 이미지를 어떤 상황적인 화면으로 설정하고 그것을 상징화하기 위해 배경 또한 같은 색조의 파스텔 톤으로 구성했으며, 나무의 모습은 드로잉을 통해 선이 갖는 감성적인 면을 극대화하고자 했다.
   
이처럼 초창기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나의 작업 과정을 되돌아보니 한 시대를 살아온 화가로서의 나의 흔적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그러면서 2020년대를 앞둔 지금 이러한 모든 것들을 포용해 다시 한 번 또 다른 차원의 새로운 조형 세계를 개척하고자 하는 열망도 가져보게 된다.
 


김일환(1950~)은 
경북 영덕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했다. 대륜중과 대륜고를 거쳐 영남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대구대 대학원에서도 서양화를 공부했다. 1970년대 초반부터 활동을 시작해 현재까지 대구와 서울, 도쿄, 상하이 등지에서 30여 회의 개인전을 선보였으며,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1974년부터 1998년까지 중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로 후학들을 양성했으며, 대구미협 회장, 대구예총 부회장 및 대구 지역 내 여러 축제의 자문위원으로도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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